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역사문화콘텐츠 전문 아카이브 단체인 문화지평은 2022년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공익활동지원사업으로 ‘옛 전찻길 따라 시공간을 잇는 서울 역사’를 수행했다.
도시 역사문화콘텐츠 전문 아카이브 단체인 문화지평은 2022년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공익활동지원사업으로 ‘옛 전찻길 따라 시공간을 잇는 서울 역사’를 수행했다.

[미디어파인 칼럼=옛 전찻길 따라 시공간을 잇는 서울역사] 문화지평이 지난해 ‘옛 물길‘에 이어 올해는 ’옛 전찻길‘을 따라 서울을 속속들이 톺아보고 있다. 그 첫 번째 답사로 지난 4월 9일 최초로 전차가 부설된 서대문부터 청량리까지 무려 7시간(점심시간 30분 포함)을 걸으면서 주변 역사문화, 수목생태, 산업관광 자원 등을 들여다봤다.

문화지평의 서울시 비영리민간단체 공익활동지원사업 ‘옛 전찻길 따라 시공간을 잇는 서울 역사’ 1차 답사는 전상봉 역사문화해설사가 해설을 맡았다. 전 해설사는 서울시민연대 대표와 발로품는서울협동조합 이사장으로 있다. 강남개발사를 담은 ‘강남을 읽다’ 등을 저술하고 한성백제 역사에 해박한 서울학 전문가다. 문화지평과는 2016년부터 인연을 맺고 있는 역량 있는 해설가다. 전 해설사는 이번 해설과 함께 2차 구용산선과 4차 신용산성 전찻길 해설을 담당했다.

전차 첫 노선 계약서와 달라진 이유는?

지난 4월 9일 오전 9시 경인선 서대문정거장 표석이 있는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 정문, 서울역사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는 실물 전차, 아파트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청량리에서 각각 찍은 1차 답사 단체사진 장면. 7시간의 끝장답사인 관계로 인원이 조금씩 줄어들어가는 모습을 알 수 있다.
지난 4월 9일 오전 9시 경인선 서대문정거장 표석이 있는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 정문, 서울역사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는 실물 전차, 아파트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청량리에서 각각 찍은 1차 답사 단체사진 장면. 7시간의 끝장답사인 관계로 인원이 조금씩 줄어들어가는 모습을 알 수 있다.

대한제국시기 수도 한성의 도시개조사업은 경운궁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이 사업에서 중요하게 고려한 대상은 경운궁과 인접한 각국 공사관, 청량리에 있는 명성황후의 홍릉, 그리고 대한제국을 선포한 원구단 등이었다. 1897년 6월부터 서대문 안과 정동 부근 도로, 남대문 안 도로가 새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원구단과 황궁우, 독립문과 탑골공원 등도 건립됐다.

같은 해 10월 대한제국이 선포된 후 명성황후의 국장이 행해지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899년 홍릉이 있는 청량리까지 첫 전차가 운행을 시작했다. 전차는 한성부의 전기, 전차, 전화사업의 특허권을 허가받은 한성전기주식회사(1904년 한미전기로 개칭)가 대한제국이 선포된 다음 해인 1898년 설립되면서 시작한 사업이었다.

한성전기회사는 1898년 1월 18일 이근배, 김두승이 한성 구내에 전차, 전등, 전화 설비 시설 및 운영권을 농상공부(農商工部)에 신청해 26일 인가받은 회사로 전차 부설은 다음 달인 2월 1일 사장 이채연과 콜부란 간의 전차 건설계약을 통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계약서에 따르면 전차가 부설될 노선은 ‘남대문으로부터 주요 도로를 경유, 동대문을 통과하여 홍릉’에 이르는 것이었다. 즉 처음 계획된 전차 개통노선은 조선시대 한성부 동서 중심축인 동대문과 서대문을 잇는 종로 대로에 남대문을 연결해 부설하는 것이었다. 또 동대문 동쪽으로는 홍릉까지를 노선으로 했다.

그러나 전차노선은 처음 계획과 달리 남대문~홍릉 간이 아닌 서대문~홍릉 간으로 바뀌었다. 이유는 경인철도 종착역인 경성역(이후 서대문정거장)과의 연결 때문이었다. 경인철도 남대문정거장은 남대문을 통해 도성으로 연결되고 서대문정거장은 서대문을 통해 도성으로 진입할 수 있는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 중 경인철도의 종착역인 서대문정거장은 대한제국의 중심지였던 경운궁과 외국인거류지였던 정동 일대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는 지리적 이점이 있었다. 당시 정동 일대에는 각국 공사관과 영사관이 밀집한 지역으로 다수의 외국인이 거주했다. 그 주변으로는 이들을 대상으로 물건을 파는 상점들이 들어섰다. 대부분의 상점들은 주로 대안문(대한문) 앞이나 서대문정거장 주변에 몰려있었기 때문에 성벽을 사이에 둔 서대문정거장은 여객뿐 아니라 화물 운송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대안문 남쪽에 위치한 프랑스 계열의 대창양행은 우유, 의약품 등을 비롯한 각종 물품을 수입판매 했는데, 1905년에는 새롭게 안남미를 들여와 팔기 위해 서대문 밖 경인철도 정거장 건너편에 큰 창고를 지어 수송에 편리함을 더했다.

이처럼 서대문정거장의 역할이 부각되는 상황 속에 전차의 노선도 남대문이 아닌 서대문으로 바뀌었으며 서대문정거장과의 연결을 위해 서대문 밖으로 전차 ‘서대문선’이 부설됐다. 따라서 인천에 도착한 외국 수입품들은 경인철도를 통해 서대문정거장까지 운송된 후, 정동 일대에 위치한 외국계 회사까지 서대문을 통하는 전차궤도를 이용해 운송한 것으로 보인다.

서대문정거장과 전차와의 연결은 새로 신설된 기차역과 전차를 통한 물자수송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이동까지 원활하게 해주었다. 이에 따라 전차의 첫 노선은 남대문에서 홍릉 간 운행 계획에서 경인철도 정거장인 서대문정거장과의 연결을 위해 서대문에서 홍릉으로 변경됐던 것이다.

1899년 5월20일 역사적인 첫 운행 개시

1899년 5월 4일 동대문발전소에서 열린 전차 개통식 장면. 실제 운행은 5월 20일부터 경교에서 청량리를 단선으로 오갔다.(사진=서울역사박물관)
1899년 5월 4일 동대문발전소에서 열린 전차 개통식 장면. 실제 운행은 5월 20일부터 경교에서 청량리를 단선으로 오갔다.(사진=서울역사박물관)

전차는 시범운행을 거쳐 5월 20일부터 본격적으로 운행을 시작했다. 이때 노선은 경교(京橋)에서 청량리까지였다. 서대문에서 동대문까지를 ‘중앙선’이라 했으며 동대문에서 청량리까지는 ‘홍릉선’ 또는 ‘청량리선’이라고 했다.

이 중 홍릉선은 고종의 능행을 위해 부설되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고종은 명성황후가 묻힌 홍릉으로 자주 행차했고 그때마다 많은 경비가 들었다. 미국인 콜부란 등이 전차를 가설하면 행차가 편리하고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고 건의했다. 또 일반 백성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추천했고 고종이 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전차는 ‘서대문~종로~동대문~청량리’를 연결하는 8.1km 구간에 단선으로 부설됐다. 차량은 처음에는 황실용 귀빈차 1대와 승객 정원 40명의 개방차 8대가 마련됐다. 고종 능행이 없는 날에만 일반 승객용 전차를 운행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고종은 능행 시 주로 마차를 이용했다. 경성전기 전무취체역 무샤(武者鍊三)는 고종이 능행을 위해 전차를 부설했지만 평소에는 전차를 사용하지 않아 귀빈차가 꽤 노후해졌다 했다. 그는 고종이 단 한번 전차를 이용해 능행했다고 아쉬워했다.

서대문서 청량리까지 전찻길 따라 답사

1908년 무렵 경인선 서대문정거장 전경. 전차 중앙선과 연결되면서 도성 내 물자운반에 획기적 전기를 마련했다.
1908년 무렵 경인선 서대문정거장 전경. 전차 중앙선과 연결되면서 도성 내 물자운반에 획기적 전기를 마련했다.(사진=서울역사박물관)

답사 시작점은 이화여자외고 정문 옆에 설치된 ‘서대문정거장’ 표석이다. 이 일대는 과거 경인선 개통 당시의 시종착역인 서대문정거장이 있던 곳이다. 대한제국 말기 근대문물의 수입에 따라 도성 안팎을 연결시키기 위해 새로운 도로와 철로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1899년(광무 3) 9월 18일 우리나라 최초 철도인 경인선이 노량진에서 제물포까지 개통됐다. 경인선은 일본의 경인철도합자회사가 인천과 노량진 사이에 부설한 총 33.2㎞의 철도다.

경인선이 개통됐지만 한강 바로 앞 노량진에서 끊겨 한성까지 연결되지 못했다. 1900년 7월 한강철교가 준공되고 철도가 서대문까지 연장되면서 서울 최초의 철도역인 서대문정거장이 들어섰다. 경인선 개통식은 11월 12일 ‘경성정거장’이라고도 불리던 서대문정거장에서 거행됐다. 당시 서대문 부근과 정동에 사는 외국인을 위해 설치한 역이었다.

그러나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그 위치가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돼 남대문 밖에 새로운 역사를 지었다. 역사는 33㎡짜리 단층 목조건물이었다. 이를 염천교 아래 논 가운데에 지어놓고 남대문정거장이라 했다. 남대문정거장 구내에는 경부철도회사 사무소와 기관차 차고가 자리 잡았다.

경인선 개통식에 이어 경의선 기공식(1902) 및 준공식(1906), 경부선 준공식(1905) 모두 남대문정거장에서 치러졌다. 조선총독부 철도국은 1910년대 초 남대문정거장을 서양식 벽돌조 2층으로 개축했다. 이를 10월 1일부터 경성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해방 후 서울역으로 이름을 바꿔 사용하다가 2011년부터 ‘문화역서울284’란 복합문화공간이 됐다. 284는 건축물의 사적번호다.

서대문정거장은 경인철도의 시발역인 동시에 전차 홍릉선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철도와 전차 두 교통 역사에 의미가 있는 공간이다. 전차는 서대문정거장-서울고앞-종로-종로2-종로3-종로4-종로5-동대문-숭인동-신설동-안암동-성동역앞-청량리를 정거장으로 두고 달렸다. 시대에 따라 교통수요에 따라 정거장이 늘었다 줄었다 하는 게 전차의 특징이다.

다양하고 촘촘한 역사문화자원 답사

1925년도 전자노선도를 기준으로 답사했다. 번호는 개통 순서와 답사 순서다. 다만 7차와 8차는 답사 순서가 바뀌었다.
1925년도 전자노선도를 기준으로 답사했다. 번호는 개통 순서와 답사 순서다. 다만 7차와 8차는 답사 순서가 바뀌었다.

이번 답사는 정거장을 기반으로 서대문(서대문정거장역, 전차정거장)-경교(경교장)-동양극장(김종서집터)-서울역사박물관(전차, 서울고터)-원각사터(새문안교회)-야주개-광화문네거리-일민미술관-전옥서터-화신백화점터-한성전기터(종로경찰서)-YMCA-피맛길-탑골공원-파고다극장-피카디리-단성사-두산기업발상지-광장시장-신진시장(가산)-메리어트호텔(발전소, 전차차고지, 버스터미널터)-동대문(경성전차 협궤)-박수근 화백 집터-동대문아파트-백남준 집터-동묘-선농단-성동역터(제기동미도파)-경동시장-청량리역을 설명하면서 진행했다.

역사자원이 촘촘하고 거리가 길어서 7시간 끝장답사로 진행했다. 다수의 참가시민들이 끝까지 함께하는 열정을 보였고 해설사 역시 혼신을 다했다. 돈의문박물관마을에는 전차모형이, 서울역사박물관 야외전시장에는 실제로 기동했던 전차가 전시돼 있어서 이번 답사의 이해를 높였다.

야외전시장에 있는 전차 381호는 등록문화재 제467호로 지정된 문화재다. 이 전차는 1930년대에 제작돼 전차가 폐선되는 1968년 11월까지 약 38년간 서울 시민의 발이 돼 시내를 누 볐다.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전차 두 대 중 하나로 다른 하나인 전차 363호는 국립서울과학관에 있다.

당시 종로통에는 전차사업 주체인 한성전기가 있었고 동대문 현 메리어트 호텔 자리에는 전차 동력원인 전기를 만드는 발전소가 위치하는 등 전차 노선 주변에 주요 시설들이 들어서 있었다. 처음 전차를 운행할 때는 오픈카 형태의 상등칸, 하등칸으로 구분돼 있었다. 상등칸에는 문과 창문이 있었고 하등칸은 지붕만 있어서 비바람이 들이치는 날엔 우산을 써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풍습 상 쓰개치마를 쓰고 다니던 여인네들을 위해 전차 중앙에 박스형으로 부인석을 만들었다. 이런 저런 전차 풍속에 대한 해설사의 설명이 이어지면서 어느새 1차 전차답사는 청량리에 다다랐다.

<참고문헌>
-서울지역 전차교통의 변화양상과 의미(1899~1968), 최인영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2014
-서울의 전차, 서울역사박물관, 2019
-서울 중구청 홈페이지

[문화지평]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도시역사문화 콘텐츠연구·답사‧아카이브 전문단체)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2016), 역사도시 서울답사(2017), 서울 구석구석 톺아보기(2018),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2019), 서울미래유산 시장 관광자원화 아카이빙(2019), 서울 첫 종교건축물과 주변 근대 건축물 답사‧아카이빙(2020), 물길 따라 점·선·면으로 잇는 서울 역사(2021), 김중업과 김수근, 현대건축 1세대 궤적을 쫓아서(2021), 옛 전찻길 따라 시공간을 잇는 서울 역사(2022), 알고 보면 더 흥미로운 근대건축 테마답사(2022), 조선왕릉 40기 프롬나드(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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