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역사문화콘텐츠 전문 아카이브 단체인 문화지평은 2022년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공익활동지원사업으로 ‘옛 전찻길 따라 시공간을 잇는 서울 역사’를 수행했다.
도시 역사문화콘텐츠 전문 아카이브 단체인 문화지평은 2022년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공익활동지원사업으로 ‘옛 전찻길 따라 시공간을 잇는 서울 역사’를 수행했다.

[미디어파인 칼럼=옛 전찻길 따라 시공간을 잇는 서울역사] 문화지평이 지난해 ‘옛 물길‘에 이어 올해는 ’옛 전찻길‘을 따라 서울을 속속들이 톺아보고 있다. 그 다섯 번째 답사로 지난 5월 28일 황금정(을지로)선과 왕십리선을 따라 남대문에서 왕십리역까지 걸으면서 주변 역사문화, 수목생태, 산업관광 자원 등을 들여다봤다.

문화지평의 서울시 비영리민간단체 공익활동지원사업 ‘옛 전찻길 따라 시공간을 잇는 서울 역사’ 5차 답사는 김태휘 역사문화해설사가 해설을 맡았다. 김 해설사는 창덕궁‧의릉 궁궐길라잡이, 한양도성 시민순성관으로 있으면서 역사와 건축, 조경생태 분야 전문가다.

문화유산아카데미, 전국역사지도사모임 대표이며, 조선 왕릉과 골목길 해설 등으로 관심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표석시리즈로 ‘표석을 따라 한성을 거닐다’, ‘표석을 따라 경성을 거닐다’, ‘표석을 따라 제국에서 민국으로 걷다’, ‘표석을 따라 서울을 걷다’를 공저로 출간했다. 김 해설사는 이번 해설과 함께 8차 돈암동선 전찻길 해설을 담당했다.

전차 도입 역사와 일상의 변화

황금정선 출발지인 남대문 밖에서 단체 사진을 찍는 모습.
황금정선 출발지인 남대문 밖에서 단체 사진을 찍는 모습.

세계 도시교통사는 마차에서 전차, 자동차, 지하철·고속도로의 시대로 발전해 왔다. 17세기런던에서 중산층의 교통수단으로 마차가 도입된 후, 19세기 전기의 보급은 전차를 도시교통의 새로운 수단으로 등장시켰다.

전차교통은 20세기 초반에 최대 호황기를 누리면서 질적, 양적으로 크게 성장했다. 하지만 1920~30년대 자동차가 보급되면서 전차는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고, 런던과 파리 등의 대도시에서는 전차로 감당할 수 없는 교통수요를 해결하기 위해 지하철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전차는 1899년 운행을 시작한 후, 1968년까지 70년 동안 ‘시민의 발’이었다. 도로 위를 달리는 전차는 서울이 확장될수록 노선의 신설과 복선화를 통해 운행 범위를 넓혀나갔다. 사람들은 전차를 타고 도성 안팎을 왕래했다. 전차로 한강까지도 건널 수 있게 됐다.

전차 노선이 신설되고 연장될수록 사람들의 이동 범위도 자연히 넓어졌고, 서울의 행정구역도 확장됐다. 서울의 전찻길을 따라가 보면 서울의 변화상을 살펴볼 수 있다. 전차가 개통된 1899년은 대한제국이 선포된 지 2년이 되는 해였다. 당시 경운궁을 중심으로 도로망이 정비되고, 간선도로를 따라 전차의 도입이 계획됐다.

우리나라에 전기가 처음 도입된 것은 1885년 경복궁 중기기관에 의한 전등설비가 들어오면서 시작됐다. 차가 처음 등장하게 된 것은 고종황제가 출자해 설립한 한성전기회사가 전차와 전등 및 전화사업의 허가를 받아 먼저 전차사업을 추진하면서부터이다. 당시 전차부설은 교토 전철의 설계자인 마키 헤이이치로(眞平一郞)가 맡았다.

전차는 1898년 한성전기 회사가 설립된 후 본격적으로 건설됐다. 전차의 궤도는 경교(京橋)에서 청량리까지 8.1km 구간에서 부설되었고, 황실용 귀빈차 1대와 개방차 8대가 준비됐다. 부산은 1915년에는 부산진~초량간, 초량부산우편국간, 부산진~동래 온천장간 등 운행이 시작됐다.

전차는 상등(上等) 칸과 하등(下等) 칸으로 구분됐다. 이에 따라 당시의 전차는 ‘반개방차’로 불렸다. 조선의 풍속은 부인들이 쓰개치마를 쓰고 외출했기 때문에 별도로 전차 중앙에 상등 칸인 상자형을 설치해 부인석으로 했다. 전차의 상등 칸에는 문과 창문이 있어 승객들이 비바람을 피할 수 있었지만, 하등 칸은 지붕만 덮여 있는 개방형이었기 때문에 비가 오면 우산을 받쳐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한겨울이 되면 북한산 찬바람에 살을 에는 추위를 감내해야 했다.

전차의 운행시간은 오전 8시부터 저녁 6시까지였다. 당시 정류장이 없었기 때문에 골목어귀 길가에서 승객이 손을 들면 전차가 멈추었다. 더구나 전차가 저속으로 운행하다보니, 운행 도중 승객이 타고 내리는 경우도 많아 사고가 빈번히 일어났다. 그럼에도 ‘스스로’ 움직이는 신기한 전차를 타려는 사람들은 많았다.

또 가까스로 전차에 오르더라도 내리지 않아 전차 안은 늘 북적였다. 이를 통해 운행 초기의 전차는 교통기관의 역할보다는 신문물의 도입과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전차 노선은 종로의 보신각에서 도성의 관문인 남대문을 지나 용산으로 향했다. 당시 용산은 1884년에 개시장(開市場)으로 지정되어 외국인의 출입이 빈번했을 뿐만 아니라, 1900년 무렵에는 공장지대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동이 빈번한 지역이었다.

또한 농·수산물의 집산지였던 마포로는 대한제국기 전차의 마지막 궤도가 건설됐다. 이때까지 한성은 중세 성곽도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전차의 운행으로 성문을 열고 닫던 전통적인 방식은 사라졌지만, 전차는 여전히 성문을 통해 도성 안과 밖을 왕래했다.

1910~20년대 노선의 신설과 변화

전차 개통 1년 뒤 들여 온 일반용전차.[사진=한국전력공사 전기박물관]
전차 개통 1년 뒤 들여 온 일반용전차.[사진=한국전력공사 전기박물관]

도성의 동서 대로인 종로를 지나 동대문 밖 청량리에 도착한 전차는 다시 남대문 밖 용산과 서대문 밖의 마포에 이르렀다. 하지만 1907년 성곽이 훼철되면서 전차는 더 이상 성문으로 다닐 수 없었다. 성곽이 철거된 자리에는 도로가 생겼고 전차 궤도도 신작로를 따라 이설되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전차 교통은 장래의 도시 확장에 유망한 사업으로 평가되면서 기존의 단선 궤도가 모두 복선화됐다. 전차노선도 도심을 중심으로 빠르게 신설됐다.

대한제국기 전차사업은 한성전기회사와 한미전기(주)로 이어지면서 진행되었지만 일본인 경

영의 일한와사주식회사가 이 사업을 인수하면서 궤도의 부설도 활발히 진행됐다. 우선 신설된 노선은 신용산선이었다. 러일전쟁 중이던 1904년 일본군의 군용지가 된 용산 일대에는 1908년 한국주차군사령부를 비롯한 군사기지와 철도시설물 및 관사가 들어섰고, 군용지 중에서 일부가 택지로 전환되면서 일본인 마을이 들어섰다.

이에 따라 1910년에는 용산선의 후루이치초(古市町, 현 동자동)에서 분기하여 신용산까지 전차 궤도가 부설됐다. 또한 1912년 경성시구개수사업이 진행되면서 신설된 도로와 직선화된 도로 위에도 전차궤도가 놓였다. 대한제국기 전차노선이 종로를 중심으로 도성 밖으로 연결됐다면 1910년대에는 직선화된 황금정통을 중심으로 하는 황금정통선이 개통됐다.

이에 따라 당시의 전차노선은 종로와 황금정통을 중심으로 분산됐다. 이는 기존에 종로 중심의 전차 운행이 황금정통으로 이원화되면서 청계천 이남에 전차노선이 신설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시기 유일한 전차의 남북노선은 본정과 총독부의원(창경원)을 연결한 것이었다. 이러한 전차노선은 1915년 경복궁 에서 개최되는 조선물산공진회를 앞두고 마무리됐다.

무더위 뚫고 황금정선+왕십리선 끝장 답사

사고를 막기 위해 방범구를 설치한 전차.[사진=한국전력공사 전기박물관]
사고를 막기 위해 방범구를 설치한 전차.[사진=한국전력공사 전기박물관]

전역이 후끈 달아오르기에 딱인 시간대, 서울 한복판은 혼잡했다. 깃발을 들고 어디론가 행진 중이던 화물연대 노조 분들의 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아찔했다. 더위에 외치는 구호가 녹아내리지는 않기를. 잠시나마 숭례문 아래로 몸을 피했다. 오가는 바람에 약간이나마 숨통이 트였다. 갈 길이 멀다. 이곳에서부터 왕십리역까지 과연 난 완주할 수 있을까. 얼핏 헤아려도 거리가 상당하다. 감기로 요 며칠 피곤했던 통에 무리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왕십리역까지는 가지 못하고 신당역에서 멈추어 섰다. 내겐 최선이었다.

숭례문에서 출발해 황금정선과 왕십리선을 연달아 걷는 코스였다. 시속 20km도 못 달리는 전차를 타면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지. 그냥 걸어도 꽤 시간이 필요할 테지만 주요 지점마다 멈추어서 설명을 귀담아 들어야 했으니 빠르게 걷기란 힘들었다. “빨리빨리”로 유명한 우리라 하여도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도 지금처럼 잽싸지는 않았을 것이다. 쉽진 않았으나 너그러움을 발휘해가며 걸음을 옮겼다.

전차의 직접적인 흔적은 거의 안 남아 있다 보아도 무방했다. 출발 지점인 숭례문만 하여도 전차가 이를 관통하였다 하였으나 오늘날의 모습에서 전차를 떠올리는 이는 거의 없지 싶었다. 숭례문을 통과한 전차는 각기 직진(용산선) 혹은 우회전(의주선)하여 제 갈 길을 갔다. 오늘날 도로가 산을 평지로 만들 듯 전차 또한 달리기 위해서는 지각 변동을 필요로 했다. 그렇게 사라졌다는 남지의 모습을 애써 머릿속에 그려 보려 들었지만 쉽지가 않았다. 이날 걸은 것과 방향이 달라 직접 들르지는 못하였으나 칠패시장 터, 예빈시 터, 전환국 터, 선혜청 터 등 주변의 많은 것들이 표지석으로만 남아 있다는 이야기 또한 접했다. 참으로 풍성한 이야기가 이 일대에 깃들어 있다는 걸 오로지 말로만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속도가 느린 만큼 역은 다닥다닥 붙어 있는 형국이었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 다음 역이 있었을 법한 장소라는 설명에 놀라기를 반복했다. 가장 먼저 멈추어선 것은 남대문로 지하쇼핑센터 8 출입구 앞에서였다. 상진 집터. 황희에 버금가는 명재상이었다는 상진이라는 인물의 집이 있던 곳이라는데,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듣자하니 한동안 소란스러웠던 상문고등학교 관계자가 이 인물의 직계 후손이라고 했다.

현재는 맞은편에 상동교회가 버젓이 들어서 있으나, 한 때 이곳에는 새로나백화점이 있었다고 했다. 백화점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지만 이에 얽힌 경험이 없는 나에게는 잘 와 닿지가 않았다. 이야기마저 듣지 않은 이들에게는 더더욱 뜬구름 잡는 것처럼 여겨지리라. 참고로, 상동교회는 헤이그밀사의 주역 중 한 명인 이준 열사가 활동을 했던 곳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며, 스크랜튼 여사의 아들이 한 때 목회활동을 했다는 말도 있다. 물론 현재의 건물은 1970년대에 다시 지은 것으로 역사 속 인물들의 활약상이 벌어진 배경은 아니지만, 교회의 명칭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매우 뜻 깊게 다가왔다.

얼마 전 답사 때도 지나쳤던 한국은행 앞을 이번에도 스쳤다. 당시에는 조선은행과 조선제일은행 등이 있었는데,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금융계가 터를 잡고 있음이 신기했다. 한 때 조선인과 청인들이 바글거렸으나 뒤늦게 진출한 일본인들로 인해 지각변동이 벌어진 게 지금에 이르렀다. 일본인이 많았던 만큼 번화했지만 동시에 격렬한 저항 또한 벌어졌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3.1독립운동기념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근처에 놓여 있었다. 여전히 화려함을 뽐내고 있다는 신세계 백화점 중앙 계단으로 나도 모르게 시선이 쏠렸다. 예전에는 조지아 백화점이었다지. 지금도 충분히 화려하다만 조지아 백화점 시절에는 왠지 두 눈이 훨씬 더 휘둥그레지는 이들이 많았을 것만 같았다.

마징가 제트라도 출동해야만 할 거 같은 인상의 서울중앙우체국 건물 옆길에 접어들었다. 때마침 철문이 열리고 좀체 엿볼 기회가 없는 중국 대사관의 속내(?)를 훔쳐보는 기회를 잡았다. 허나 찰나 동안 모든 걸 파악하기란 불가능과도 같았다. 이내 나의 관심은 한 때 대만 대사관으로 사용됐다는 건물로 향했다. 여전히 건물 중앙 부분에는 오묘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지만 지금은 다른 용도로 쓰이는 중이었다. 다들 익히 알고 있듯 대만과의 수교는 진작에 끊겼고, 대만으로서는 서울 한복판 자리를 중국에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현재는 비공식적 외교 임부의 수행을 위하여 연락사무소 형태인 주 타이베이 대한민국 대표부가 광화문 빌딩 내에 있다.

전차와 도로 때문에 훼철되고 있는 남대문 성벽
전차와 도로 때문에 훼철되고 있는 남대문 성벽

중국풍 가게를 향한 호기심도 잠시, 코스모스 백화점이 있었다는 장소에 도달했다. 코스모스 백화점이 영업을 시작한 때는 1970년. 롯데 백화점이 들어서기 전까지 명실상부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고는 하나 몰락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대형마트 등지로 사람이 몰린 나머지 동네 상권이 맥을 못 추듯 일대에 보다 큰 규모의 백화점들이 등장하자 그 길로 경쟁력을 잃고야 말았다. 초창기에는 별 문제가 아니었을 임대 백화점이라는 특성 역시 약점으로 작용했을 듯. 내실 없는 화려함은 생명력이 약하다는 걸 가르쳐주는 사례 같이 여겨졌다.

옥상에서 양봉을 한다는 믿기 힘든 이야기를 들으며 유네스코회관빌딩을 바라보았다. 몇 해 전 답사 당시 건물 옥상에 올라갔던 기억이 있는데, 당시에는 양봉 이야기를 못 들었던지라 더더욱 상상이 어려웠다. 그러나 이는 나의 상상력 부재에 따른 문제일 뿐, 4km 는 족히 날아다닌다는 꿀벌의 능력을 고려한다면 이 일대에서 양봉을 하는 게 불가능은 아닐 듯했다. 건물 바로 앞에는 배우 최불암 씨의 어머니가 운영했다는 은성주점의 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놓여 있었다. 번영로, 박인환, 전혜린, 김수영,... 이름만으로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인물들이 대거 몰려들었던 공간은 물론 인물들 또한 더는 세상에 존재치 않으니 그야말로 인생무상이라 하겠다.

가볍게 점심을 먹었지만 절로 입안에 침이 고이게 만드는 명동교자, 하동관 등 간판의 유혹을 뿌리쳐가며 나석주 열사의 앙다문 입술이 돋보이는 조각상 앞에 섰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식산은행. 어디 이 뿐이랴! 일제는 이 땅의 수탈을 위해 참으로 많은 기관들을 세우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이를 전통이라 말해선 안 될 터이나 여전히 일대에 국책은행 등이 다수 있다는 사실이 왠지 뼈아프게 다가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수근 그리고 김중업의 솜씨를 엿볼 수 있는 오양빌딩과 기업은행 건물은 여전히 위풍당당함을 뽐내고 있었다.

건축의 기억도 이해치 못하는 내 눈에도 참 잘 빠진 건물로 비추어지니 관련 분야 전공자들이라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미를 하는 게 당연하리라. 오늘날 국립국악원에 해당할 장악원 터와 조선 시대 서민 진료를 도맡았던 혜민서 터, 특정 교회가 절로 생각나는 영락정(永樂町)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덧 영락교회 안에 들어서고야 말았다. 지금도 만인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안성맞춤인 뾰족한 첨탑이 고딕 양식 특유의 매혹적인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중앙 교회, 고려대학교 본관 건물 등이 이와 닮은꼴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이 종교를 믿는 이들에겐 살짝 불편할 수도 있는 서북청년단과 한경직 목사 이야기도 잠깐 흘러 나왔다. 우리는 역사 앞에서 얼마나 진솔한가. 전차길을 따라 걸으며 나누기에는 다소 묵직한 주제였기에 더는 대화의 흐름이 이어지진 못하였지만 마냥 외면하는 게 능사는 아님이 분명했다. 전차길 따라 걸어 새벽 미사 참석했다던 정진석 추기경의 마음을 헤아리며, 부끄럽게도 나는 다음을 기약했다.

모든 일은 서둘러도 제 시간 내에 끝마치기가 어렵다. 이미 엄청나게 걸은 듯한데 여전히 절반 가량에 못 미쳤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침샘을 자극할 을지로골뱅이골목을 건너뛴 채 영희정 터로 향했다. 조선시대의 태조·세조·원종·숙종·영조·순조의 어진(임금의 초상화)을 모셨던 전각이 이곳에 있었다고 하니 예전에는 분위기가 무척이나 엄숙했을 것만 같았다. 시대가 다르니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리는 없음에도 이런 신성(?)한 공간 근처에 스카라 극장, 명보 극장 등이 들어섰다는 사실이 조금은 신기하기도 했다.

대기업의 멀티플렉스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요즘이기에 신영균예술문화재단, 명보아트홀의 이름을 달고 존재 중인 명보극장의 존재는 더욱 반가웠다. 이순신 생가 터, 유성룡 집터 등을 지나쳐 노가리 골목에 접어들었다. 대낮답지 않은 북적거림에 우선 놀랐고, 일대가 온통 만선호프 일색이라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당황했다.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국도 극장에 대한 이야기는 나의 놀란 가슴에 한 번 더 불을 지폈다. 재산권 행사에 방해되는 근대문화유산 등록을 피해 건물을 바로 철거해 버렸다는 건물주를 뭐라 평해야 할지. 혹 내가 그 입장이었어도 그와 같은 괘씸한 행위를 하진 않았을까 싶은 마음이 들어 말을 아끼게 됐다.

일본 사신이 묵던 동평관이 있던 곳과 한 때 앵정소학교가 있었다는 현 덕수중학교 자리를 지나 광희문에 도달했다. 이 일대 존재했던 전차역의 이름이 앵정역이라던데, 이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앵정소학교의 역사는 현재는 강남구에 위치한 서울영희초등학교가 이어 받았다더니 ‘앵정소학교’를 검색하자 실제로 서울영희초등학교가 등장했다.

중간에 훈련원 터에서 잠시 쉬었던 게 주효했던지, 광희문에 도착했을 땐 상당수가 이탈하지 않은 상태였다. 어쩌면 평소 눈여겨보지 않았을 이간수문과 한양공고 건물, 지금 보아도 오묘한 모양새가 돋보이는 서산부인과 건물 등이 선사한 신선함에 힘입어 가능했던 일일지도. 하지만 이 무렵 들은 이야기는 그리 아름답지가 못했다. 죽음을 마냥 금기시할 필요는 없다 하여도 고려장이 실제 행해졌다는 이야기 앞에서는 마음이 절로 닫혔다. 시간을 거스르는 건 아직까지,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한 생명체가 아름답게 늙어가기 위해서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절실하다. 마치 한 아이의 성장을 위해 온 마을이 매달려야 하는 것처럼.

거기까지 정말 걸어간다고? 마장동행 계획에 지레 겁을 먹었던 듯도 하다. 신당동 떡볶이 타운 너머 세상은 이제까지에 비해 품은 이야기가 적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설득 당했던 것일 수도 있다. 식사를 즐길 때가 아님에도 마복림 떡볶이 집 앞 줄이 길었다. 이제는 마복림 할머니도 떠나고, 한 때 이곳을 즐겨 찾았다던 앙드레 김 선생도 이 세상에 없건만, 사람들의 여전한 즉석 떡볶이 사랑이 뜻하는 바가 무얼지. 왕십리역 방면으로 유유히 걸어가는 일행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내 머릿속엔 때 아닌 떡볶이 생각이 간절했다. 기차에선 사이다에 계란, 전차에선 어쩌면 떡볶이가 제격일지도. 어두워질 일만 남은 하루를 정리하는 발걸음은 가뿐했다.

<참고문헌>
-서울지역 전차교통의 변화양상과 의미(1899~1968), 최인영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2014
-서울의 전차, 서울역사박물관, 2019
-서울 중구청 홈페이지

[문화지평]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도시역사문화 콘텐츠연구·답사‧아카이브 전문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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