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소설가 정영희의 산문노트] 이제 좀 잠잠해 졌나? 무슨 심보인지 모르지만 극찬하는 영화나 베스트셀러가 된 책은 보지 않는다. 그전에 먼저 보거나, 아니면 거품이 꺼지길 기다린 다음 본다. 찬찬히. 모든 선입견이 머리에서 지워질 때 쯤 말이다. 

이제 봤다, ‘노매드랜드(Nomadland, 2021, 클로이 자오 감독). 미국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을 받은 작품이다. 일단 미국에 사는 중국인 영화감독  클로이 자오, 그 자그마한 여인에게 기립박수 보낸다.

영화 노매드랜드(클로이 자오 감독, 2021) 포스터.
영화 노매드랜드(클로이 자오 감독, 2021) 포스터.

​이 영화는 자본주의에 물들대로 물든 ‘우리 안의 얼어버린 감성의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다. 오래 전 본 어느 영화에서 소련 스파이가 뉴욕 호텔방의 TV를 끄며 ‘더러운 자본주의’라고 중얼거리던 말이 생각난다. 이 영화도 자본주의의 추악한 뒷모습을 보여준다. 혹은 ‘복 받은 미국 시민’들의 치부를 슬쩍 들춰보여 준 영화다. 

2011년 1월 13일. 석고보드 수요의 감소로 미국 네바다 엠파이어 석고보드 공장이 폐쇄된다. 7월엔 엠파이어 지역의 우편번호가 사라진다. 우편번호가 없으면 집(규격화 된 사택)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모든 마을 사람이 다 떠나고 없다. 남편이 죽고, 경리일을 보던 ‘펀(프란시스 맥도먼드 분)’은 폐허가 된 엠파이어를 마지막으로 떠난다. 

‘선구자’라고 이름 붙인 밴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노매드(유랑민)가 된다. 아마존의 포장일, 캠핑장의 관리나 청소일, 패스트푸드점 등에서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이어간다. 그녀는 자본주의로부터 추방당했다. 추방당한 그녀는 유랑족들과 만나면서 서서히 ‘노매드랜드’의 시민이 되는 이야기다. 논픽션 소설을 각색한 거라 다큐멘터리 같기도 하다.

4차 산업혁명이 도래하고, 지금의 모든 산업이 석고보드 광산처럼 폐쇄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클로이 자오 감독이 의도했던 안했던 영화 곳곳에 미국의 자본주의를 면도날처럼 예리하게 그어댄다. 퇴직연금이 550불이고, 캠핑장 대여비가 375불이다. 집이 없는 그녀는 퇴직연금으로 살 수가 없다. 

이 영화에는 셰익스피어의 시(詩)가 두 번 나온다. 첫 번째는 펀이 마트에서 예전 같은 동네 살던 소녀와 우연히 마주쳤을 때다. 집이 없다면서요, 하고 묻자, 펀은 집(house)이 없는 것과 (가족이 함께)거주하는 곳(home)이 없는 것은 다르다고 말하며, 집은 있다고 말한다. 펀은 자신이 가르쳐준 시를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소녀는 뜨덤뜨덤 시를 외운다.

Tomorrow, and Tomorrow, and Tomorrow
Creeps in this petty from day to day...

내일 또 내일 또 내일
이 더딘 걸음으로 하루 또 하루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기어가서,
우리의 어제들은 흙덩이 죽음에 이르는

어리석은 자들 앞에 비추리, 
꺼져라, 꺼져라 짧은 촛불아!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 나오는 대사다. ‘맥베스’는 인간의 욕망이 가져오는 파국에 관한 희곡이다. 펀은 5년간 교사도 했던 이력이 있다. 그녀는 셰익스피어를 아는 지성인이다. 어쩜 이 대사가 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인생은 ‘짧은 촛불’과 같고, ‘덧없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인간의 욕망이란 펀의 욕망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숭배하는 인간들의 욕망이다. 

펀은 차 고칠 비용을 빌리기 위해 언니 집으로 간다. 그곳에서 만난 남자들은 2008년 금용 위기가 닥쳤을 때 폭락한 집을 여러 채 사서 돈을 많이 번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들. 철저히 자본에 물들어 남의 아픔이나 배고픔은 전혀 보이지 않는 사람들. 자본주의 사냥꾼들. 그들은 자신들의 자본의 증식을 위해 사람들을 황야로 추방하는 자들이다.

두 번째 시는 유랑을 즐기는 청년을 만났을 때다.

그대를 여름날에 비할까?
그댄 여름보다 사랑스럽고 부드러워라
거친 바람이 5월의 꽃봉오릴 흔들고
우리가 빌려온 여름날은 짧기만 하네
때론 하늘의 눈은 너무 뜨겁게 빛나고
그 황금빛 얼굴은 번번이 흐려진다네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움 속에서 시들고
우연히 혹은 자연의 변화로 빛을 잃지만
그대의 여름날은 시들지 않으리
그댄 아름다움을 잃지 않으리
죽음이 그대를 그늘로 끌고 가지 않을 수도 있네
그대가 영원히 운율 속에 깃든다면
사람이 숨을 쉬고 눈이 보이는 한
이 시(詩)는 살아남아 그대에게 생명을 주리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18. 금방 사라지는 짧은 청춘을 여름날에 비유한 소네트. 소네트(sonnet)란 14행짜리 정형시를 말한다. 유럽 중세 때부터 널리 퍼진 시(詩) 형태이다. 펀이 결혼식 날 낭송했던 시다. 짧았던 청춘은 금세 사라지지만, 시를 아는 사람은 결코 죽음이 그대를 그늘로 끌고 가지 못한다는 시. 

평생 대출받아 산 집의 빚을 다 갚고 퇴직 후, 마당에 세워둔 요트를 타고 여행을 떠날 꿈을 꾸던 빌은 퇴직 후 3일 만에 죽는다. 그걸 본 동료는 인생이 짧다는 걸 느끼고 시간 낭비하지 않기 위해 노매드가 된다. 

“우린 기꺼이 돈의 멍에에 속박되어 한 평생을 살아가죠. 가축의 비유가 생각나네요. 열심히 죽어라 일만하다가 벌판으로 쫓겨나는 가축. 우리가 그런 신세죠. 이 사회가 우릴 벌판으로 내 쫒으면 우린 함께 서로를 돌봐줘야 합니다. 타이타닉호는 침몰하고 있고, 경제 위기는 커지고 있습니다. 지금 제 목표는 최대한 많은 구명보트에 최대한 많은 사람을 태우는 겁니다.”

유랑민을 돕는 단체를 만든 ‘밥 웰스’의 말이다. 그는 작별인사를 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다시 만나자’라고 한다. 그는 아들을 먼저 보낸 사람이다. 언젠가는 아들을 다시 만나리라 생각한다. 클로이 자오는 밥 웰스를 통해 불교의 윤회관을  내비친다. 그녀의 동양적 사고, 유교, 불교, 도교의 세계관은 도처에 있다. 

“별이 폭발하면서 뿜어낸 플라즈마와 원자가 가끔 지구에 떨어져서 땅을 기름지게 하고 우리의 일부가 되죠.”

유랑족에게 망원경으로 목성을 보여주던 천체 물리학자가 한 말이다. 빅뱅이 있고, 그 입자들은 모여 생명체가 되고, 인연이 다해 죽어 흩어지면 다시 우주의 에너지로 환원된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은 시는 따로 있었다.

......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유랑이 없다면
그리고 강물을 응시하는 긴 밤이 없다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강물은 나를 너의 이름에 묶는다

......
우리는 가벼워졌다
먼 바람 속 우리의 집들만큼이나
우리, 당신과 나는 구름 속의 이상한
존재들과 친구가 되었다
우리들은 정체성의 땅이 주는 중력에서 해방되었다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유랑이 없다면,
그리고 강물을 응시하는 긴 밤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강물은 나를 너의 이름에 묶는다
그 무엇도 너를 제외하고는 내게 남은 것 없다
이방인의 허벅지를 애무하는 이방인
오, 이방인이여! 남겨진 이 고요함 속에서,
두 전설 사이의 토막잠 속에,
우리는 무엇을 하게 될 것인가?

- 마흐무드 다르위시(1999, 유랑이 없다면, 나는 누구인가? 부분)

마흐무드 다르위시(1941~ 2008)는 팔레스타인의 계관시인이다. 1988년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선언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현재도 진행 중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70여 년의 분쟁을 쉽게 재단할 수는 없지만, 팔레스타인 민족은 자신들이 살던 나라에서 추방당했다. 그는 추방당한 팔레스타인인들의 분노와 아픔을 노래했다. 언제나 고향으로 돌아가길 꿈꾸다가 종래에는 인간은 이 우주를 유랑하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유랑이 없다면, 나는 누구인가? 유랑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 통찰에 이르기까지 그는 얼마나 아팠을까.

지구에 온 최초의 유랑족 중 누가 ‘내 땅’이라고 말뚝을 박기 시작했을까. 장 자크 루소는 ‘최초로 말뚝을 박고 내 땅이라고 말한 그자를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내 땅이라고 울타리를 치기 시작하면서 인간 욕망의 발톱은 자라고 자라, 방향을 잃어버리고 오로지 자본의 증식과 소유와 집착과 애착과 권력욕만을 추구하게 되었다. ‘맥베스’처럼. 

펀은 빈집 앞에 오래 서 있거나, 빈집에 들어가 여기저기를 둘러보거나, 유랑에서 만난 노인의 아들집 식탁에 앉아보거나, 노인이 아들과 함께 치던 피아노를 만져보기도 한다. 그곳은 스위트홈(sweet home)이다. 그녀는 지구상에 더 이상 자신을 위한 홈은 없다는 생각을 한다. 하우스, 집은 있다. 선구자, 밴.

어쩜 그녀도 다르위시처럼 인간은 유랑하는 존재라는 통찰에 이르렀는지 모른다. 나는 ‘왜’라고 질문하기 시작하면서 황야로 추방당한 듯했다. 도덕주의자들로부터, 사랑으로부터, 우정으로부터, 자본주의로부터, 심지어 문학으로부터도 말이다. 추방당한 펀은 자연과 지구와 우주만물과 교감하면서 노매드로 거듭난다. 나는 어떻게 거듭날 것인가.  

우리는 모두 우주를 유랑하는 이방인들이다. 하여, 언제나 ‘이방인을 위한 침대’는 비워둬야 한다. 내가, 또한 당신이 바로 이 지구의 이방인이므로.

정영희 작가
정영희 작가

[정영희 작가]
대구 생. 영남대 미대, 동국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대학교 2학년 때 시문학에 단편소설 ‘아내에게 들킨 生’을 발표하고, 1986년 중편소설 ‘무무당의 새’로 동서문학 신인상을 받고 문단에 나왔다. 장편소설 ‘그리운 것은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는다’, ‘무소새의 눈물’, ‘슬픈 잠’, ‘아프로디테의 숲’, ‘아키코’ 등과 소설집 ‘그리운 눈나라’, ‘낮술’ 등을 출간했다. 산문집으로 ‘석복수행 중입니다’, ‘콤플렉스 사용설명서’. ‘굿모닝, 카르마’와 다수의 공저가 있다. 현재 영희역학연구원을 운영하며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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