도시 역사문화콘텐츠 전문 아카이브 단체인 문화지평은 2022년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공익활동지원사업으로 ‘옛 전찻길 따라 시공간을 잇는 서울 역사’를 수행했다.
도시 역사문화콘텐츠 전문 아카이브 단체인 문화지평은 2022년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공익활동지원사업으로 ‘옛 전찻길 따라 시공간을 잇는 서울 역사’를 수행했다.

[미디어파인 칼럼=옛 전찻길 따라 시공간을 잇는 서울역사] 문화지평이 지난해 ‘옛 물길‘에 이어 올해는 ’옛 전찻길‘을 따라 서울을 속속들이 톺아보고 있다. 그 여섯 번째 답사로 지난 6월 5일 청와대사랑채에서 남대문까지 걸으면서 주변 역사문화, 수목생태, 산업관광 자원 등을 들여다봤다.

문화지평의 서울시 비영리민간단체 공익활동지원사업 ‘옛 전찻길 따라 시공간을 잇는 서울 역사’ 6차 답사는 배건욱 역사문화해설사가 해설을 맡았다. 배 해설사는 서울KYC 공동대표를 지낸 역사문화 해설 전문가다. 한양도성길라잡이 백악구간을 담당하고 있다. 배 해설사는 이번 해설과 함께 7차 영등포선 해설을 담당했다.

공사용 전차 여객용으로 전환 운행

답사 출발지인 청와대사랑채, 중간기착지인 공예박물관, 종착지인 남대문에서 각각 찍은 단체사진.
답사 출발지인 청와대사랑채, 중간기착지인 공예박물관, 종착지인 남대문에서 각각 찍은 단체사진.

1916년 시작된 조선총독부의 신청사 건설은 전차 노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총독부는 공사자재를 운반하기 위해 경성전기(주)의 협조를 얻어 화물 전차를 운행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1917년에는 전차가 공사현장까지 연결된 전용궤도를 따라 건축자재들을 실어 날랐다.

이 화물전차는 다음 해인 1918년 여객용으로 전환되어 운행하기 시작했다. 1927년에는 효자동까지 전차궤도가 복선으로 부설되면서 10년 만에 광화문통에서 경복궁의 서쪽을 두르는 효자동선이 완성됐다. 이 전차는 광화문통에서 총독부를 비롯한 식민통치기구와 동양척식(주)의 사택, 총독부 관사 등을 지나갔다. 하지만 광화문통과 효자동 간을 왕복하는 전차는 광화문통에서 환승해야 다른 지역으로 갈 수 있는 지선전차였기 때문에 불편함이 있었다.

이 문제는 총독부와 경성부청이 신청사로 이전함에 따라 태평통 도로가 개수되면서 총독부-경성부청-서울역-신용산을 잇는 노선의 전차가 개통으로 해결됐다. 또한 총독부 앞에서 안국동을 돌아 종로에 접속하는 전차노선도 신설됐다. 1923년 식산은행 사택이 있던 안국동까지 종로와 연결하는 전차궤도가 부설된 후, 1929년에 조선박람회 입구가 이전된 광화문으로 결정되면서 총독부에서 안국동까지 전차노선이 연장됐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총독부 일대로 전차노선이 신설된 특징이 있다. 1910년대 전차노선이 황금정통을 따라 신용산까지 청계천 이남에 신설되었다면, 1920년대에는 총독부와 경성부청의 신청사 이전으로 이 일대에 전차가 운행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전차노선은 도성 안의 종로와 황금정통을 동서축으로 연결하면서 총독부-경성부청사-서울역-신용산을 잇는 남북축이 완성됐다.

전차노선 변화에 큰 영향 준 총독부 신청사

조선총독부 주변 관사 및 사택. 김명숙 ‘일제시대 경성부 소재 총독부 관사에 관한 연구’(서울대 석사학위 논문, 2004년)
조선총독부 주변 관사 및 사택. 김명숙 ‘일제시대 경성부 소재 총독부 관사에 관한 연구’(서울대 석사학위 논문, 2004년)

하늘이 뿌옇지만 비 소식은 없다. 이런 날씨가 얼마만인지. 걷는 내내 발걸음이 가벼울 것만 같다. 다들 나와 같은 마음인지 유독 나들이 나선 인파가 많아 보인다. 모두의 발길이 향한 곳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금기로 여겨졌던 장소다. 누구도 이와 같은 전개를 꿈꿔보지 못했을 거다. 금기의 해제는 실로 급작스러웠다. 유사 이래 어쩌면 가장 많은 사람들이 청와대 근처를 서성이게 된 듯하다.

엄숙함이 사라진 공간은 종교계에서도 타깃 삼기 딱이었다. 포교의 뜻을 품은 이들이 내세운 깃발이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나부끼고 있었다. 수도를 뛰어넘어 대한민국을 신에게 바치는 시대가 도래한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래 전 서울시장이 서울을 신에게 바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으니, 대상이 대한민국으로 바뀐다 하여 천지개벽할 사안은 아니리라.

벌써 여섯 번째, 전차 노선을 따라 걷는다. 흔적조차 남지 않은 노선은 적어도 지금까지의 경험이 맞다면 어느 한 지점을 향해 수렴하는 모양새를 띠고 있었다. 청와대사랑채(효자동)에서 출발한 이날의 걸음은 불과 1주일 전 답사의 출발 지점이었던 숭례문까지 이어졌다. 걸어온 나날들 중 가장 짧은 거리이지 싶었으나, 그 걸음이 마냥 가볍지만은 않았다. 일반인들에게 닫힌 공간이었던 청와대가 순식간에 문을 열어젖히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이 일대의 개방은 빛의 속도로 행해졌다. ‘개방’이라 적었으나 이는 심히 순화된 표현에 해당한다. 전차를 놓기 위한 성곽의 허묾이라든지 우후죽순 들어선 각 국 공사관의 입지 결정 등에 제 목소리를 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일방적으로 결정됐고, 우리의 몫은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시대가 변화를 요구하고 있기는 했다. 근대로 나아가기 위해 도로의 정비는 필수였는데, 때 마침 전기와 전차가 도입돼 얼추 조건이 맞아 떨어졌다. 나름 힘을 써 보려는 노력이 없진 않았다. 허나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 선 입장에선 모든 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우습게도 그 안에서 얼마 아니 남은 권력을 누리려는 이들의 대립 또한 격렬했다. 공화정을 주장하는 독립협회의 요구에 고종은 전적으로 응할 수 없었다. 아니, 그에 앞서 흥선대원군과 민씨 세력 간의 암투 또한 치열했다. 하나로 힘을 합쳐도 부족함이 하늘을 찌르거늘, 애당초 하나가 될 수 없는 이들이 난립했으니 종이호랑이 신세를 면치 못한 게 당연했다.

모든 건 처음이 어렵다. 서대문에서 홍릉까지 첫 전차 노선이 놓인 이후로 순차적으로 전차는 도입됐다. 고종 입장에서는 배우자가 잠들어 있는 홍릉을 편히 오갈 수 있는 수단을 도입한 것이나 그렇다 하여 전적으로 권력자의 욕구에만 전차가 부응했던 건 아니었다. 사람들은 신문물 앞에서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린 채 넋을 잃지만은 않았다. 일제 역시 나름의 품은 의도가 있었기에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서울 한복판의 궁들은 근대 도시로의 거듭남을 방해하는 요소로 여겨지기 딱이었다. 일제는 자신의 것이 아니므로 가치를 묻지 않았고, 개화를 부르짖는 이들 또한 과거는 청산의 대상이라 여기기 바빠 보전에 대해 신경 쓰지 못했다. 그렇게 하나둘 파괴되기 시작했다. 경복궁은 1920년대 본격적으로 해체에 가까운 변화를 겪었다. 성곽이 끊겼으며, 문이 헐렸다. 해방 이후 가까스로 ‘복원’이라 하는 게 시도됐으나 이미 어마어마한 차량이 오가는 길을 좁히거나 없애는 건 요원했다. 본래의 위치에서 한참 뒤로 일린 곳에 광화문이 놓였다. 그로 인해 동십자각이 외딴섬마냥 도로 한가운데 홀로 놓이게 됐다. 아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서십자각도 있으니 마냥 목 놓아 울 수도 없는 일이라 하겠다.

바라보고 선 분수대 너머 공간이 무궁화동산이라 했다. 지금도 어딘가 모르게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궁정동’을 바라보는 심경이 복잡하다. 10.26 현장인 궁정동 안가가 떠올라서 그랬을 것이다. “그래도 경제는 발전시키지 않았냐”는 말로 모든 게 정당화되는 일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병자호란 당시 끝까지 청나라와 싸우길 청한 김상헌의 집터 또한 현 무궁화동산 인근이라 들었다. 이미 망한 명나라를 섬기는 일을 목숨보다 더 중히 여겼던 그의 세계관은 어떠했을지.

머나먼 이국땅에 인질로 끌려가 온갖 고초를 다 겪었다곤 하나 그가 청으로 압송된 시점은 종전 직후가 아니었으며, 그의 후손들은 조선을 망국으로 몰고 간 세도정치를 주도함으로써 ‘안동김씨’(신 안동김씨 중 한양 장동에 자리 잡은 일파로 조선말 세도정치의 중심 가문을 뜻하는 ‘장동김씨’로 일컫는 게 옳다는 견해도 있다)의 악명을 역사에 길이 새겼다. 궁정동이 품은 기운이 본디 그러한 건지. 달리 해석될 여지가 충분한 이야기들이 가득 탄생한 장소를 바라보는 시선이 마냥 곱지만은 못했다.

신익희 집터와 진명여고 자리였다는 곳, 한 때 국민대학교가 위치했다는 장소를 스친다. 대통령선거 유세를 위해 이동 도중 심장마비로 급작스레 세상을 떠난 신익희의 죽음에 어쩌면 정치테러가 얽혔을지도 모른다는 합리적 의심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광복 그리고 건국이라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삶과 죽음은 빈번히 엇갈렸고, 누가 생존할지는 신도 몰랐지 싶을 만치 대혼돈의 연속이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이후 걷다 만난 조선중앙일보 사옥 터에서 다시 한 번 언급된다.

많은 학교가 선교사에 의해 마련된 데 반해 진명여고는 우리 힘으로 세운 학교다.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자 설립자 엄준원 선생이 엄순헌귀비로부터 대지를 하사받아 학교를 설립하고 제 1대 교장에 취임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엄준원’이라는 인물을 검색하면 ‘일제강점기 헌병사령관, 진명여학교장,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돈은 필연적으로 부패를 부르는가. 조선일보나 동아일보를 무어라 평하기 어렵듯 이 또한 ‘민족사학’으로 칭하자니 어딘가 모르게 불편했다.

그 옆으로 굳게 닫힌 문으로 인해 들어가 보진 못한 보안여관이 있었다. 현재는 각종 전시를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여관이던 시절엔 미당 서정주 등 문인들이 장기간 투숙하며 글을 써 유명했다고 한다. 한 때 각광 받은 도시재생의 바람직한 사례 즈음으로 꼽히면서 재조명되기 시작하였으나 시장이 바뀌었고 시류 또한 달라져 이제는 어떤 평을 들을지, 앞으로도 이와 같은 공간이 탄생 가능할지는 지켜볼 일이다.

아까부터 계속해서 경복궁의 거대한 담을 옆에 끼고 걸었는데, ‘영추문’이라 적힌 문이 웅장함을 뽐내며 등장했다. 건축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황제의 지붕’이라 일컬어지기도 하는 우진각 지붕의 형태를 취해 이와 같은 웅장미를 획득할 수 있지 않았나 싶었다. 아무리 거대하여도 현대 문물 앞에서 무기력하기는 매한가지. 1926년 영추문은 한 차례 무너지고야 마는데, 그 이유가 문 앞에 바짝 붙여 설치한 전차 종점이 수시로 내뿜은 진동 때문이라는 추정이 있다. 1926년엔 참고로 순종 또한 사망한다. 영추문 붕괴와 순종의 승하는 별개의 일일 테지만, 연달아 일어난 일련의 비극으로부터 적잖은 이들이 풍전등화와도 같은 나라의 운명을 읽어냈을 것이다. 여전히 뒷골목에서 빼어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몇 채의 적산가옥 등은 이러한 혼란 속에서 세워졌으려나. 아니, 일본인들에게 이 땅은 새로이 개척된 기회의 땅이었을 테니, 울분을 터트리는 건 조선인들뿐이었을 것이다.

고즈넉한 골목길로 접어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통의동백송터에 도착했다. 명칭은 낯설었으나 그 모양새를 보기가 무섭게 몇 해 전 방문했던 장소임을 떠올릴 수 있었다. 태풍 당시 쓰러져 고사한 백송을 안타까워하며 마을 주민들이 바로 옆에 세 그루 가량의 백송을 심었다는데, 예전보다 훨씬 우람(?!)해진 모습으로 우릴 맞이해 심히 놀랐다. 자연의 샘명력에는 한계가 없는 듯. 하늘을 떠받친 녀석들과 생을 끝마친 녀석이 이룬 극적인 대비가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헌법재판소에 놓인 백송과 조계사 대웅전 앞에 놓인 백송까지 묵어 3대 백송으로 칭한다던데, 살아 있는 녀석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통의동 백송이 왠지 그 중 으뜸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 일대가 추사 김정희 집터라더니, 백송터 바로 옆 가옥에 매달린 현판이 추사의 글씨를 담고 있어서 놀랐다. 주인장이 이를 알고 일부러 추사의 글씨를 구해 매단 건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영조가 왕이 되기 전 살았다던 창의궁터를 표지판으로만 접하고 나니 광화문 앞에 서게 됐다. 현재의 광화문은 이명박 정권 시절 공사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그 전의 것은 박정희 시대에 세워졌으며 콘크리트 재질로 만들어졌다고. 당시 한글로 쓰인 ‘광화문’이라는 글씨가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일명 각하체)라는 기사를 얼핏 본 기억이 나는데, 현재는 ‘門化光’이라 적혀 있었다. 때마침 수문장교대식이 전개 중이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와 같은 의식이 거행됐을 것만 같아 보이나 실상 이는 1990년대 탄생한 지극히 새로운 것이라 한다. 새것으로부터 옛것의 향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은 건 아마도 무지가 낳은 착각이리라.

신익희 집터·진명여고 등 역사적 장소 많아

조선박람회 개최를 맞이해 운행되던 전차.[사진=오슈시립 사이토마코토기념관]
조선박람회 개최를 맞이해 운행되던 전차.[사진=오슈시립 사이토마코토기념관]

광화문 옆쪽으로는 앞서 언급한 동십자각이 도로 한복판에 고립 상태로 놓여 있었다. 광화문과는 어떠한 연결고리도 갖지 못하다 보니 용도가 무언지, 저 곳에 닿으려면 별도의 사다리나 밧줄을 설치에 기어올라야 하는 건지 등 의견이 분분했다. 만일 광화문이 본래의 위치를 되찾았더라면 동십자각의 형태가 지금과는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광화문 앞에 놓인 해태상 역시 여타 하마비가 그러하듯 지금의 위치로부터 20-30미터 혹은 그 이상 앞으로 전진 배치돼 모두에게 말에서 내릴 걸 엄중히 요구했지 싶다. 가까이 다가설 수 없어 멀찍이서만 바라보았으나 동십자각은 매우 잘 지은 건축물이었다. 처마의 곡선이 매우 날렵했고, 벽돌을 정교하게 쌓아올려 낸 문양 또한 고풍스러웠다. 빗물이 건축물을 훼손 않고 바닥으로 낙하하도록 설치한 구조물 또한 세련된 양의 문양으로 단지 군사적인 기능만을 위해 이와 같은 망루가 설치된 건 아니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한 때 소나무가 가득해 소나무언덕으로도 불렸다는 송현동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바로 옆이 궁인데다 지대가 경복궁보다 높으니 자연스레 집을 지을 수 없어 소나무 숲으로 뒤덮였으리라는 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도로가 나면서 일정 부분 평탄화 작업이 이루어지고 나무 또한 사라져 지금에 이르렀다. ‘송현동’이라는 지명 외에는 옛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여지가 없어 많이 아쉬웠다. 철 대문이 위압감을 내뿜는 미대사관저 출입문 옆을 지나 풍문여고 자리를 지나쳤다. 일대에 호텔을 지으려던 계획이 저지되는데 학교의 존재가 큰 힘을 발휘했다고 하나 현재는 강남구 자곡동으로 이전하였으며 교명 또한 풍문고등학교로 변경됐다. 한동안 만인의 지대한 관심을 받은 이건희 기증관이 조만간 이 일대에 모습을 드러낼 전망이라 하니, 또 한 번의 지각 변동이 예견돼 있다 하겠다.

절로 갑신정변이 떠오르는 장소 우정총국 건너편에 잠시 멈추어 섰다. 연등이 화려하게 달린 조계사 앞 백송은 상대적으로 수수해 보였다. 일행이 머문 자리에는 NH농협 종로금융센터로 현재 쓰이고 있는 건물이 한 동 있었다. 부착된 서울미래유산 현판에는 ‘구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사옥’임이 표기 돼 있었다. 1926년 조선일보의 사옥으로 건립됐으며 이후에는 조선중앙일보 사옥으로 사용됐다. 조선중앙일보를 언급할 때 빼놓아선 아니 되는 인물인 여운형에 대한 이야기는 당시 정세에 대한 언급으로부터 출발했다.

일제 패망은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무기 아닌 사람이 무기가 되어 적진을 공격하는 이른바 가미가제 특공대의 등장은 일제가 봉착한 물자수급 문제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와도 같았다. 이미 국내에선 이를 눈치 챈 이들이 존재했다. 여운형은 조국 해방이 필히 이루어지리라는 걸 전제로 1944년 건국동맹 조직을 주도하였다. 당시 가장 세가 컸던 건 조선공산당이었으며, 여운형 또한 새로운 조국을 이끌 유력한 지도자로 각광 받았다. 조선공산당, 여운형 주도의 조선인민당과 달리 소위 우파라 할 수 있는 한국민주당계엔 친일 인사가 대거 합류해 정당성을 인정받기 힘들었고, 김구의 독립당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의 영향력을 지니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후 전개된 역사는 모두가 알고 있는 바대로다. 광복 직후 내걸렸던 태극기는 치안 문제를 책임질 집단으로 친일 인사들이 다시금 등용됨에 따라 일장기로 뒤바뀌었고, 이는 9월에 이 땅에 입성한 미군에 의하여 성조기로 교체됐다.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 중이었던 조선공산당은 미군정이 실시한 정당 등록제도 하에서 등록 취소됨으로써 존재를 부정당했고, 백의사, 서북청년회 등 극우적 단체는 테러를 일으키며 당대 주요 인사들을 하나둘 제거해 나갔다. 김두한, 이정재 등 정치 깡패의 활약도 이 시기에 도드라졌다.

각 지역에서 조직화돼 자신의 목소리를 냈던 노동자, 농민들은 연이은 무력 진압 등으로 와해되기에 이르렀다. 엔도 총감이 찾아와 일본철수의 교섭을 부탁했을 정도로 영향력을 인정 받았던 여운형 선생 또한 암살을 피하지 못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이념 다툼에 의해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한 측면이 크다. 오로지 몇몇 장소에 설치된 안내 표지석, 지금은 칼국수 집이 운영되고 있다는 북촌의 그의 집터 정도가 여운형을 기릴 수 있는 장소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그는 다방면에서 재능을 보였다. 체육인 여운형의 모습은 낯설지만, 그는 조선체육회 초대 회장이었다. 손기정 선생이 올림픽 출전을 놓고 고심할 때 그의 출전을 독려했던 것 또한 여운형 선생이라고 한다. 일장기 말소 사건이라 하면 흔히 동아일보를 떠올리지만, 그보다 일장기를 말소했던 건 조선중앙일보였다. 이로 인해 동아일보가 일정 기간 정간 처분 후 이완용, 관동 대지진에 깊게 관여한 미즈노 렌타로 등의 인사에게 사죄함으로써 발행을 재개한 반면, 조선중앙일보는 폐간의 길을 걸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에게 동아일보만이 기억되는 건 ‘역사는 승자의 입장에서 쓰인 기록만을 뜻한다’는 말이 무언지를 보여주는 사례와도 같다 하겠다.

지금도 수송 초등학교 건물이었던 구조물의 일부가 남아 있는 곳에서는 종로구 통합청사 건축이 한창이었다. 부지를 감싸고 있는 공사장 펜스가 일대의 드넓음을 가늠케 해 주었다. 한 때 정도전의 집이 있던 자리라고 하였고, 이방원에 의해 정도전이 제거된 후에는 말 따위를 기르는 관청인 사복시가 들어서 정도전에 대한 철저한 능멸이 이루어졌다. 여운형의 조선인민당의 당사 또한 이 곳에 있었다. 이런 역사를 지닌 땅에 상업 건물 아닌 행정기관이 들어선다는 사실이 일말의 위안을 선사했다.

심히 메말라 건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 중인 중학천을 옆에 끼고 걷다 보니 고종 어극 40년 칭경 기념비 앞에 섰다. 현 동아일보사가 한국민주당 당사 건물이었다는 이야기, 원래 도로원표의 위치가 이 곳이었다는 이야기 등을 들을 수 있었다.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광화문 광장 옆 광화문 빌딩이 오늘따라 드높게 느껴졌다. 필지 두 개를 합해 건물을 지었다는 이날의 이야기보다는 예전에 들은, 종로구와 중구가 이를 놓고 다투었다는 이야기가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지금도 건물 저층 부분은 종로구고, 상층은 중구인지. 결국 다 인간이 행하는 일이므로 이와 같은 결론에도 이를 수 있었던 걸로 보인다.

태평통선 신설은 총독부-용산 직통 의미

숭례문에서 바라 본 태평통선 모습.[사진=서울역사박물관]
숭례문에서 바라 본 태평통선 모습.[사진=서울역사박물관]

구 러시아 공사관의 높이가 짐작 가능했던 황토현 언덕 줄기를 감상한 후에 서울시의회 건물로 향했다. 부민관이라 하여 그런가보다 막연히 여기고 있었으나 여기서의 ‘부’는 ‘경성부’를 뜻한다는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1930년대엔 주로 학도군 전쟁 참전을 독려하는 연설 등이 행해졌다고 하니, 이에 폭탄을 던지는 등의 항거가 일어난 건 이례적인 일이 결코 아니었다. 의원이 하나의 직업이자 벼슬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요즘이다. 민중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과거 부민관이 겪은 것과 같은 수난(!)으로부터 자유롭기 힘드리라는 역사의 경고를 온몸과 마음에 새기는 지혜가 필수라 하겠다.

이제 슬슬 끝이 보인다. 불과 일주일 전 답사의 첫 걸음을 내디뎠던 숭례문이 머지않았다. 여러 해가 지났음에도 여전히 적응이 쉽지 않은 서울시청 청사 건물이 길 건너편에 나타났다. 통유리 건물은 여름철엔 덥고 겨울이면 춥다던데. 무엇보다 서울도서관으로 사용 중인 구 서울시청 건물과의 부조화가 예나 지금이나 참으로 볼썽사납게 느껴지는 건 어찌하지 못하겠다. 농담 반 진담 반, 오세훈 시장의 치적으로 천문학적인 예산을 들여 건립한 건물들을 거론할 수 있다는 말이 오갔다. 호랑이가 죽어서 가죽을 남기듯 사람은 건물은 남겨야 하는 지라 오늘날 저마다 부동산에 그토록 매진하는 건가 싶어 기분이 묘했다.

​각종 단체의 천막으로 얼룩졌던 덕수궁 앞은 여전했다. 거기에 월대 재현을 위한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기까지 해서 대한문은 어딘가 모르게 번잡함이 가득했다. 덕수궁이 덕수궁이 아니면 무엇이랴 싶었으나, 원래의 명칭은 ‘경운궁’이었으나 고종이 순종에게 왕위를 물러주고 이 곳에 거쳐하게 됨에 따라 명칭이 덕수궁으로 바뀌었다. 덕수궁 할 때 ‘덕수’에는 은퇴의 의미가 담겨 있으니, 이는 조선의 2대 임금 정종이 태종에게 보위를 물려주고 덕수라는 호를 받은 것처럼 왕위에서 물러나 어떠한 영향력도 발휘 못하면서 오래도록 살라는 일제의 바람(!)이 담겼다고도 볼 수 있다. 원래대로 경운궁으로 명칭을 되돌리려는 노력이 없었던 아니다. 덕수궁이라는 이름에 대부분이 더욱 익숙하고, 덕수궁을 경운궁이라 지칭하였을 때 야기될 혼란이 적지가 않을 것이므로 아직까지는 덕수궁으로 불리고 있다.

1970년대 후반 낙후한 지금의 북창동 지역을 시각적으로 차단하고자 병풍 모양으로 세웠다는 ‘더 플라자 호텔’, 현 남대문시장 쪽에 있었다는 선혜청(쌀 창고) 터, 마포 방면으로 뻗은 만리재에 이르는 길에서는 주로 생선이 거래돼 현재도 일부 생선가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는 설명까지. 듣다 보니 어느덧 숭례문 앞에 당도했다. 복장을 제대로 갖추어 입은 수문장들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문을 수호하고 있었다. 아, 가만 있어보자. 이 쪽은 성 안인데? 성 밖에서 성 안으로 들어오려는 사람을 단속하는 게 바람직한 거 아닌가라는 다소 쓸데 없는 노파심을 품는 걸 끝으로 오전 내내 이어진 걸음을 마무리하였다.

궁과 제법 가까운 위치, 왕의 거주만이 허락된 장소였으므로 단조로움이 생명이었을 것이다. 전차가 들어서던 시기에는 그간의 단조로움에 균열이 가해졌다. 근대적 학교와 같은 우리 민족을 위한 시설도 일부 들어섰으나 극소수였고, 대부분이 제 입맛에 맞추어 이 땅을 좌지우지하기 위한 세력들의 입점에 해당했다. 실상 정체성의 해체였으나 그 과정은 진보로 포장됐다. 어떤 진지한 논의도 허락되지 않았다. 길을 넓히고 숭례문 좌우 성벽을 헐어야 할 이유였던 일본 왕세자 방문이 이 땅에 가져다주었을 풍성함이 과연 얼마나 되었겠는가! 허울뿐인 논리, 그 위에 지어진 위태로운 우리의 근, 현대를 되짚어 보게 됐다. 전차가 불과 백 년도 못 버티고 철거된 것처럼 우리가 추구해온 많은 것들 또한 언제라도 쉬이 사라질 수 있는 신기루는 아니었으면 싶은 바람이 컸다.

<참고문헌>
-서울지역 전차교통의 변화양상과 의미(1899~1968), 최인영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2014
-서울의 전차, 서울역사박물관, 2019
-서울 중구청 홈페이지

[문화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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