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시간위의 집>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무서워”라며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가도 이내 손가락을 빼꼼 열고 다음 장면의 궁금증을 해소해야 직성이 풀린다. 호러 영화를 보는 풍경이다.

심리학에선 카타스트로피 이론(작은 변화에 의한 급격한 상태의 파국, 종말)으로 이를 설명한다. ‘손에 땀을 쥐고 본다’는 표현이 대표적이다. 호러영화는 주로 여름에 인기가 좋은데 이렇게 손에 땀을 흘림과 동시에 영화 자체가 주는 공포감으로 체온을 조절하며 긴장과 이완을 반복함으로써 서늘한 느낌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더불어 사람은 상반된 감정의 공존이란 모순된 심리체계를 갖추고 있다고 한다. 호러 영화를 통해 감추고 싶었던 내재된 불쾌감과 공포가 발현되지만 비현실임을 알기에 묘한 쾌감을 느끼고 결말에서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는 것이다. 이는 카오스(혼돈) 이론과 맞아 떨어진다. 최근 가장 세기말적인 지구를 그린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가 인기를 끈 현상이다.

▲ 영화 <시간위의 집> 스틸 이미지

그런 맥락에서 심리 스릴러 스타일의 오컬트 호러 영화 ‘시간위의 집’(임대웅 감독, 페퍼민트앤컴퍼니 배급)은 비록 봄이지만 계절과 상관없이 카타르시스 용도로 적절하다. 또 ‘가정의 달’ 5월을 앞두고 결혼의 책임감과 가족의 소중함에 대해 되짚어 보게 만든다. 근래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물게 성공한 호러 ‘검은 사제들’의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장재현이 시나리오를 썼다. 강력한 미스터리 호러에 진한 모성애를 얹어 두려움과 감동의 눈물을 동시에 자극한다.

1992년. 전 남편을 병으로 잃은 미희(김윤진)는 외아들 효제를 데리고 철중(조재윤)과 재혼한 뒤 그와의 사이에 둘째 지원을 낳고 약간 외진 단독주택에 10년째 살고 있다. 이복형제인 효제와 지원은 전혀 티 나지 않을 정도로 두터운 우애를 과시하고 있지만 철중은 남의 자식인 효제가 내내 못마땅하다.

철중은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거나 심지어는 바람을 피우기까지 하며 미희의 속을 썩이지만 미희는 사랑스런 두 아들을 위해 모든 걸 감내하면서 그들을 잘 키우겠노라 성당에서 주님께 열심히 기도한다.

▲ 영화 <시간위의 집> 스틸 이미지

이 집에 괴이한 일이 연이어 발생한다. 정체불명의 괴한이 들어와 강제로 문을 열려고 하는가 하면 효제와 지원의 방을 차례로 두드려 가족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 그리고 며칠 뒤 지원이 공사장 인근에서 익사한 채 발견되고, 철중의 효제에 대한 미움은 절정에 다다른다.

집에서 뭔가 이상한 기운을 느낀 미희는 유능하다는 지관과 무당을 차례로 불러 그 이유를 알아보지만 그들은 “그냥 이사하라”며 거부감을 보이고, 그러던 중 갑자기 미희가 철중과 효제의 살인범으로 체포된다. 철중은 칼에 맞고 죽었고, 효제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25년 뒤 미희는 가석방돼 폐허가 된 집으로 돌아온다. 과거 미희와 가족의 주변에서 맴돌던 ‘그들’은 이제 노골적으로 미희의 주변에 서성거린다. 그리고 젊은 최 신부(옥택연)가 찾아와 미희를 믿는다며 진실을 파헤치겠다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다. 구청과 경찰서 등을 오가며 각종 자료를 수집한 끝에 그는 일제시절 이 집에 살던 일본군 장성 부부가 실종됐으며 25년 뒤 새로 이사 온 세 모녀 역시 홀연히 사라졌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밝혀내는데.

▲ 영화 <시간위의 집> 스틸 이미지

호러 장르는 당연히 관객의 공포심을 극대화하는 데 가장 공을 들이기 마련이지만 그 심리자극을 극대화하기 위해 반전이란 맥거핀 장치를 동원하는 노력을 간과하지 않는다. 그런 기본기와 노력의 아이디어에서 이 영화는 매우 영리한 구조를 갖췄다.

요즘 영화치곤 길지 않은 러닝타임 100분이 매우 촘촘하게 느껴질 정도로 구성이 쫄깃한 데다 끝까지 관객으로 하여금 ‘오컬트냐, 심리스릴러냐’라는 의문과 더불어 그 결론을 향한 추리에 몰입하게 만드는 플롯의 힘이 강하다. 물론 이는 김윤진과 조재윤이란 탄탄한 연기파 주인공의 텐션이 감독의 의도를 넘칠 만큼 받쳐줬기 때문에 가능했다.

▲ 영화 <시간위의 집> 스틸 이미지

아무래도 강동원과의 비교가 불가피한 옥택연의 존재감도 후반부로 갈수록 커진다. 감독은 주요 등장인물은 물론 사소한 소품과 행동에까지 각자의 묵직한 임무와 캐릭터를 부여함으로써 모든 ‘그림’을 미장센 겸 시퀀스로 만드는 재주를 발휘했다. 그냥 무심코 스쳐지나갔던 평범한 에피소드 몇 개는 나중에 무릎을 탁 치게 만든다.

하우스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포스터의 표현대로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어쩌면 미희의 집일지도 모른다. 제작진이 미술에서 가장 공을 들였다는 적산가옥은 폐가가 된 기괴하고 황량한 현재와 나름대로 아늑하고 단란했지만 탈출해야만 하는 공포의 감옥으로 변한 25년 전의 디테일이 모두 미스터리고 호러다.

▲ 영화 <시간위의 집> 스틸 이미지

집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바로 지하실의 밀폐된 공간과 그 문이다. 왠지 콘크리트로 폐쇄된 이 공간이 미희가 이사 오기 전에 어떤 용도의 장소였고,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으며, 왜 막혀있는지, 이로부터 흘러나오는 음산한 기운의 정체는 뭔지 등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가는 재미가 키포인트.

철중은 프로이트가 가정한 본능의 두 가지 욕구인 성적본능과 공격충동이 매우 강하다. 특히 인간의 행동 중 파괴적 속성을 지닌 죽음의 본능과 연관된 공격충동이 절정이다. 형사인 그가 주로 하는 일은 ‘데모 하는 빨갱이들을 때려잡는 것’이다. 그래서 미희가 침입자를 얘기하자 “보나마나 (내게 반감을 가진) 그 빨갱이 자식들일 것”이라며 이를 간다. 감독은 남자의 폭력성의 극대화(독재, 우경화)를 통해 여성성과 가정의 파괴(분열)라는 경고 메시지를 던진다.

▲ 영화 <시간위의 집> 스틸 이미지

등장인물들은 카오스이론(혼돈 속의 질서-최 신부), 프랙탈이론(부분의 전체에 대한 자기유사성-효제), 퍼지이론(애매함의 수량화-‘그들’), 카타스트로피이론(어떤 요인의 작은 변화로 만든 큰 변화-미희)의 주인공들이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복잡계(작은 사건처럼 보이는 수많은 변수가 유기적, 복합적으로 작용해 큰 영향력을 갖게 되는 체계)고, 결국 각자의 작은 언행 하나엔 의미가 있으며, 이게 나중에 나비효과가 된다. 호러 장르에 탁월한 감독의 역량이 돋보인다.

“죄수들도 모두 주님의 자식들이죠”(최 신부) “제가 그 자식들 틈에서 어떻게 25년을 버틴 줄 아세요? 제 아들을 찾기 위해서죠. 신부에게 주님이 신앙이라면 엄마에겐 자식이 신앙입니다”(미희) 15세 이상 관람 가. 4월 5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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