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소설가 정영희의 산문노트] 카르마(Karma), 업(業)이라고도 한다. 불교에서는 심신의 활동과 일상생활을 말한다. 혹은 전생의 소행으로 말미암아 현세에 받은 응보(應報)를 가리키기도 한다. 나는 후자만 업이라고 알고 있었다.

​인생의 쓴맛을 알기 시작한 게 언제였을까. 고3 때의 입시 중압감은 이빨도 안 들어간 거였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천지도 모르고 첫사랑과 결혼한 25세부터 신(神)은 내게 인생의 쓴맛과 짠맛을 알게 해 주었다. 나의 카르마의 시작이었음을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업이라는 게 일상생활에서 내가 하고 있는 일 또한 업(직업)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코린토스의 왕인 시시포스는 신들의 왕인 제우스가 아이기나를 유괴하는 것을 목격한다. 아이기나는 강의 신 아소포스의 딸이다. 아름다운 님프 아이기나에게 반한 제우스는 독수리로 변해 아이기나를 납치한다. 이를 본 시시포스는 강의 신 아소포스에게 자신의 아크로폴리스에 샘물이 솟아나게 해주면 딸의 행방을 알려주겠다고 흥정을 한다. 딸을 찾아 방방곡곡을 다니던 아소포스는 그 요구를 들어주고 딸의 행방을 알게 된다. 

그 일로 시시포스는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 못된 짓을 많이 한 시시포스는 인간 중에 가장 교활하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제우스는 죽음의 신을 보낸다. 그러나 꾀가 많은 시시포스는 죽음의 신을 속여 그를 묶어두었다. 전쟁의 신 아레스가 죽음의 신을 구출하러 올 때까지 아무도 죽지 않았다고 한다. 죽음의 신이 풀려나자 시시포스는 저승으로 가야 했다. 저승으로 가기 전날 아내에게 자신의 장례를 치르지 말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고 당부한다. 

저승의 신 하데스는 시시포스가 죽었는데도 시시포스의 아내가 장례도 치르지 않고 제사도 지내지 않자, 시시포스에게 아내를 혼내고 오라고 잠시 돌려보낸다. 지상으로 내려온 꾀보 시시포스는 저승으로 돌아가지 않고 장수했다. 그러나 인간은 언젠가는 죽게 된다. 죽은 뒤에 감히 신을 능멸한 시시포스는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는 벌을 받게 된다. 그 바위는 정상에 다다르면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 형벌은 영원히 되풀이 되었다. 

티치아노 베첼리오의 ‘Sisyphus’(1548~49). 캔버스에 유화. 프라도미술관 소장. 
티치아노 베첼리오의 ‘Sisyphus’(1548~49). 캔버스에 유화. 프라도미술관 소장. 

도대체 이런 게 다 인간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인가 싶을 만큼 충격적인 임신과 출산. 육아의 시간은 즐거움도 있지만 바깥세상과 완벽하게 단절된 우울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삶. 시간이 어디에서 풀려나오는지도 모르고 매일매일 이어지는 똑같은 일상. 아무리 소리쳐도 아무도 날 구하러 오지 않는 지하 감옥에 갇힌 듯했다. 

지하 감옥을 탈출하기 위해, 내가 나로 존재하기 위해 크로버 타자기를 사서 글씨를 찍기 시작했다. 글씨는 문장을 만들었고, 문장은 문단을 만들었고, 문단들은 모여 책이 되었다. 밤마다 나는 타자기 앞에서 발광체처럼 파랗게 불 타 올랐다. 어느 날 경비실에서 올라왔다. 밤마다 누군가 난수표처럼 찍어대는 타자기 소리에 잠을 잘 수 없다는 민원이 들어왔다고. 1986년 처음으로 필립스 노트북 컴퓨터를 샀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5년에 한번 쯤 노트북 컴퓨터를 바꿔가며 글씨를 찍고 있다.

노트북 컴퓨터를 두 개 쯤 교체했을 때 시시포스 신화를 만났다. 아, 모든 인간은 시시포스처럼 자신만의 형벌이 있구나 싶었다. 그렇다면 이 형벌에 대한 구원은 없단 말인가. 그러다 부처를 만나게 되고, 업이란 말을 알게 되었다. 전생 빚(업)을 다 갚아야 다음 생에는 보다 나은 삶으로 태어난다고 했다. 그 전생 빚을 소멸하는 행위가 ‘업을 닦는다‘는 것이다. 부처의 지혜는 나를 가톨릭계 부디스트로 만들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실상'이다 

그 업을 닦는 숭고한 행위가 무엇인지 나는 책에서 먼저 보았다. 내 기억으로, 처음으로 고독하고 성실한, 한 인간의 거룩함을 온몸으로 느끼며 울컥 울음을 쏟은 건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1952년)’를 다시 읽으면서였다. 산티아고 노인은 84일 동안 고기를 못 잡았지만 좌절하지 않는다. 오로지 고기 잡는 일 자체에만 자부심과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85일째날 거대한 청새치를 잡지만, 상어 떼에게 모두 뜯어 먹히고 뼈만 가지고 돌아온다. 다섯 번이나 쉬어가며 올라가야하는 오두막집까지 걸어가며 그는 불평 한 마디 하지 않는다. 그리곤 또 다시 내일 고기잡이 나갈 그물과 장비를 손질한다. 그 절대 고독의 모습은 인간의 존엄 그 자체다. 결코 신에게 굴하지 않는 의연함과 결연함과 장엄한 인간의 모습을 산티아고를 통해 보여준다. 

책 밖으로 나와도 산티아고 같은 노인은 도처에 있음이 비로소 보였다. 내가 가락동에 작은 오피스텔을 마련한 지도 20년이 된다. 그 낡은 오피스텔은 가락동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1004호. 십층 꼭대기에 있는 내 방을 오르내리다보면 늘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다.

20년 동안 분식집에서 머리에 쟁반을 이고 배달을 하는 아주머니. 20년 동안 지하 3층 보일러실에서 살며 오피스텔의 모든 전기를 관리하는 아저씨. 일층에서 20년 동안이나 무안낙지를 파는 아주머니. 20년 동안 빈대떡을 구워 파는 아주머니. 20년 동안 곰국을 우려 파는 아저씨. 20년 동안 성인용품을 파는 아저씨. 20년 동안 문구를 파는 문구점 노총각. 골목을 돌아가면 20년 동안 한 평이나 될까하는 공간에서 복권을 파는 아저씨. 그 앞에서 20년 동안이나 구두를 고치는 아저씨. 그 옆의 송파 모터스에서 20년 동안 차를 고치는 양반장. 모두 내가 아는 20년 이전부터 계속되어 왔을 숙명적인 삶이다. 

그들은 모두 시시포스 신화의 시시포스들이고,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 노인이다. 삶을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하다는 걸, 자신의 본분을 찾아 성실하게 살다가는 게 자신의 ‘업’을 닦는 일이라는 걸, 자신의 업장을 소멸하는 일이라는 걸,  그들은 어떻게 알았을까. 이런 자각이 들 때마다 부끄럽다. 또한 그들은 외롭고 힘든 사람을 기꺼이 도우며 공덕을 쌓기도 한다.

나에게 고난이 없었다면 과연 나는 내 생각을 멈추고 나를 돌아볼 수 있었을까. 늘 고통스러웠다. 돈 많고 유능하고 성실하기까지 한 남편을 만난 친구들이나, 탁월한 재능으로 잘 나가는 친구나, 비슷하게 시작했지만 수많은 문학상을 받는 친구들을 보는 일은 괴로움이었다. 세상이 고해(苦海)의 바다임을 알게 되었다. 

고해를 피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닥치는 대로 책을 보았고, 책 속에 길이 있었다. 내게 주어진 이 부조리한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끊임없이 시시포스처럼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들어 올렸고, 산티아고처럼 늘 빈손이지만 내일을 위해 그물을 손보았다. 어김없이 바위는 다시 굴러 떨어졌고, 내 그물에는 언제나 고기가 걸리지 않았다. 어느 순간 저 깊은 심연에서 돌순처럼 딱딱한 무엇이 솟아나며, 이렇게 외쳤다.

“얼마든지 오라. 나의 형벌이여, 나의 운명이여.”​

고난이 축복이란 말을 비로소 이해한다. 고난을 겪고 나면 내 영혼이 손톱만큼씩 성장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업’을 다 닦는다면 비로소 시시포스의 형벌에서 벗어날 것이다. ‘아모르파티(Amor fati)’라는 말도 있다. ‘운명을 사랑하라’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이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면 그때부터 운명은 더 이상 비극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직장생활도 마찬가지. 모든 인간은 각자 삶의 몫이 있는 것이다. 어떤 일을 하던 자신의 본분을 알아차리고, 돈벌이와는 상관없이 그 일을 꾸준히, 묵묵히, 성실히 하면서 자신을 완성해 가는 것이 업을 닦는 일이며, 다음 생을 바꾸는 일애 투자하는 일이며, 삶의 저주를 푸는 열쇠가 될 것이다. 

늘 자신의 삶은 다른 곳에 있고, 자신은 여기서 시시포스처럼 형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영원히 운명을 벗어날 수 없고, 업을 닦을 수도 없고, ‘직업(職業)’은 돈만 버는 ‘직장(職場)’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인연은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자신에게 달린 게 아니다. 그러니 집착은 하지 말아야 한다. 

“굿모닝, 카르마!” 

매일 아침 나의 카르마와 포옹한다. 나의 본분이 무엇인가를 아는 여정이 이토록 험난했다니. 깨달음은 늘 한 발 늦는 이방인처럼 고독을 휘장처럼 두르고 다가온다.

정영희 작가
정영희 작가

[정영희 작가]
대구 생. 영남대 미대, 동국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대학교 2학년 때 시문학에 단편소설 ‘아내에게 들킨 生’을 발표하고, 1986년 중편소설 ‘무무당의 새’로 동서문학 신인상을 받고 문단에 나왔다. 장편소설 ‘그리운 것은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는다’, ‘무소새의 눈물’, ‘슬픈 잠’, ‘아프로디테의 숲’, ‘아키코’ 등과 소설집 ‘그리운 눈나라’, ‘낮술’ 등을 출간했다. 산문집으로 ‘석복수행 중입니다’, ‘콤플렉스 사용설명서’. ‘굿모닝, 카르마’와 다수의 공저가 있다. 현재 영희역학연구원을 운영하며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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