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소설가 정영희의 산문노트] 화양연화(왕가위 감독, 2000)는 ‘난처한 순간이다. 여자는 수줍게 고개를 숙인 채 남자에게 다가올 기회를 주지만, 남자는 다가설 용기가 없고, 여자는 뒤돌아선 후 떠난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이 숨 막히게 아름다운 영화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 거다.

영화 화양연화(왕가위 감독, 2000) 포스터.[출처 : The Movie Database]
영화 화양연화(왕가위 감독, 2000) 포스터.[출처 : The Movie Database]

​화영연화(花樣年華)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을 말한다. 나비난의 하얀 꽃이 허공에서 툭툭 터지는 무료한 봄날의 끝 무렵, 리마스터링 한 화양연화를 본다. 몇 번째 보는지는 모르겠다. 

명작이란 이런 거라고 왕가위는 한 수 가르쳐 준다. 20여년이 지났건만, 이 영화는 어제 만든 영화라고해도 될 만큼 사람의 마음을 울렁이게 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음악과 비주얼이 아방가르드하다. 첼로 음이 묵직하게 깔리는 ‘유메지의 테마’. 첼로음이 이렇게 관능적인 슬픔을 머금다니. 백만 번을 들어도 먹먹한 선율.

일본의 영화 음악가 우메바야시 시게루가 스즈키 세이준 감독의 ‘유메지(1991)’를 위한 주제곡을 만들어 준 게 ’유메지의 테마‘다. 유메지는 20세기 초 활동한 시인이자 화가 ’유메지 타케히사‘의 생애를 그린 영화다. 안타깝게도 이 영화는 보지 못했다. 왕가위는 ’2046(2004)‘과 ’일대종사(2013)‘에서도 우메바야시의 음악을 사용했다. 또한 재즈 보컬리스트 냇 킹 콜의 스페인어 노래도 반복해서 흐른다.

1962년 홍콩. 비좁은 아파트에 같은 날, 바로 옆집으로 이사 오게 된 수(장만옥 분)와 차우(양조위 분). 출퇴근 시간 가파르고 좁은 계단을 오르내리며 스치는 두 사람. 특히 남편이 일본으로 출장 간 수는 혼자 밥 먹기 싫어, 늘 국수를 사러 보온병을 들고 식당으로 오고간다. 그럴 때마다 차우와 마주친다. 깃이 높은 차이나 칼라에 몸에 딱 달라붙는, 화려하게 프린팅 된 민소매 원피스(치파오)와 풍성한 올림머리. 고혹적인 뒤태. 슬로모션과 첼로선율.. 냇 킹 콜의 ‘키싸스 키싸스 키싸스’.

당신은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언제나 당신은 나에게 ‘어쩌면, 어쩌면’하고 말하고 있지요.
나는 백만 번이나 물었지만,
다시 한 번 묻겠어요.
그래도 당신의 대답은 오로지 ‘어쩌면, 어쩌면’이라고 한 뿐이지요.
정말 사랑한다면.
‘예스’라고 말해주세요.

왕가위의 천재성은 융합에 있다. 어떻게 ‘유메지의 테마’와 냇 킹 콜의 스페인어 판 ‘키싸스 키싸스 키싸스’를 주제곡으로 삼았을까.

차우 아내와 같은 가방을 든 수. 수 남편과 같은 넥타이를 한 차우. 각자의 배우자가 서로 외도를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스쳐지나가던 그들이 레스토랑에서 마주 앉는다. 어렴풋하게 알고 있던 비밀스런 고통이 백일하에 드러난다. 그리고 비로소 두 사람이 나란히 같은 방향을 보고 걷는다. 

- 그들의 처음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수가 질문한다.

- 두 사람의 시작이 궁금했는데, 모든 일이 자신도 모르게 시작 되죠.
수에게 마음이 기울기 시작한 차우가 답 한다. 

둘은 물이 스펀지에 스며들듯 스며든다. 그게 뭔지 알지만 ‘그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조용히 식사하고, 산책하고, 신문사에 다니는 차우가 글을 쓰기 위해 빌린 호텔 방을 드나들지만 무협 소설의 스토리를 토론할 뿐이다. 이웃 사람들의 눈총 때문에 같이 택시를 타고도 차우가 먼저 내리고 수는 아파트 앞까지 간다. 

택시에서 손을 잡고, 이별 연습을 했을 때 차우의 어깨에 기대 운다. 그들의 접촉은 그뿐. 그들이 '그들'처럼 호텔에서 질펀하게 정사를 벌였다면 막장 불륜드라마에 '스와핑 포르노'로 전락했을 것이다. 어느 날 잠시 싱가포르에 다녀온다는 차우.

- 싱가포르 가는 배표가 한 장 더 있다면 같이 떠날래요?

차우는 이 말을 속으로만 되 뇌 인다. 어긋나는 사랑. 이별이 없다면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차우가 싱가포르로 떠난 후 호텔방에 간 수. 

- 싱가포르 가는 배표가 한 장 더 있다면 절 데려가실래요?

혼자 생각하는 수. 호텔 방에 두었던 자신의 실내화를 가지고 옴으로서 이별을 암시한다. 돌아온 차우는 수의 실내화를 찾기 위해 온 호텔방을 뒤진다. 물건이 없어졌다고 종업원에게 항의한다.

- 어떤 물건이 없어졌는데요?
종업원이 뚱하게 묻는다.

참담한 표정의 차우. 그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이 없어진 거다. 화양연화가 사라진 거다.

몇 년 후 아들 하나를 데리고 다시 그 아파트에 세 들어 사는 수. 어느 날 그 아파트에 인사차 온 차우. 그러나 마주치진 않는다. 우주를 여행하는 두 행성처럼 비켜지나간다. 

캄보디아의 오래된 사원, 앙코로 와트가 보인다. 차우는 구멍 뚫린 사원의 기둥에 자신의 비밀을 말하고 흙으로 영원히 봉인한 후 떠난다. 멀리서 사미승이 저승에서 이승을 바라보듯 바라본다. 

그 시절은 지나갔다. 그 시절이 가진 모든 것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지나간 세월은 먼지 쌓인 유리창처럼 볼 수는 있지만, 만질 수 없기에 그는 여전히 지난 세월을 그리워한다. 만약 그가 먼지 쌓인 유리창을 깰 수 있다면 지나간 세월이 그 때로 돌아갈 지도 모른다. 

도입부처럼 자막으로 끝이 난다. 

왕가위 감독은 이 영화를 대본 없이 찍었다고 한다. 대본 없어도 가능했을 것 같다. 왕가위의 화양연화이기 때문이다. 화인처럼 가슴에 묻어둔 그의 순결하고 아픈 사랑. 진흙에서 연꽃이 피어나듯, 그 필연적인 사랑을 이처럼 아름답게 만들어, 모든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내는 보편성을 획득하고, 시간의 검증을 거치고도 끄떡없는 명작으로 남게 되었다. 또한 배우로서 장만옥과 양조위의 화양연화이기도 할 것 같다.

왕가위의 보석상자, 화양연화가 우리들의 화양연화를 호출한다. 저런 천재들 덕분에 인생은 지루하지 않다. 

정영희 작가
정영희 작가

[정영희 작가]
대구 생. 영남대 미대, 동국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대학교 2학년 때 시문학에 단편소설 ‘아내에게 들킨 生’을 발표하고, 1986년 중편소설 ‘무무당의 새’로 동서문학 신인상을 받고 문단에 나왔다. 장편소설 ‘그리운 것은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는다’, ‘무소새의 눈물’, ‘슬픈 잠’, ‘아프로디테의 숲’, ‘아키코’ 등과 소설집 ‘그리운 눈나라’, ‘낮술’ 등을 출간했다. 산문집으로 ‘석복수행 중입니다’, ‘콤플렉스 사용설명서’. ‘굿모닝, 카르마’와 다수의 공저가 있다. 현재 영희역학연구원을 운영하며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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