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역사문화콘텐츠 전문 아카이브 단체인 문화지평은 2022년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공익활동지원사업으로 ‘옛 전찻길 따라 시공간을 잇는 서울 역사’를 수행했다.
도시 역사문화콘텐츠 전문 아카이브 단체인 문화지평은 2022년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공익활동지원사업으로 ‘옛 전찻길 따라 시공간을 잇는 서울 역사’를 수행했다.

[미디어파인 칼럼=옛 전찻길 따라 시공간을 잇는 서울역사] 문화지평이 지난해 ‘옛 물길‘에 이어 올해는 ’옛 전찻길‘을 따라 서울을 속속들이 톺아보고 있다. 그 세 번째 답사로 지난 5월 7일 전차가 부설된 서대문부터 마포까지 걸으면서 주변 역사문화, 수목생태, 산업관광 자원 등을 들여다봤다.

문화지평의 서울시 비영리민간단체 공익활동지원사업 ‘옛 전찻길 따라 시공간을 잇는 서울 역사’ 3차 답사는 한이수 역사문화해설사가 해설을 맡았다. 한 해설사는 전국역사지도사모임 일원으로 공저 ‘표석을 따라 제국에서 민국으로 걷다’, ‘표석을 따라 한성을 거닐다’가 등을 출간했다.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했고 40대 후반에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이 폭발해 학창 시절보다 더 열심히 역사책을 읽으면서 최근에서 대학원에서 미술사학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 문화지평 역사문화해설사, ‘우리문화숨결’에서 경운궁(덕수궁) 궁궐길라잡이로 활동하고 있고, 서울도시문화연구원에서 서울미래유산과 문학기행 해설하고 있다.

용산보다 더 번성했던 강항 마포

지난 5월 7일 오전 9시 서대문역 4번 출구 디타워돈의문 앞에서 시작한 답사는 마포대로를 따라 걷다가 마포종점 노래비가 있는 마포어린이공원에서 막을 내렸다. 충정각, 영화기생충 촬영지 돼지슈퍼, 마포어린이공원 모형전차 앞에서 찍은 3차 답사 단체사진 장면.
지난 5월 7일 오전 9시 서대문역 4번 출구 디타워돈의문 앞에서 시작한 답사는 마포대로를 따라 걷다가 마포종점 노래비가 있는 마포어린이공원에서 막을 내렸다. 충정각, 영화기생충 촬영지 돼지슈퍼, 마포어린이공원 모형전차 앞에서 찍은 3차 답사 단체사진 장면.

1차 답사기에서는 전차를 통한 대한제국시기 수도 한성의 도시개조사업 중심으로 서문을 풀었다. 2차 답사기에서는 전자가 가져온 여객과 물산의 수송 혁명을 중심이었다. 3차 답사는 일제 강점 전 대한제국기의 마지막 도시개조를 위한 경교에서부터 마포종점에 이르는 마포선이다.

세 번째 노선 역시 철도역과 연결되도록 전차 노선을 설계했다. 경인철도 서대문정거장과 남대문정거장을 연결한 짧은 의주로선 전차가 연결됐다. 이 노선은 1900년 7월 서대문에서 의주로를 지나 남대문까지 연결됐다. 그러나 부설 3년이 채 안 돼 운행이 중단됐다. 이유는 이용 빈도가 떨어졌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마포선은 대한제국기 마지막 노선이다. 마포는 경인선이 개통되기 전까지 인천, 강화 등 서부지방에서 올라오는 농수산물 집산지다. 마포나루는 규모가 큰 강항으로 용산보다 번창했다. 마포나루의 옛 이름은 삼개나루다. 마포 와우산, 노고산, 용산 서쪽 사면 구릉이 한강으로 뻗어 내린 곳에 세 곳의 포구가 있었다.

이를 용호, 마호, 서호로 불렀다. 이들을 함께 이르던 말이 삼개포구였다. 한자 표기를 하면서 석 삼(三) 대신 마 삼(麻)자로 쓰면서 마포로 부르게 된 것이다. 현 마포대교 북단 용강동 마포 유수지 부근이 마포나루였다.

1906년 10월에는 탁지부 건축소 소속 마포 연와제조소가 설치돼 벽돌과 기와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마포선은 이에 앞서 같은 해 7월 4일 궤도부설이 허가됐다. 이후 서대문부터 마포에 이는 마포선은 1907년 초 준공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중앙선, 용산선 등 대한제국기 도입된 전차는 경인철도의 개통이 노선 결정에 중요한 결정을 미쳤더. 서대문에서 동대문에 이르는 첫 노선과 종로에서 남대문, 용산을 있는 용산선, 서대문정거장과 남대문정거장을 잇는 의주로선까지 모두 철도 경인선과의 연결에 주안점을 뒀다.

일제에 의해 국권을 야금야금 피탈 당하던 대한제국의 쇠퇴로 경인선 개통 초기 활성화됐던 서대문정거장 역할도 쇠락했다. 그러는 사이 전차운영회사는 한성전기(1898)에서 한미전기(1904)로 바뀌고 러일전쟁 후 일제의 세력 강화에 따라 당시 가스사업을 하던 일한와사에 1909년 매각됐다. 이 회사는 1915년 경성전기로 이름을 바꾼다.

종각서 구 용산 용문시장까지 전찻길 따라 답사

대한제국기 전차선로.
대한제국기 전차선로.

이제부터 1인칭 시점 답사기다. 오늘의 출발지점은 서대문역 4번 출구였다. 마포 종점까지 달리던 전차의 시작 지점인 이 일대는 지금은 흔적을 찾기 힘들어진 만초천을 비롯하여, 이중섭과 김수영이 생의 마지막 순간 머물렀던 적십자 병원, 불우한 천재 화가 손상기에게 사망 선고를 내린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 등 서대문역 일대에는 넘치는 이야기가 깃들어 있었다.

전차 노선을 따르는 게 기본이었으나 곳곳에 깃든 이야기를 만날 적마다 시간을 넘나들었더니 1시가 다 되어서야 4km에 채 미치지 못하는 구간 걷기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공덕동, 아현동 일대에 들어찬 고층 빌딩과 아파트가 뿜어대는 위압감으로 인해 한 때 아무것도 없었다는 전차 노선 주변을 상상하는 일이 제법 어려웠다. 어디 이 뿐이겠는가! 꼭 서울이 아닐지라도 압축적으로 급격한 발전을 이룬 대한민국 전역이 ‘상전벽해’를 증명해 보이는 증거와도 같을 것이다.

편의를 위해 걸으며 만난 순서대로 기록으로 남긴다. 듣기가 무섭게 잊어버리는 휘발성 메모리의 소유자라서 일부 내용은 정확도 면이 살짝 우려되기도 한다. 시대가 좋아 손가락 몇 번 움직여 검색하면 알고자 하는 거의 모든 내용을 찾아낼 수 있으니, 미심쩍거나 더 알고자 하는 부분이 있을 땐 약간 부지런을 떨기로 하자.

전차와 더불어 첨단 문명으로 여겨졌을 아파트의 초기 형태라 칭할 수 있는 건물들을 이번 답사 구간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 중 가장 먼저 등장한 건 미동 아파트였다. 1969년 지어진 미동 아파트의 전신은 경성대화숙. 당시 충정로는 갑신정변 때 안위를 위해 황급히 일본으로 피신했던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성을 따 다케조에초(죽첨정: 竹添町)로 불렸다.

이로부터 비롯된 전차 죽첨역이 존재하기도 하였으나 서대문역에서 걸어서도 무척이나 가까운 위치 탓인지 전차영업 노선도에서는 그 이름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해방 후 일본식 거리 이름과 마을 이름을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위인의 이름으로 바꾸는 작업이 진행됐는데, 다케조에초는 을사늑약에 항거하며 자결을 택한 충정공 민영환의 이름을 붙여 ‘충정로’가 됐다. 한편, 미동 아파트는 월북 문학가 김남천의 작품 ‘경영’ 과 ‘맥’ 에 ‘야마토 아파트’라는 명칭으로 등장하기도 했였다.

미동 아파트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1930년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 충정 아파트를 만나게 된다. 연두색 혹은 녹색 표면이 얼룩덜룩한 것이 이 건물이 버티어 온 시간이 결코 무난하지 않았음을 말해 주는 듯 하였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건물 지하가 인민군의 양민 학살 장소로 사용된 적이 있으며, 충정로가 넓어지면서 아파트의 일부가 잘려 나가는 일도 있었다.

갑자기 집을 잃은 사람들은 갈 곳을 잃고 남아 있는 건물의 복도, 새로이 쌓아 올린 5층 등지에 짐을 풀었으니, 이는 가뜩이나 복잡한 아파트 소유권 문제를 보다 꼬이게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듣자하니, 전쟁으로 아들 여섯을 모두 잃었다는 거짓 이야기를 퍼뜨려 이승만으로부터 이 건물을 하사(?) 받은 김병조라는 인물이 호텔로 개조했다가 사실이 밝혀져 빼앗기는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건물이 누구의 것인지는 이미 불투명해진 상황이었다. 이와 같은 현실이 아니었으면 진작 건물을 헐렸을 터이니 이를 다행이라 여겨야 하나 살짝 헷갈렸다.

​바로 옆으로는 이전에도 몇 차례 답사를 하며 스쳤던 충정각이 이른 시각인지라 굳게 닫힌 문으로 일행을 맞이했다. 100년이 넘은 고풍스러운 건물에 적용된 9각 첨탑, 검은색 창틀 등은 미국 캘리포니아 양식이 도입된 결과라 했다.

1900년대 초에는 한성전기 기사장, 나름 상류층이었을 식산은행 비서실 근무자 등의 거주지로도 활용됐던 장소가 이제는 이탈리안 음식을 판매하는 레스토랑이 돼 있었다. 혹 가격이 착하지 않을지라도 음식 값에 건물이 머금은 시간 값을 더한 것이라 해석한다면 마냥 비싸게만 느껴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한성전기 기사장 지낸 멕렐란 옛집 충정각 지나

한성전기 기사 멕렐란이 자신이 살던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연안 주택을 본따 지은 이양식 건축으로 지금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운영되고 있다.
한성전기 기사 멕렐란이 자신이 살던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연안 주택을 본따 지은 이양식 건축으로 지금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운영되고 있다.

온갖 가구를 판매하는 가구상들이 집결한 아현동 고개를 지나 영화 ‘기생충’의 촬영지로 향했다. 서울(예전의 서울이라 함은 사대문 안을 의미했다)과 가까운 아현동 일대에 날품팔이 등을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로 인해 오래도록 아현동 쪽은(번지를 언급하자면 산 7번지, 699번지)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사람들의 집단 거주 장소라는 이미지를 굳건히 유지해 왔다. 산 7번지의 경우 현재는 재개발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으니, 이는 신조어 ‘마레푸’(마포에 있는 레미안, 푸르지오)의 탄생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버스정류장명 돼지슈퍼. 허나 간판에 쓰인 상호는 ‘돼지쌀슈퍼’였다. 이름만을 놓고 보았을 때 일대 주택가에 고기, 쌀까지도 공급했던 구멍가게 이상의 역할을 수행해온 슈퍼 같이 여겨졌다. 영화 ‘기생풍’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을 적엔 바다 건너 일본에서도 단체 관람객들이 버스를 대절해 방문하기도 했다. 운영한 지 ‘37년’ 됐다는 주인장은 그로 인해 딱히 허리가 펴진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영화 촬영 장소임을 알리는 패널 같은 게 가게의 측면에 설치돼 있었다. 이를 설치한 건 마포구청이라 들었다. 어떠한 모습이건 제 지역이 언론에 노출된다는 건 지자체 입장에서 기분 좋은 일인 듯라다. 필지가 거주하는 지역도 오래 전 ‘응답하라 1988’이 각광을 받자 등장인물과 연관이 있는 걸로 추정 가능한 음식점 등에 현수막을 내걸었고, 영화 ‘오징어게임’ 촬영지 옆에는 자그마한 체험관을 마련하기도 했다.

지자체들의 대응이 비슷하다는 걸 상상력의 부재로 해석하는 건 과한 것일까. 오늘날처럼 제 아무리 높은 인기를 기록했을지라도 불과 몇 주 만에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일이 비일비재한 상황에서는 보다 지속가능한 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고민이 필요할 거 같은데 그 단계까지 나아간 경우가 몹시 드문 듯해 유감이다. 슈퍼 옆 골목 끄트머리에 놓인 가파른 각도의 계단이 달동네를 연상시켰다. 허나 계단 앞 주차된 외제차가 자아내는 부조화가 일품이었다.​

오래도록 코로나19로 학생 아닌 이들의 학교 출입이 어려웠다. 아현산업정보학교 문이 열려 있어 주저하면서도 안엘 살짝 들어가 보았다. 특성화 고등학교 정도로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독특하게도 직업교육을 원하는 서울특별시 소재 일반계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에게 직업교육을 실시하는 학교였다. 이 곳 학생들은 본래 적을 둔 학교의 학생증과 아현산업정보학교의 학생증을 동시에 갖게 된다고 했다.

현 학교 명칭으로부터는 연상이 잘 되지 않았으나, 이 일대는 ‘경기공업고등학교 앞’이라는 전차역이 위치했던 곳이기도 했다. 공립어의동실업보습학교, 어의동공립간이공업학교, 경성공립직업학교, 경기공립공업학교 등으로 경기공업고등학교 전에도 이름이 여러 차례 달리 불렸었다. 경기공업고등학교가 노원구 공릉동으로 이전(현 서울과학기술대, 구 서울산업대, 구 서울 공대)한 후에도 아현산업정보학교가 들어선 걸 보면 나름 직업 교육에 적합한 기운이라도 땅에서 흐르는 건가 싶기도 했다.

전차 마포종점은 서부지법 자리

1950년대 마포 종점 모습.
1950년대 마포 종점 모습.

전차역 명칭으로 남아 있는 ‘마포서앞’에 섰다. 현 마포경찰서보다는 서울서부지방검찰청 쪽에서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더 많아 잽싸게 길을 건넜다. 서울서부지방검찰청 앞엔 ‘경성감옥터’였음을 알리는 안내 표지판 하나가 조촐하게 설치돼 있었다. 최남선, 한용운, 오세창 등 3.1 운동에 가담했던 이들이 이곳에서 옥고를 치렀다. 현재는 교도소 시설이 안양으로 이전했는데, 옛 경성감옥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그려볼 수 있게끔 옛 사진 등도 함께 안내표지판에 담아냈으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시작 무렵에는 으스스했는데 점점 해가 차오르고 날이 더워진다. 마포종점을 향해 부지런히 걸음으로써 제일 무더운 시간 전에 답사를 끝내고자 노력했다. 잠시 흥선대원군의 영향력을 엿볼 수 있는 공덕리 금표(孔德里禁標)를 만나기도 하였다. 흥선대원군의 기거 장소인 아소정이 근처에 있으므로 일반인의 출입을 금한다는 내용이 적힌 비석이라는데, 천하를 호령했던 대원군의 말미가 어떠했는지 아는 입장에서는 이와 같은 비석이 무슨 소용인가 싶어 보일 따름이었다.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인권, 주한미군 철수 문제 등의 논의를 위해 방한하면서 ‘귀빈로’라 이름 붙었던 마포대로 이야기와 이후 대형빌딩이 대거 들어서는 등 발전을 거듭했다는 마포 지역 이야기, 비극적인 YH 무역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걸은 끝에 이윽고 마포종점에 도달했다.

옛 구조물을 허물지 않고, 낡은 공간에 새 생명력을 불어넣는 재생이 한 때 각광 받았었다. 마포종점에 놓여 있는 전차의 현재 용도는 화장실이었다. 과연 이를 어찌 받아들이면 좋을지. 기발하다 혹은 발칙하다? 화장실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다 보니 야릇한 기분이 마구 몰려오는 듯 했다.

마포어린이공원 모형 전차 화장실 눈길

1925년도 전자노선도를 기준으로 옛 경교부터 마포종점까지 3회 차를 답사했다. 번호는 개통 순서와 답사 순서다. 다만 7차와 8차는 답사 순서가 바뀌었다.
1925년도 전자노선도를 기준으로 옛 경교부터 마포종점까지 3회 차를 답사했다. 번호는 개통 순서와 답사 순서다. 다만 7차와 8차는 답사 순서가 바뀌었다.

공식적인 마지막 장소는 마포어린이공원이었다. 예전에는 지금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는데, 공원이 조성되면서 마포종점 노래 가사가 새겨진 비석의 위치가 안쪽으로 밀린 모양새였다. 왠지 모르는 사람은 존재를 발견 못하고 그냥 지나칠 듯도 했다. 이는 나 혼자만의 노파심일지도.

​공원 바로 옆은 마포종점 나들목으로, 이를 통해 한강으로 바로 나아갈 수 있었다. 지금처럼 비행기, 자동차 등의 운송수단이 발달치 못했을 시절, 배는 매우 효율적인 운송수단이었을 것이요, 온갖 지역에서 올라온 배가 만나는 마포나루 일대는 모든 물산의 집산지로 번영을 누렸을 것이다. 마포 일대는 한강철교가 놓이면서 쇠퇴기로에 접어든다. 넓은 강폭으로 인하여 다리를 놓기 힘들었던 마포는 본의 아니게 철도 교통의 수혜로부터 소외를 겪었다. 노래 ‘마포종점’에 담긴 쓸쓸한 이미지가 왠지 이를 대변해주는 것만 같았다.

​허나 마포의 주춤거림은 잠깐에 불과했다. 오늘날 한강을 끼고 있는 뷰는 각광을 받고 있다. 이 지역의 절경은 겸재 정선을 비롯한 조선시대 화가들도 주목하였고, 이승만은 이를 누리고자 별장을 짓기도 하였다. 한낮의 뜨거운 볕을 고스란히 머리에 이고 걷거나 달리는 사람들을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도 꽉 막힌 다리 위 차량 행렬과 비교했을 때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며 서 있는 나는 실로 자유로웠다. 비록 전차는 더 이상 운행치 않고 한 때 진보의 증거인양 찬양 받던 많은 존재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나 예나 지금이나, 아니, 앞으로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 서울의 가운데를 관통하는 한강만큼은 영원할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참고문헌>
-서울지역 전차교통의 변화양상과 의미(1899~1968), 최인영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2014
-서울의 전차, 서울역사박물관, 2019
-한국전력공사 전기박물관 홈페이지
-한민족백과사전 홈페이지
-네이버 지식백과사전

[문화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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