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옥자>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미국의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정면도전하는 걸로 유명한 봉준호 감독이 미국의 세계 최대 유료 동영상 서비스업체인 넷플릭스로부터 제작비 600억 원을 지원받아 찍은 ‘옥자’(국내배급 N.E.W.)는 어쩌면 아이러니다.

10년 전. 창업주 아버지, 2대 CEO 언니 낸시에 이어 글로벌 기업 미란도의 경영권을 쥔 루시(틸다 스윈튼)는 혁신적인 사업계획을 내놓는다. 칠레 한 농가에서 우연히 발견된 슈퍼돼지의 개체수를 늘려 26마리를 얻었는데 그걸 미란다 지사가 있는 나라의 농가에 각각 분양해 10년간 키운 뒤 가장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생육방식을 채택해 식량을 제공하겠다는 것.​

이 슈퍼돼지는 하마를 능가할 정도의 체구까지 성장하지만 성격이 온순하고 의외로 식사를 적게 함으로써 배설물을 적게 배출하니 친환경적이다. 뭣보다 고기 맛이 기존의 소나 돼지보다 훨씬 우수하면서 개체당 생산육이 엄청나다는 게 장점.​

▲ 영화 <옥자> 스틸 이미지

그 중 한 마리가 강원도 산골 오지에 사는 할아버지 희봉(변희봉)과 4살 손녀 미자(안서현)에게 분양돼 10년이 흐른다. 얼굴이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부모를 일찍 여읜 미자에게 슈퍼돼지는 친구이자 자매였다. 그래서 옥자란 이름을 지어주고 애지중지 키웠다.​

그런데 미란다코리아에 다니는 박문도(윤제문)가 오더니 곧바로 미란다의 ‘얼굴마담’ 역할을 하는 유명 방송인이자 동물학자인 조니 박사(제이크 질렌할)와 촬영팀이 나타난다. 그들은 곧 있을 슈퍼돼지 콘테스트에 옥자가 챔피언으로서 손색이 없다고 결론을 내린 뒤 요란하게 촬영을 하기 시작한다.​

희봉은 미자에게 부모 산소에 좀 갔다 오자고 제안한다. 의심도 없이 따라나선 미자에게 희봉은 지금쯤 옥자가 조니와 함께 서울 미란다코리아로 갔을 것이고, 내일 뉴욕행 비행기에 오른다고 고백하며 금돼지 하나를 건넨다. 기겁한 미자는 집으로 내달려 옥자의 부재를 확인한 후 또다시 미친 듯이 도로 위를 질주하지만 이미 후송차량은 떠난 지 오래.​

▲ 영화 <옥자> 스틸 이미지

어둑해져서야 집에 돌아온 미자는 갑자기 돼지저금통을 깨뜨리고 금돼지까지 챙겨 서울로 향한다. 미란다코리아에 침투한 미자는 천신만고 끝에 옥자를 후송하는 차량에 매달리는데 갑자기 커다란 화물차에 탄 복면의 외국인들이 이 차량을 무력으로 세운다. 그 틈을 타 미자는 옥자와 함께 탈출해 서울 시내를 아수라장으로 만든다.

괴한들은 비밀동물보호단체 ALF 리더 제이(폴 다노)와 그 구성원들. 이들은 옥자와 미자를 구한 뒤 미자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미란다가 옥자의 귀에 장착한 블랙박스 대신 몰래카메라를 설치해 미란다 본사의 만행을 촬영해 세상에 공개하자는 것. 그렇게 옥자는 물론 나머지 슈퍼돼지들도 구하자는 게 목적. 그들은 순순히 옥자를 미란다코리아에 건넨다.​

때마침 옥자와 미자의 난동장면이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에 퍼짐으로써 미자가 졸지에 스타가 되고, 루시는 미자와 옥자의 감동적인 재회장면을 연출함으로써 회사의 이미지를 포장할 아이디어를 짜내 미자에게 1등석 항공권을 보낸다. ALF는 뉴욕 행사 때 몰래카메라로 찍은 처참한 실험실의 영상을 공개하고 미자와 옥자를 빼내는 데 성공하지만 미란다 측이 무시무시한 사설경호단체 블랙초크를 불러들여 상황이 간단하게 진압된다. 이제 옥자는 사람들의 식탁에 오를 운명에 처한다.​

▲ 영화 <옥자> 스틸 이미지

세계 26개국 중 유독 강원도에 방목한 옥자가 최고의 슈퍼돼지로 성장한다는 설정은 다소 억지스럽긴 하지만 14년 동안 세상과 담을 쌓고 깊은 산골에서 자란 미자의 동물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 없이 둘도 없는 소중한 식구로 여길 정도로 순수하다는 캐릭터가 이를 보완하고도 남는다.​

옥자는 유전자 조작에 의해 탄생한 종이라 부모가 없고, 미자 역시 부모의 얼굴도 모르니 고아와 다름없다. 그들은 둘이자 하나다. 그래서 옥자는 벼랑 끝에 매달린 미자를 구하기 위해 몸을 내던지기도 한다. 옥자와 미자의 만남과 역경은 팔자다.

아무래도 잃은 반려동물을 찾아 나서는 ‘플란다스의 개’나 식인괴물을 만든 주한미군의 유독폐기물 불법방류를 고발한 ‘괴물’을 떼려야 뗄 수 없다. 그런데 ‘옥자’는 풍자와 해학이 진일보했고, 폭로는 더욱 직설화법으로 강화됐으며, 전체적인 색감은 우울하면서 동시에 따뜻하다.​

▲ 영화 <옥자> 스틸 이미지

미란다는 돈에 눈먼 대기업 혹은 제국주의의 어긋난 야욕에 불타는 미국이나 일본 등 강대국을 상징한다. 평소 동물과 환경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 감독의 성향과 감성이 스크린 밖으로 뛰쳐나올 듯 용틀임한다는 점에선 확실히 세련됐고, 비주얼은 아름답거나 암울하다.​

매운탕을 먹자는 미자의 말에 옥자는 물에 뛰어들고, 그 충격으로 물고기들이 튕겨 나온다. 미자는 큰 물고기 한 마리만 취하고 나머지 작은 물고기는 도로 물에 넣어준다. 옥자는 방귀를 뀌면서 입수 때 흡입한 작은 물고기들을 방생해준다. ALF 조직원 실버는 힘든 동물구조활동을 하면서 내내 기운이 달린다. 극도의 환경보호주의자인 그는 고기는 물론 웬만한 채소조차도 안 먹고 온종일 굶기 때문이다.

수백, 수천 마리를 가둬놓은 도축장은 흡사 나치의 유대인학살 현장 홀로코스트를 연상케 한다. 루시는 히틀러처럼 프로파간다의 선수다. 전쟁 중 네이팜탄을 개발하고 호수에 유독물질을 불법으로 방류한 선친을 ‘끔찍한 인간’으로 표현하지만 자신은 그보다 더 잔인하고 부도덕하며 대중을 속이는 데 선수다.

▲ 영화 <옥자> 스틸 이미지

옥자와 미자의 종을 뛰어넘는 우정 혹은 사랑이 전편에 넘쳐 자연스런 눈물을 유도하는 ‘멜로드라마’에 다름없지만 액션이 만만치 않다. ‘니키타’나 ‘콜롬비아나’가 연상되는 미자의 고군분투하는 구조의 몸부림은 의외로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액션의 기능을 한다. 특히 을지로 지하상가에서의 액션 신이 슬로모션으로 전개될 때 존 덴버의 사랑의 세레나데 ‘Annie's song’을 삽입한 의도는 진부하지만 효과는 탁월하다.​

영화는 모든 게 극과 극이다. 처절하고 감동적이며, 잔인하고 아름다우며, 극악무도하고 유머러스하다. 특히 메타포와 알레고리를 활용한 코미디가 강점이다. 밥상을 차린 희봉이 산속에서 옥자와 노는 미자를 불러들이는 도구가 스마트폰이 아닌, 강력한 스피커라는 설정은 시골의 ‘이장님 연설’을 연상케 하는 귀여운 장치.​

▲ 영화 <옥자> 촬영 현장

제이크 질렌할은 아예 대놓고 작품 속 코미디 전담 역할임을 드러낸다. 우스꽝스런 콧수염을 붙이고 가볍게 느끼게끔 톤을 높인 목소리를 구사하는 그는 내내 어린이 같은 반바지 차림이다. 희봉이 소박하게 소주를 병뚜껑에 따라 마시는 것도 재미있지만 조니가 아예 병나발을 부는 것도 관객에겐 소소한 즐거움이다. 전형적인 과장된 가벼움이 주는 웃음이다.​

희봉이 까까머리로 등장해 뒷머리가 밋밋한 편두족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과 미자가 ‘효자손’으로 옥자를 긁어주는 장면 역시 한국적 정서다. 외국인에겐 ‘(조선을 암시하는) 숨은 그림 찾기’에 다름 아니다.​

▲ 영화 <옥자> 스틸 이미지

ALF 조직원 K(스티븐 연)가 제이에게 미자의 말을 통역하는 과정에서 속였던 것을 뉘우치며 ‘통역은 신선하다’는 문신을 새긴 것과 이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미자에게 피해를 끼친 것을 제이가 사과하는 방식이 ‘러브 액츄얼리’의 큰 종이에 적은 글씨고백 방식을 빌린 것은 흐뭇한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신 스틸러는 미란다코리아 대형트럭 운전기사 역의 김 군(최우식)이다. 모든 일에 시니컬한 그는 4대보험을 안 들어준 것에 큰 불만을 품고 과감하게 회사에 엿을 먹인다. 청년실업과 비정규직의 폐해에 대한 조롱이다.​

경찰의 추적을 피해 한강에 투신한 ALF 조직원들이 중요한 데이터를 보호하기 위해 지퍼락을 사용하지만 방수가 안 된다고 불평하는 설정이나, 루시가 부하 직원에게 미자를 광고모델로 쓰라고 지시하면서 “베네통 광고의 아시아 소녀처럼 하지 마”라고 주의를 주는 내용 역시 대기업의 이중적 면모를 비판하는 직설화법이다.

루시와 미자의 살구색 변형한복 패션도 의미심장하다. 실제 14살인 안서현의 연기는 정말 놀랍다. 봉 감독이 고아성을 능가할 ‘괴물’ 아역배우를 발굴해냈다. 120분. 12살 이상(이런 훌륭한 교과서적 필름은 모두에게 볼 기회를 줘야 한다). 6월 29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