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역사문화콘텐츠 전문 아카이브 단체인 문화지평은 2022년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공익활동지원사업으로 ‘옛 전찻길 따라 시공간을 잇는 서울 역사’를 수행했다.
도시 역사문화콘텐츠 전문 아카이브 단체인 문화지평은 2022년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공익활동지원사업으로 ‘옛 전찻길 따라 시공간을 잇는 서울 역사’를 수행했다.

[미디어파인 칼럼=옛 전찻길 따라 시공간을 잇는 서울역사] 문화지평이 지난해 ‘옛 물길‘에 이어 올해는 ’옛 전찻길‘을 따라 서울을 속속들이 톺아봤다. 그 네 번째 답사로 지난 5월 14일 전차가 부설된 남대문부터 한강교 북단까지 걸으면서 주변 역사문화, 수목생태, 산업관광 자원 등을 들여다봤다.

문화지평의 서울시 비영리민간단체 공익활동지원사업 ‘옛 전찻길 따라 시공간을 잇는 서울 역사’ 4차 답사는 전상봉 역사문화해설사가 해설을 맡았다. 전 해설사는 서울시민연대 대표와 발로품는서울협동조합 이사장으로 있다.

강남개발사를 담은 ‘강남을 읽다’ 등을 저술하고 한성백제 역사에 해박한 서울학 전문가다. 문화지평과는 2016년부터 인연을 맺고 있는 역량 있는 해설가다. 전 해설사는 이번 해설과 함께 1차 중앙선과 홍릉선, 2차 용산선 전찻길 해설을 담당했다.

전차, 국민들 생활·의식 변화 가져와

지난 5월 14일 오전 9시 회현역 3번 출구에서 시작한 답사는 전차가 지나는 대로보다는 골목 위주로 걸었다. 옛 일본인 자녀를 위해 서립된 삼판초(현 삼광초) 앞과 대통령집무실이 보이는 왜교개성지 뒤편 군인교회에서 찍은 단체사진.
지난 5월 14일 오전 9시 회현역 3번 출구에서 시작한 답사는 전차가 지나는 대로보다는 골목 위주로 걸었다. 옛 일본인 자녀를 위해 서립된 삼판초(현 삼광초) 앞과 대통령집무실이 보이는 왜교개성지 뒤편 군인교회에서 찍은 단체사진.

1차 답사기에서는 전차를 통한 대한제국시기 수도 한성의 도시개조사업 중심으로 서문을 풀었다. 2차 답사기에서는 전자가 가져온 여객과 물산의 수송 혁명을 중심이었다. 3차 답사는 일제 강점 전 대한제국기의 마지막 도시개조를 위한 경교에서부터 마포종점에 이르는 마포선이다. 4차 답사는 남대문에서 한강교 북단까지 연결한 신용산선이다.

답사로는 회현역 3번 출구-힐튼호텔-남묘터-병무청(국방부)-전생서터(영락보린원)-108하늘계단(호국신사, 숭실고, 정일학원)-이태원터(용산고)-삼광초등학교(삼판소학교)-수도여고터(경성제2고등여학교)-남영동 아케이트-성남극장-크라운제과-남영동 대공분실-캠프킴-삼각지-국방부-삼각맨숀-원불교 서울교당-조선군사령부(조선총독관저)-용산역사박물관(철도병원)으로 이어졌다.

이번 답사기에서는 전차가 가져온 생활의 변화와 사건을 들여다본다. 전차 도입 당시 의도치 않게 상여와 닮았다거나 사람을 치어 죽이는 기계라는 오명이 생겨났다. 그러나 이런 오명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편리성에 의해 서서히 사라졌다. 불가피하게 일자리를 빼앗겼던 인력거꾼들도 처음에는 불만이 높았다. 그러나 전차가 가져온 변화에 차츰 적응했다. 많은 사람들이 전차를 이용하면서 이들의 의식에는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대중교통'인 전차는 누구나 탈 수 있는 차였다. 요금을 지불하는 모든 사람들이 차를 평등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정해진 노선과 계획된 시간 속에서 시공간에 대한 감각을 새롭게 배우게 됐다. 궤도와 전선이 도시의 모습을 바꿔놓았듯, 전차로 인해 사람들은 근대 도시인으로서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고종은 근대 문물로 대한제국을 강한 나라로 바꾸고자 했지만, 가장 크게 변화한 것은 사실 사람들의 생각과 생활이었다.

전차 개통 후 시공간에 대한 사람들의 감각은 확연히 달라졌다. 사람들은 시간에 맞춰 운행하는 전차를 이용하면서 시간의 규칙성에 대해 학습했다. 또한 전차는 시간을 절약하게 해주었다. 먼 곳으로의 이동이 편리해지면서 사람들은 도성 밖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었다. 시간 절약과 이동의 자유로움으로 사람들은 늦은 밤까지 시간을 활용했다.

1900년에는 밤 10시, 1901년에는 밤 11시까지 전차를 타고 이동할 수 있었다. 시공간 감각의 변화는 사람들에게 이전 시대와는 확연히 다른 시대로 진입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낯설고 신기하기만 한 전차는 한성 시내를 달리기 시작한 이래 시민들의 일상생활에 정착되기까지 다양한 사건 사고와 에피소드를 남겼다.

시민들은 한동안 전차에 대해 배우고 적응하는 과도기를 겪어야 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여러 매체를 통해 기사화되기도 하고, 대한제국기 서울에 거주하던 외국인들의 저서에 자세히 기록되어 소개되고 있다.

개통 9일 만에 6세 아이가 전차에 지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에 사람들은 전차를 불태웠다. 겁에 질린 서양인들은 조선인들이 전차를 ‘악마의 차’로 인식한다는 기사를 냈다. 그러나 이는 당해년 가물었던 5월, 계속 뛰는 물가에 대한 분노가 근대화 사업의 표상으로 이해됐던 전차에 겨누어졌던 것이었다. 당시 기사를 현대 우리말로 고친 글이다.

‘어제 6~7세 된 남자 어린이가 포전골목 어귀에서 전차에 부딪혀 생명을 잃은지라. 그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를 단속치 않았던 것은 뉘우치지 않고 애꿎은 전차를 원망하여 도끼를 들고 전차 지붕을 맹렬하게 찍으니 거리 위의 한 무리들이 일시에 작당하여 한 차는 불사르고 한 차는 부수며 말하기를 하늘이 가문 것은 전차의 탓이라 하고 일제히 전기창을 부수러 가거늘 경사가 순점을 파견하여 그 야단하는 자를 해산케 하였다더라’

1899년 7월 22일 미국 시사주간지 ‘Collier's Weekly’에 실린 전차 관련 기사다. 낯선 문명의 이기였던 전차는 운행 초기에 인식 부족과 각종 사건 사고로 인해 ‘악마의 차’라 불리며 폭동의 대상이 됐다. 여러 대중 매체에 이러한 사건들이 연일 소개됐고 일본인 운전사와 차장이 폭동을 피해 일본으로 달아났다고 설명하고 있다.

을미사변 이후 존재했던 반일감정도 도망간 일본인 운전사로 인해 불붙었다. 그 여파로 전차는 2개월간 운행이 정지됐다. 그러나 사람들은 점차 전차의 이점들을 이해하면서 전자가 가져온 변화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1899년 6월 1일자 관보에 따르면 5월 26일에 전차가 어린아이를 치어 죽인 사고와 관련해 조정에서 구휼금을 지급하는 한편 전차 운전 시 사람들이 철길로 들어오는지 여부를 반드시 살피라는 고종의 명이 적혀있다. 또한 회사 사장의 처벌 및 농상공부 대신 민영기에 대한 견책을 시행한 내용도 담겼다.

남대문서 신용산 용산역사박물관까지 답사

1899년 7월 22일 미국 시사주간지 ‘Collier's Weekly’에 실린 전차 관련 기사. 서양인들은 조선인들이 전차를 ‘악마의 차’로 인식한다는 기사를 냈다.
1899년 7월 22일 미국 시사주간지 ‘Collier's Weekly’에 실린 전차 관련 기사. 서양인들은 조선인들이 전차를 ‘악마의 차’로 인식한다는 기사를 냈다.

이제부터 1인칭 시점 답사기다. 그야말로 서울 한복판이다. 역 밖으로 나서기가 무섭게 화려하기 짝이 없는 건물들에 압도당하고야 말았다. 이보다 더 휘황찬란한 곳을 서울 안에서도 찾기가 쉽지 않으리라. 언제부터 이런 모습이었을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도 같은 분위기를 엿보는 게 가능할까. 높은 건물이라고는 좀체 찾기 힘들었을 시절에도 왠지 여느 곳보다 문명의 수혜를 한껏 누리고 있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 필히 그랬을 것이다. 적어도 100년가량 전에는 그랬지 싶다. 현재의 많은 지하철 노선이 따르고 있는 옛 전차의 흔적이 이곳에도 깃들어 있으니 필히 그랬을 듯하다.

얼마 전 걸은 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남대문에서부터 신용산에 이르는 길. 출발 지점은 회현역이었다. 목조건물이 다수인 우리나라의 특성상 화재에 취약할 수밖에 없어 이른바 ‘소개 공지’를 두어 불이 옮겨 붙는 걸 방지했던 것이 오늘날 퇴계로의 시작이라는 것에서부터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한 때 광희로로도 불렸다가 다시금 퇴계로란 이름을 되찾은 곳에서 출발한 답사팀은 점점 더 도시의 화려함에 빠져들고야 말았다. 걸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등장한 힐튼호텔은 양팔을 주욱 뻗어 세상을 감싸 안은 듯 위풍당당함을 뽐내고 있었는데, 그 역사까지도 아름답지는 않았다.

사창가 일제 정비의 일환으로 지어져 오랜 기간 손님을 맞이했을 호텔은 지난해 말 부순다, 다시 짓는다 의견이 분분하였으니, 전쟁 당시 불탔으며, 이후 새로 지은 것마저 헐리고 현재는 터로서만 남은 남묘와 어딘가 모르게 닮은꼴을 하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살짝 들기도 했다. 아마도 이 호텔의 운명이 무엇인지는 머지않아 확인이 가능할 듯. 바로 옆 CJ사옥이 다음은 내 차례냐며 떨고 있지는 않을지. 이 일대에 자리 잡았다가 사라진 이름들이 이겨내지 못한 나쁜 기운(?)을 상상하며 후암동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후암로. 두텁바위 혹은 두껍바위가 있어 이와 같은 도로명이 붙었다곤 하나 바위가 어디에 어떤 모양으로 놓여 있었는지를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현실적으로는 미군 기지가 있었던 게 원인일 터이나, 왠지 1, 4호선 철로가 짧지 않은 구간을 나란히 달리게 된 원인이 바위가 아닐까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언덕을 선호한다는 일본인들이 문화주택을 짓고 대거 일대에 거주했던 걸 보면 그리고 삼판정. 즉 세 개의 언덕이라는 지명이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바위까지는 아니어도 굴곡 있는 지형이 존재했던 것만은 분명하지 싶었다. (영락보린원 앞에 놓인 ‘전생서 터’라는 표지석 역시 소와 돼지우리가 있던 너른 산자락 즈음을 연상시킨다. 전생서는 1894년 갑오경장 때 폐쇄된 관청으로, 조선왕실 제사에 쓸 가축을 기르는 일을 담당했다.

전차 노선을 고스란히 좇았다면 큰길을 내리 따라 걸어야 했으나 이날은 굴곡진 언덕을 오르내리고, 주택과 주택 사이의 비좁은 길을 통과했다. 많은 게 부스러져 몇 안 남은 흔적에 기대어 상상력을 발휘해야만 하는 큰길가에 비해 뒷골목엔 아는 사람만이 보고 듣고 즐길 수 있는 이야기들이 깃들어 있었다.

실로 많은 것이 사라진 모습을 접해 와서 그럴까. 으레 그래야만 한다는 식의 그릇된 사고가 아쉬움의 감정이 작동하는 걸 억누르는 건지 역설적이게도 훼손됐거나 멸실된 무언가를 만나면 마음이 놓인다. 현재의 모습으로부터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는 곳에 서서 병무청 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일제 강점기엔 일본인들의 배를 불렸던 양조장이 있었고, 한 때 국방부가 있었으나 이내 병무청이 들어섰으며, 병무청마저 대전으로 이전하고 난 후로는 국방부 청사가 들어섰다는 이야기는 얼마 전까지도 드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었던 주한미군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켰다. 전쟁 아닌 평화를 이제는 그려야 할 때 같다고, 그 시작이 용산이었으면 좋겠다고. 새로이 취임한 대통령이 추구(?)한 ‘용산시대’가 이러한 바람에 얼마나 부응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이어 만난 영락보린원과 경성호국신사에 오르는 길은 이날 답사에서 가장 인상 깊었다. “일본놈”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뒤틀린 역사는 일본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우리로 하여금 뼛속까지 지니도록 만들었다. 영락보린원은 양화진에 묻힌 단 1명의 일본인이라는 소다 가이치와 관련 있는 장소였다.

대만에서 거의 죽을 뻔한 자신을 살려준 조선인의 은혜에 감복했던 걸까. 그는 서울역 앞 고아들을 거두어 보듬었으니, 그 수가 1000여 명에 달했다. 일본인이었음에도 그가 ‘한국 고아들의 아버지’로 불릴 수 있었던 이유다. 그는 이상재 등과도 깊이 교류하였으니, 일제강점기의 냉혹함이 모든 일본인들의 마음까지 차갑게 만들었던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남영아케이드·삼광초 등 일제 흔적 많이 남아

전차 폭동 사건과 관련해 ‘Sunday Examiner Magazine’에 실렸던 기사다. 조선인들이 전차에 대해 이해를 못하고, 전선이나 전주가 가뭄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생각하며 이들을 파괴한 전차 폭동 사건에 대해 적고 있다.
전차 폭동 사건과 관련해 ‘Sunday Examiner Magazine’에 실렸던 기사다. 조선인들이 전차에 대해 이해를 못하고, 전선이나 전주가 가뭄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생각하며 이들을 파괴한 전차 폭동 사건에 대해 적고 있다.

108하늘계단은 후암동에서 해방촌으로 넘어가는 길에 놓인 계단으로, 그 끝에는 일본 제국 일본군 전몰자를 기렸던 신사인 경성호국신사가 있었다고 했다. 해방 후 이 자리엔 숭실고가 자리 잡았다가 숭실고가 은평구로 이전한 후로는 정일학원과 센테니얼크리스찬스쿨이 잇따라 들어섰고, 현재는 미네르바스쿨이 있다고 들었다. 그야말로 교육의 기운이 넘쳐흐르는 부지라도 되는 듯.

계단의 경우, 철거를 하네 마네 옥신각신하였으나 보존 쪽으로 결말이 났던지 지금은 나름 관리가 잘 되고 있었다. 계단 한가운데 놓인 엘리베이터 형 에스컬레이터는 주민들의 이동 편의를 위해 설치됐을 텐데, 그 자체가 계단 일대의 이색 분위기 연출에 한 몫 톡톡히 하고 있었다.

좁은 골목에서 벗어나자 이태원 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과 만났다. 숭례문 남쪽엔 이태원, 돈의문 서쪽엔 홍제원, 동대문과 광희문 쪽에는 각각 보제원과 전관원이 위치했다. 원은 오늘날로 치자면 여관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바로 옆으로는 용산 고등학교가 있다.

이 학교의 역사는 무려 1917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설립 당시에는 일본인을 위한 교육 기관이었음을 감안해서인지 학교 측은 제 역사를 해방 뒤부터 소개한다 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제 초창기 발자취가 오히려 먹칠을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이는 비슷한 역사를 지닌 서울 고등학교도 마찬가지. 허나 철조망이 우거진 미군지기 일대는 하늘에 기우제를 지냈던 남단 자리와 가깝다, 아니다, 일본군 야포병연대의 군마(軍馬) 위령비 부속물, 즉 마혼비가 발견된 이상 남단이라 칭할 수 없다 등 의견이 분분한 것으로 보아 이 지역으로부터 일본의 영향력을 완전히 제거하기란 힘이 들어 보였다.

얼핏 보아도 우리나라의 전통 가옥과는 확연히 다른 일본식 가옥을 몇 채 지나 삼광초등학교 앞에 이르렀다. 1919년 개교했다는 이 학교 옆쪽으로는 현재는 대방동 쪽으로 이전했다는 수도여자 고등학교 부지가 서울시 교육청을 맞이할 준비를 한창 진행 중이었다. 참고로 수도여고의 옛 교명은 경성제이고등공립학교이며, 경성제일고등공립학교는 경기여고이다.

시간 여행은 계속됐다. 1930년대 시장의 원형을 엿볼 수 있었던 남영아케이드를 통과했다. 규모는 작았지만 마냥 퇴색되진 않았다. 젊은층들이 좋아할 법한 분위기의 가게들이 하나둘 들어선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2003년경 문을 닫았다는 성남극장이 위치했던 건물과 왠지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남영동 대공분실(현 민주인권기념관)도 지나쳤다.

어떠한 모습으로 대중에게 공개될지 의문을 자아내는 조선육군창고 또한 밖에서 까치발을 하고는 바라볼 수 있었다. 이름에서부터가 시간을 제대로 머금었음을 확인 가능한 삼각맨숀 또한 등장했는데, 추진 중이라는 재건축이 대통령이 용산에 집무실을 꾸리게 됨에 따라 어떠한 영향을 받게 될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앞날을 예측하는 목소리는 수시로 호재와 악재를 언급하고 있으니 어느 쪽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 건지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는 방향으로 대화는 흘러갔다.

국방부 군인 교회서 대통령집무실 조망

1925년도 전자노선도를 기준으로 남대문부터 용산철도박물관까지 신용산선 4회 차를 답사했다. 번호는 개통 순서와 답사 순서다. 7차와 8차는 사정 상 답사 순서가 바뀌었다.
1925년도 전자노선도를 기준으로 남대문부터 용산철도박물관까지 신용산선 4회 차를 답사했다. 번호는 개통 순서와 답사 순서다. 7차와 8차는 사정 상 답사 순서가 바뀌었다.

원불교에서부터 시작하여 불교, 기독교, 천주교 등 다양한 종교의 은혜를 입기도 했다. 여러 종교가 한데 어우러져 있는 것부터가 독특했는데, 특히 국방부 교회는 고색창연한 색하며 왜군의 투구를 본 따 만든 것 마냥 요상한 모양새를 자랑하고 있어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보고 또 보아도 어떤 의미에서 그와 같이 만들었는지 짐작이 쉽지가 않았다. 바로 옆은 국방부로 얼마 전 취임한 신임 대통령이 아마도 이곳에서 집무를 보지 싶었다. 세상을 주관하는 모든 신이 보우하시니 실로 안전하려나. 신끼리 서로 싸우느라 바빠 대통령 보호는 안중에도 없을 수 있다는 불온한 생각과 씨름하며 가파른 계단을 따라 내려왔다.

남만주철도회사가 사용했다는 건물(지도에는 ‘간조’라고 적혀 있던데, 예전에는 월급날을 '간조날'이라고 칭했다는 걸로 보아 철도 놓는 작업을 감독하고 인부들의 임금 주는 일 등을 이 곳에서 행했던 것 같다. ‘간조날인데 분빠이 해서 한 잔 빨자?’ 같은 표현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얼마든지 짐작 가능한 대목)을 지나 용산역사박물관에서 답사를 마무리 지었다.

박물관은 사라진 철도병원의 흔적까지 끌어안으며 과거와의 공존을 택했다. 옥상에서 오르자 용산의 이모저모가 한 눈에 들어왔다. 지금도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는 모습이 ‘용산시대는 현재 진행형’이라 외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참고문헌>
-서울지역 전차교통의 변화양상과 의미(1899~1968), 최인영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2014
-서울의 전차, 서울역사박물관, 2019
-한국전력공사 전기박물관 홈페이지
-한민족백과사전 홈페이지
-네이버 지식백과사전

[문화지평]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도시역사문화 콘텐츠연구·답사‧아카이브 전문단체)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2016), 역사도시 서울답사(2017), 서울 구석구석 톺아보기(2018),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2019), 서울미래유산 시장 관광자원화 아카이빙(2019), 서울 첫 종교건축물과 주변 근대 건축물 답사‧아카이빙(2020), 물길 따라 점·선·면으로 잇는 서울 역사(2021), 김중업과 김수근, 현대건축 1세대 궤적을 쫓아서(2021), 옛 전찻길 따라 시공간을 잇는 서울 역사(2022), 알고 보면 더 흥미로운 근대건축 테마답사(2022), 조선왕릉 40기 프롬나드(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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