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화의 지방체육회 이야기] 부산광역시(이하 부산시)는 새삼 설명이 필요 없는 우리나라 제2의 도시이자 최대의 항도(港都)다. 국제시장과 자갈치시장, 태종대와 용두산 공원, 그리고 해운대와 오륙도로 대표되는 부산시는 한국전쟁의 와중에 북에서 남으로 자유를 찾아온 피난민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이런 가운데서도 부산시는 그 어느 지역보다 먼저 스포츠에 꽃을 피운 많은 스타플레이어들을 배출, 우리나라 스포츠 일등도시로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크고 강한 부산 체육’의 부활이 목표'

부산광역시체육회(이하 부산시체육회‧ 회장 서병수 부산광역시장)는 2015년을 ‘부산 체육의 르네상스 시대 구현’을 비전으로 제시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듯 ‘르네상스’에는 재생, 혹은 부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크고 강한 부산 체육’으로 부활하자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1963년 경남에서 분리돼 부산직할시(현 광역시)란 이름으로 첫 출전한 제44회 전주전국체육대회에서 11개 시도(당시는 재일동포도 종합 채점에 참가) 가운데 당당히 4위에 입상할 정도로 부산의 스포츠 저변은 무엇보다 단단했다. 그 뒤에도 꾸준하게 스타플레이어들을 배출하며 줄곧 상위권을 유지해 국내 제2의 도시로써 자존심을 지켜왔으며 특히 새 천년 첫 아시안게임을 유치하고 성공적으로 개최함으로써 부산 체육인들의 긍지를 드높이는 등 그야말로 부산 체육은 우리나라 체육을 선도해 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부산 체육이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5년에 2002년 아시안게임을 유치한 부산은 아시안게임 경기장 건설과 준비를 위해 엘리트 체육 육성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1997년에는 국가적 위기인 IMF 사태가 겹치면서 아시안게임 경기장 시설은 시설대로, 그리고 엘리트 체육은 엘리트 체육대로 허리띠를 졸라맬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아시안게임은 북한 선수단과 응원단까지 참가해 전 세계의 이목을 끌며 성공적으로 개최했으나 반대로 부산 체육은 조금씩 진흙 속으로 빠져 들었고 그 조짐은 1999년 제80회 전국체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구, 인천, 광주가 광역시로 출전한 뒤에도 줄곧 5위권 이내 성적을 올리던 부산은 이해 7위로 떨어졌다. 이듬해 2000년 제81회 전국체전에서는 종합 3위로 1972년과 1973년 준우승 이후 최고 성적을 올렸으나 실상 이해 성적은 전국체전 개최지 이점 덕분이었다.

부산 체육 최악의 시기는 아시안게임 개최와 맥을 같이 한다. 아시안게임 성공 개최로 그늘에 가려졌지만 이해 전국체전에서 10위로 사상 첫 두 자릿수 등위로 떨어졌고 2004년에는 16개 시도 가운데 13위까지 급전직하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부산시체육회는 엘리트 체육 복원에 나서기 시작해 거의 10년 동안 중위권에 머물다 최근 3년 동안 종합 6위로 체면치레를 하고 있다. 그나마도 부산시의 스포츠 저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러한 쓰라린 경험을 겪은 부산 체육이 2004년 이후 행정 관료에게 넘겨주었던 야전 사령탑인 사무처장을 10년만인 지난해 말 전문체육인인 송미현 사무처장 체제로 바꾼 뒤 ‘크고 강한 부산 체육’으로 부활의 기치를 높이 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 셈이다.

전문체육 정예화와 글로벌화 추진에 역점

‘크고 강한 부산 체육’의 부활을 위해 ‘소통하고 화합하는 부산체육 실현’을 추진 방향으로 설정한 부산시체육회는 • 학교체육의 기초기반 강화 • 전문체육 정예화 및 글로벌화 추진 • 전국체전 상위권 유지 역량 강화 • 스포츠 일류도시로의 도약기반 구축 등 네 가지를 추진전략으로 마련해 놓았다.

주요 내용을 보면 우수 꿈나무 선수 발굴 육성을 위해 29개 종목 88개 학교에 9억2,000만 원, 18개 종목 42명 지도자에게 2억 1,700만원, 32개 종목 183명 선수에게 1억2,300만 원의 장학금을 지급하는 등 풀뿌리 체육 저변 확대를 통해 체육 인적 인프라 확충에 정성을 쏟고 있다. 또 지역 특성에 부합한 10개 종목 11개 스포츠클럽을 운영해 양궁(4명), 볼링 요트(각 2명), 수영(1명) 종목에서 9명의 엘리트 선수를 육성하는 개가도 올렸다.

이와 함께 부산 시내 초등학교 298개교, 중학교 171개교가 참가하는 부산 초‧중학교육상챌리지대회(엘리트 선수는 제외)를 개최하고 기량이 출중하고 스타선수로서의 자질을 갖춘 체육 인재를 발굴해 세계적 선수로 육성하기 위한 부산 글로벌 스타 발굴 육성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우하람(수영) 전승원(핸드볼) 강영서(스키) 김마그너스(스키) 등 4명이 바로 그들.

전문체육 정예화를 위해서는 전국체전 불참종목 해소를 위해 부산시체육회가 지속적으로 운영하는 13개 종목 14개 팀, 궁도 농구 당구 등 규합종목 6개 종목 7개 팀으로 전력을 보강하고 이들의 경기력 향상을 위해 강화훈련비, 체전출전비 등 경기력 강화를 위한 지원을 늘여나가는 한편 ‘목표성과관리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목표성과관리제는 경기력 향상과 예산절감을 동시에 이루기 위해 경기력 향상 육성비를 지원받는 12개 종목 80명의 선수들을 대상으로 지원금의 80%는 선지급하고 성과정도에 따라 20% 차등지급하는 방안이다.

한편 이밖에 부산시체육회는 체육인이 우대받는 지역 분위기 조성을 위해 북구국민체육센터와 화명수상레포츠타운을 수탁 운영함으로써 전문체육인 출신의 안정적인 취업 보장과 노후보장 시스템 구축에도 앞장서고 있다.

스타플레이어의 산실로 명성 높아

잠시 힘든 시기를 겪기는 했지만 부산 체육의 뿌리는 그 어느 지역에 견주어도 전혀 뒤지지 않을 정도로 튼튼하다. 아니 오히려 부산 체육이 우리나라 전체 체육을 선도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다.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인 1948년 태극기를 앞세우고 런던올림픽에 출전한 뒤 오매불망 기다려왔던 올림픽 금메달의 염원을 28년만인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풀어준 레슬링의 양정모는 바로 용두산 공원 비탈길에 있는 조그마한 체육관에서 올림픽 메달의 꿈을 키워 온 ‘부산의 아들’이었다.

또 1984년 LA올림픽 유도 금메달의 주인공 ‘왕발’ 하형주를 비롯해 현정화와 유남규(이상 탁구), 이한섭(탁구), 김경순(핸드볼), 권종률(볼링), 김연자와 정명희(이상 배드민턴)는 부산의 위상을 드높인 1988년 서울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이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김문수(배드민턴), 이은철(사격)과 ‘우생순’(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으로 우리 국민들에게 감격을 안겨 준 여자 핸드볼의 박갑숙, 김화숙이 부산의 명예를 드높인 ‘자랑스러운 부산인들’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의 길영아(배드민턴), 2004년 아테네올림픽 문대성(태권도), 2008년 베이징올림픽 이효정(배드민턴), 이대호 송승준(야구), 2012년 런던올림픽 펜싱의 김지연, 구본길, 오은석도 모두 부산이 낳은 스타플레이어들이었다.

지금까지 부산이 배출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는 모두 21명, 은‧동메달리스트는 23명에 이르고 있으며 아시안게임에서는 250여 명이 각종 메달을 획득해 부산의 명예뿐만 아니라 우리나라가 스포츠 강국으로 발돋움하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특히 이들 가운데 문대성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선수 IOC 위원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부산 갈매기의 주인공’ 야구의 이대호는 일본 프로야구에서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또 배드민턴의 이용대는 우리 국민들의 가장 사랑하는 국가대표 선수들 가운데 한명으로 꼽힐 정도다.

◆ 송미현 부산시 체육회 사무처장

▲ 송미현 부산시 체육회 사무처장

“현장 중심 행정으로 체육인들의 역량 강화에 노력”

“체육인으로 영광스럽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책임감도 느낍니다.”

지난해 12월 17일 공채로 부산시 체육회에 입성한 송미현 사무처장은 체육인으로 엘리트 체육 사령탑을 맡아 개인적으로 큰 영광이지만 통합체육회나 부산 체육의 부활 문제 등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난제들을 생각하면 걱정도 앞선다고 말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체육인 출신이 체육회 사무처장을 맡기는 2004년 이후 10년 만에 처음이다. “체육회를 체육인에게 돌려 달라”는 부산 체육인들의 간곡한 부탁을 서병수 회장(부산광역시장)이 화답한 덕분이라는 것. 그런 만큼 많은 선·후배, 동료 체육인들이 합심 단결해 ‘체육인 사무처장’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고 귀띔하면서도 그만큼 주변의 기대가 커 막중한 책임감이 중압감으로 다가온다는 것이 송 처장의 솔직한 대답이다.

“철저한 현장 행정을 통해 특정 종목에 치우치지 않는 지원으로 부산 체육인들의 역량 강화를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아울러 유관기관인 부산시, 교육청, 그리고 정가맹단체 51개, 준가맹단체 4개 등 경기단체들과의 원활한 소통을 통해 신뢰받는 체육회를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송 처장은 모든 행정력과 역량을 동원해 체육인들의 권익과 화합을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는 굳은 의지도 보였다. 이와 함께 부산 체육을 한 계단 더 업그레이드 시켜 놓겠다는 속내도 숨기지 않았다.

“단기적인 성과보다 꿈나무 선수를 육성해 글로벌 스타 선수로 성장할 수 있도록 터전을 만들고 체육인들에 대한 일자리 창출에 노력해 달라”는 서병수 회장의 특별한 당부가 있었다는 송 처장은 이를 위해 실업팀 창단을 위한 TF팀을 구성해 부산지역 기업체를 순방하고 있으며 아직 구체적으로 밝힐 단계는 아니지만 연말쯤에는 상당한 성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부산 체육 꿈나무의 성장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진단한 송 처장은 특히 “이들 꿈나무들이 외부로 유출되지 않고 부산의 엘리트 선수로 성장, 활동할 수 있도록 전 종목에 걸쳐 초등학교부터 실업팀에 이르기까지 연계 육성이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하고 싶다”는 희망찬 포부도 밝혔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배구로 시작한 송 처장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씨름으로 전향해 동아대 씨름부를 졸업하고 1년 정도 공동어시장에서 민속씨름 선수생활을 한 뒤 26살의 나이에 동아대 감독으로 취임해 지난해 부산시체육회 사무처장으로 취임할 때까지 30년 동안 동아대에 재직한 순수 씨름꾼. 그동안 부산씨름협회 전무, 부회장 등을 두루 거쳐 나름대로 행정능력도 갖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송 처장은 끝으로 체육회 직원들에게 관행보다는 원칙에 입각해 소신을 가지고 적극적이며 능동적으로, 그리고 개인의 업무를 넘어 부산 체육 전체의 발전을 생각하는 창조적 기획력을 가져 줄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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