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모의 테마토크] 극장가에서 기존 슈퍼히어로 장르의 틀을 완전하게 비튼 ‘데드풀’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대부분의 히어로물이 SF와 액션을 기초로 오락성과 메시지를 동시에 담고자 노력한다면 ‘데드풀’은 오로지 화장실 유머를 기본으로 재치 위트 풍자를 모조리 동원한 코미디 지향적인 방식으로 관객에게 최대의 재미를 준다는 게 특징이다. 사실 이 영화의 기본은 데드풀이 마치 심한 화상을 입은 듯 흉측하게 변한 외모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라는 데서 출발하는 철학적 의미에 있다. 이런 바탕에서 출발한 매우 심오한 프로테스탄트(항거)와 모크샤(해방)를 주제로 한 영화가 10년 전에 있었다. 바로 ‘브이 포 벤데타’다.

▲ 영화 ‘브이 포 벤데타’ 스틸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뒤의 2040년 영국은 구 미국이 붕괴된 영향을 받아 서틀러(존 허트)가 국회의장으로 앉아 세운 독재정부가 지배하고 있다. 파시즘에 대한 혁명이란 주제가 시작부터 스멀스멀 흘러나온다. 지도자와 정치적 성향부터 사소한 것까지 다른, 심지어 동성애자까지 ‘정신집중 캠프’로 끌려간 후 사라지고 온 나라 구석구석엔 감시장치가 설치돼 있으며 철저한 언론조작으로 통제되는 세상이지만 어느 누구 하나 이게 잘못됐다고 생각하거나 의심하거나 저항하지 않는다. 1605년 11월 5일 영국 의사당을 폭파하려다 잡혀 사형당한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쓴 브이(V, 휴고 위빙)라는 인물이 나타나 유일하게 정부에 맞선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이비(나탈리 포트먼)가 갑자기 집에 들이닥친 계엄군에 잡혀가 삭발당한 뒤 투옥돼 갖은 고문을 당하며 브이에 대한 정보를 내놓을 것을 강요당한다. 그렇게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 고문자는 브이에 대해 정보를 내놓든지, 사형당하든지 결정하라고 주문하고 이비는 거침없이 죽겠다고 답한다. 그러자 정체불명의 고문자는 이제 자유라고 그녀를 풀어준다. 감옥에서 나온 이비는 복도에 서있는 경비병이 마네킹임을 확인하고 그곳은 브이의 집의 한 구석에 마련된 감옥 모형이었음을 깨닫는다.

이비는 브이에게 거칠게 원망을 퍼부으며 “넌 괴물”이라고 외친다. 브이는 자신이 괴물임을 인정하면서도 이 조작으로 인해 나약했던 이비가 이제 신념과 용기를 갖추게 됐음을 강조한다. 기존의 풍성했던 머리의 삭발은 정부가 통제라는 채찍의 선물로 던진 당근을 과감하게 내던지고 비로소 자아를 찾는다는 의미다. 이비는 빗속에서 그 까까머리를 한 채 오랜 지병인 천식을 이겨내고 해탈의 경지에 올랐음을 깨닫는다. 그동안의 조작된 세월이 억울하지만 브이에 의해 자신이 비로소 성인(주권을 주장할 수 있는 국민)이 됐음을 인정한 이비는 짐을 챙겨 떠난다. 그러자 브이는 “11월 5일을 기억하라”고 그녀를 기꺼이 떠나보낸 뒤 그녀가 나가자 가면을 벗어던지며 고통과 번뇌를 비로소 드러낸다.

▲ ‘브이 포 벤데타’

서틀러는 자신의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고자 특수한 눙력을 지닌 용병을 만드는 생체실험을 했다. 이 과정에서 대형폭발 사건이 일어나고 돌연변이 능력을 지닌 브이가 탄생하지만 화재로 흉측하게 변한 브이는 독립해 정부에 맞서 싸우는 저항의 아이콘이 됐다. ‘데드풀’과 똑같다. 핀치(스티븐 레아) 경감은 서틀러의 압박에 의해 브이를 잡기 위해 혈안이 돼있지만 매번 한발씩 앞서가는 그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브이의 존재를 짙게 느낄수록 이 정부가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서서히 깨닫게 된다. 드디어 11월 5일, 브이와 이비 그리고 핀치는 각자의 목적을 위해 나선다.

‘데드풀’과 ‘브이 포 벤데타’를 공통으로 관통하는 소재는 사랑이다. 데드풀은 오로지 잘생긴 옛 모습을 되찾아 연인 앞에 나타나 다시 사랑받고기 위한 목적으로 복수를 한다.

브이는 자신이란 괴물을 만든 서틀러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언론조작으로 혹세무민하고 세뇌하며 그 과정에서 폭력과 살인을 서슴지 않는 서틀러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싸운다. 그는 독재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서틀러 일당이 정권을 잡은 수단인 폭력을 휘두르는 게 옳지 않다는 것을 애초부터 알고 있다. 그는 압제에 항거하지 않고 주권을 주장하지 않는 국민을 바꾸지 않는 한 폭력에 의한 쿠데타는 결국 또 다른 독재정권을 생산할 것이란 것을 알기에 국민의 의식을 바꾸고자 하고 그 첫 단계로 이비를 변화시키고자 했다. 이비는 채찍에 훈련되고 당근에 마취된 전 국민의 상징이다.

그러나 20년을 준비한 이 혁명의 마지막 단계에서 그는 뜻하지 않게 이비를 사랑하게 된다. 그녀가 떠나가자 평생 벗지 않았던 가면을 딱 한 번 벗어던진 게 그래서다. 그는 자신이 감옥에 있을 때 옆방의 레즈비언 여배우로부터 받았던 편지를 똑같은 방법으로 이비의 수감조작 때 전달한 바 있다. 편지 끝엔 ‘비록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몰라도, 당신을 만난 적도, 함께 웃은 적도, 운 적도, 입 맞춘 적도 없다 해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했다. 바로 브이가 이비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이비와 브이의 대화 중 “십이야네요”란 대사가 나온다. 셰익스피어의 희극 ‘십이야’는 ‘인생은 짧고 사랑은 달콤하니 어서 사랑을 하라’는 내용이다. 그러나 ‘브이 포 벤데타’는 ‘데드풀’과는 차원이 다른 각성이란 칸타타와 혁명이란 소나타의 대서사시란 점에서 차별화된다. 클래스의 차이다. 영화가 주요 비주얼로 사용한 화법은 빛의 콘트라스트, 장미, 빨강 등이다.

▲ ‘브이 포 벤데타’

교묘한 빛의 흑백의 콘트라스트는 억압과 자유, 조작과 자각 등으로 대비되는 파시즘과 국민혁명의 은유다. 브이는 독재자 서틀러에게 마지막 선물로 장미 한 송이를, 이비는 브이에게 마지막 선물로 장미 여러 송이를 각각 바친다. 빨간 장미는 사랑, 흰색은 순결, 노랑색은 우정을 각각 의미한다. 영국은 15세기 중후반 장미전쟁이란 왕권을 다투는 내전을 겪었다. 빨간 장미를 문장으로 삼는 랭커스터 가와 흰색 장미를 그것으로 하는 요크 가와의 전쟁이었다. 그 결과 랭커스터 가문 계열의 튜더 가가 최종적으로 승리를 쟁취해 새로운 튜더 왕조를 열었다.

서틀러과 브이 모두 빨간 장미와 함께 이승을 떠난다. 의사당을 폭파하기 직전 자신과 함께 멀리 떠나자는 이비에게 브이는 “내가 속해있는 이 세상은 오늘 밤 종말을 맞는다. 내일은 다른 사람이 다른 세상을 창조해야 한다”고 말한다. 장미전쟁의 결과다. 거사가 시작되자 브이는 검정과 빨강으로 채색된 도미노로 빨강 V 자의 위의 두 뿔과 밑의 한 각이 거대한 검정 원을 뚫고 나온 모습을 보여준다. 이 장면은 보는 이에 따라 해석이 다르겠지만 두 뿔과 각은 악마의 형상이다. 원은 기존 체제다. 빨간색은 공산주의의 혁명을 의미한다.

단, 공산주의는 실패했고, 그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는 개성을 존중하지 않은 획일성이기 때문이었다고 해석된다. 도미노 장면에서 폭력시위가 교차편집된 이유는 바로 비폭력 저항, 즉 자기애의 실현과 자아성찰을 말하는 것이다. 그건 브이가 이비에게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 그리고 세상에는 우연이 없고 과거와 현재는 연결돼있기 마련이라는 철학을 설파한 데서 이어진다. 마지막 거사 중 전 국민이 브이의 복장을 하고 획일된 모습으로 계엄군에 맞서는 것은 공산주의고, 의사당이 폭발되고 밤하늘에 폭죽이 터지자 모두 가면을 벗어던진 채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는 것은 개성과 자아의 각성이다.

이비는 비의 안에(혹은 빗속에) 신이 있다고 했다. 비는 성장이자 생산, 그리고 변화와 발전 즉 진보를 의미한다. 단, 과해 홍수가 날 경우 세상은 뒤집어진다. 브이가 비폭력 혁명을 주창하면서도 자신은 폭력으로 독재자를 처단하는 이중성을 보이는 것이다.

브이는 “예술가는 진실을 말하기 위해 거짓을 사용하지만 정치가는 진실을 덮기 위해 거짓을 사용한다”고 웅변한다. 작품은 영화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담아 “널 쓰러뜨린 건 내 칼이 아닌 네 과거다”라는 에드몬드 단테스의 페르난도 몬데고를 향한 대사를 읊조린다. 혁명(내 칼)이 독재정권(너)을 무너뜨린 게 아니라 과거(독재) 탓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란 의미다. 그래서 의사당 폭파를 만류하는 핀치에게 이비는 “이 나라에 필요한 것은 건물(권위와 권력)이 아니라 희망”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브이는 방송을 통해 “누가 죄인인지 알고 싶으면 거울을 보라”고 국민의 자각을 고무시키고 이비는 브이의 정체를 묻는 핀치에게 “내 부모였고, 오빠였고, 친구였고, 당신이기도 했고, 나이기도 했다”고 말한다. 브이는 영웅이나 특정 인물이 아닌, 전 국민의 각성, 진정한 자유를 향한 열망과 이의 적극적인 행동이란 의미다.

‘데드풀’처럼 가볍게 즐기는 오락영화도 필요하지만 감상 뒤 몇 날, 몇 달이 아니라 영원히 잊지 못하는 여운을 주는 진지한 영화도 예술적 차원에서 절실하다. 10년이 지났음에도 뒤통수가 지끈거릴 만큼 현실적이어서 더욱 그렇다. 이런 영화를 자본주의의 리더 미국과 히틀러를 배출한 독일이 합작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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