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모의 테마토크] 제 97주년 삼일절을 맞았다. 이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애국선열들을 기리자는 전 국민의 뜻이 모이기라도 한 듯 개봉 5일된 영화 ‘귀향’을 벌써 100만 관객이 관람했다. 1일은 공휴일이므로 더욱 많은 관객으로 극장 문이 닳을 것이고, 위안부 문제는 역사관이 희미하거나 왜곡된 일부 관객들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자그마하게나마 울림을 줄 것이다.

▲ '귀향' 스틸 사진

수많은 국민이 ‘귀향’ 관람 후 눈물을 흘리며 일본군의 만행에 분개하고, 피해를 입은 당시 우리네 꽃 같은 여자들의 심신의 고통에 아파하고 있는데, 정부는 올해 초등학교 6학년이 배우게 될 사회과 국정교과서에서 위안부 사진은 물론 그 용어 자체를 삭제한다고 밝혔다. 그 이유는 ‘일본군 위안부와 성 노예라는 표현이 초등학생 학습에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이 있어서’였다. 다른 의견은 없었을까? 이게 바로 선진국에서 놀라는 한국의 ‘앞으로 나란히’의 획일적 기계적 교육은 아닐까? 용어를 삭제하면 대체용어는? 아예 여자정신대근무령의 존재를 지우는 것은 아닐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교육부와 여성가족부는 초, 중, 고생을 대상으로 ‘일본군 위안부 바로 알기 교육’을 실시한 바 있다. 지난해 정부는 다수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교과서 국정화를 결정했고, ‘지원금’ 10억 엔에 일본과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합의했다. 강제로 우리 조상의 딸, 누이, 연인, 아내를 끌고 가 마음껏 성노리개로 유린한 뒤 무참하게 죽인 데 대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죄나 최소한의 법적 조치도 없이 일부-정부에 등록된 생존 위안부 44명-에게라도 허락받지 않은 상황에서의 10억 엔의 ‘합의’다.

이제 일본 정부는 드러내놓고 일본 대사관 앞의 소녀상의 철거를 요구한다.

▲ 사진=픽사베이 제공

‘귀향’은 처음엔 극장들이 외면했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은 아직 못 본 관객들을 복리이자처럼 불렸고, 결국 CGV가 빗장을 풀면서 이제 웬만한 상업적 흥행영화 못지않은 관객이 파도처럼 상영관 안으로 밀려들어오고 있다. 이제 그들에게 ‘검사외전’은 이미 한물이 갔고, ‘데드풀’은 저급할 따름이다. 리어너도 디캐프리오에게 오스카의 한을 풀어준 ‘레버넌트’는 막을 내린 지 오래니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일까? 덩달아 ‘동주’도 관객 수가 점점 더 늘고 있다.

‘귀향’과 ‘동주’의 주인공과 내용은 다를망정 시선과 주제는 비슷하다. ‘귀향’은 잊혀져가는, 혹은 왜곡돼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면서 통증을 함께 나누고, 치유에 동참하자는 의미다. 그건 1인가구가 급격히 느는 메마른 이 세상에서 가족의 소중함과 더불어 이념을 떠난 민족과 나라의 진짜 공동체 언어를 찾자는 울부짖음이다. ‘동주’는 독립운동에 초점을 맞춘 게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었던 젊은이들의 잃어버린 꿈에 대해 울분을 토하고 고통을 분담한다.

두 영화는 각각 위안부와 윤동주-송몽규라는 젊은이들을 주인공으로 한다. ‘귀향’의 주인공은 이유 없이 종군하며 정신과 육체가 모두 깎여나가는 가운데 영혼을 잃어가고, ‘동주’의 그들은 이름과 언어마저 빼앗기자 쓰고 싶은 시와 산문을 쓰지 못한 채 진로를 잃고 방황한다. 전자는 작은 저항조차 할 수 없지만 후자는 직간접의 독립운동으로 일제에 빼앗긴 것, 즉 주권과 꿈을 찾고자 한다.

▲ '동주' 스틸 사진

특히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양심가 송몽규는 한때 공산주의에 심취해있었지만 이내 민족주의자로 바뀐다. 이 내용은 오늘날의 우리나라를 바라보는 시선이 오롯이 담겨있다. 그 아픈 35년의 일제강점기를 끝내자마자 우리나라는 이데올로기라는 망령에 사로잡혀 허리가 잘렸고, 그것도 모자라 대한민국 내부에서조차도 ‘꼴통보수’와 ‘좌빨’이라는 더욱 잔인해진 허상의 괴물을 만들어놓고 대립하고 있다.

‘귀향’과 ‘동주’가 말하고자 하는, 관객들이 점점 늘어가며 자본주의 체제가 만든 전형적인 상업영화인 ‘검사외전’과 ‘데드풀’을 비웃을 수 있는 배경은 그런 소모적인 이념의 논쟁이 아니라 젊은이의 희망이고, 민족(가족)의 소소한 행복이다. 제국주의의 야욕이 만든 내부균열조장 시스템과 이를 잘 모른 채 갑자기 물밀 듯 밀려들어온 이념이란 사이비종교에 사로잡혀 제 민족을 거리낌 없이 죽이며 남과 북으로 갈라선 채 미사일과 사드라는 꼭두각시놀음에 눈동자가 돌아가지 말고, 최소한 일제가 어떻게 우리의 민족혼을 말살했고, 그래서 우리 젊은이들이 어떻게 절망 속에 제대로 꽃을 피지도 못한 채 죽어갔는지 알자는 얘기다. 그건 다시는 그런 오류(정복)를 범하지 말자는 사후약방문이 아니라 쓸데없는 분열을 더 이상 만들지 말고, 원초적인 인간의 행복의 조건, 즉 꿈과 사랑이라도 찾자는 빨간 눈물의 호소다.

일본제품 불매운동이 반시대적이라서가 아니라 본질과 어긋나서 비현실적인 것이다. 반일본 단지나 할복이 세계인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것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본질적인 접근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를 위한 반대는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다. 문제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을 위한 다툼이 중요하다. 민족정신말살이란 거대한 명제 앞에서의 개인적인 분노와 통한의 분출보단 민족 대 민족, 국가 대 국가로서의 정서적 호소가 더 효과적이다.

송몽규가 총을 들 때 윤동주는 몰래 한글로 시를 쓴다. 그건 모든 것을 잃어도 꿈과 낭만은 포기하지 말자는 작은 저항의 손 떨림이다. 두 사람처럼 고작 28년을 살아도 영원히 아름답게 기억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갖은 부귀영화를 누리며 악착같이 생명을 연장해도 100년을 못 산 채 죽어 오랫동안 저주를 받는 사람도 있다. 그나마 잊힌 게 다행인 매국노나 위정자나 부자는 부지기수다.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