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표석 따라 서울 톺아보기] 이 칼럼은 2023년도 서울시 비영리민간단체 공익활동지원사업 일환으로 문화지평이 진행하는 ‘표석이 품은 소멸문화유적을 따라 톺아보는 서울 역사’ 일곱 번째 마지막 답사기다.                         

‘표석(標石)’은 현존하지 않는 역사적 장소, 또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사건이 발생한 공간에 설치한 표지물이다. 서울시 역사문화유적 표석은 1985년 ‘역사문화유적지 기념표석 신설 및 정비계획’에 의해 처음 설치돼 2023년 1월 현재 335개에 이른다. 신설, 철거, 이전 등으로 설치 개수와 위치는 유동적이다.                          

문화지평은 지난 11월 19일 오전 10시 30분 서울도서관을 출발해 서울역까지 ‘항일 무장투쟁의 표석길’을 답사했다. 표석을 중심으로 주변 역사문화, 생태경관, 산업관광자원을 함께 둘러봤다. 올 비영리민간단체공익활동지원사업 ‘표석이 품은 소멸문화유적을 따라 톺아보는 서울 역사’는 이번 답사를 마지막으로 성공리에 마무리했다. <편집자 주>                    

2023년도 서울시 비영리민간단체 공익활동지원사업 일환으로 문화지평이 진행하는 ‘표석이 품은 소멸문화유적을 따라 톺아보는 서울 역사’ 7차 답사 웹포스터. 
2023년도 서울시 비영리민간단체 공익활동지원사업 일환으로 문화지평이 진행하는 ‘표석이 품은 소멸문화유적을 따라 톺아보는 서울 역사’ 7차 답사 웹포스터. 

이번 답사 예상 경로는 부민관폭파의거터, 시위병영터, 이충순자결터, 정미의병발원터, (숭례문:남대문전투), 대한민국임시정부서울연통부터, 독립신문사터, 3.1운동기념터(서울역), 3.1운동기념터(구 세브란스병원) 표석이다. 해설은 역사문화해설사인 배건욱 씨가 맡았다.            

배 해설사는 서울KYC 대표를 지내고 한양도성길라잡이 백악구간 해설을 담당하는 서울역사학 전문가다. 한양도성과 독립운동사, 몽양 여운형 등에 대해 해박한 전문성을 가지고 있다.      

집결 장소는 구 서울시청사 건물, 현재는 서울 도서관으로 사용 중인 바로 그곳이다. 겨울 하면 떠오르는 시청 광장 스케이트장을 조성 중인 건지, 연말답게 크리스마스 트리를 설치 중인 건지, 높다란 펜스로 가로막힌 광장이 조금은 갑갑해 보였다. 갇힌 문을 조심스레 열고 도서관에 들어선 게 얼마만인지.     

얼핏 보아도 오래된 흔적이 역력한 서울 도서관 건물은 한 때 경성부 청사로 사용됐다. 1926년 준공이라는 안내 표지판에 손가락을 사용해 햇수를 헤아렸다. 100년을 채우려면 몇 년 아니 남았다. 물론 100이라는 숫자 자체가 어마어마하지만, 당시는 일제의 지배가 견고해지던 때였다.      

일제 입장에선 혼란과도 같았을 3.1 운동도 잘 정리(!)했겠다. 그들로선 안정적으로 도시 확장에 열을 올리기에 적절했을 거다. 당시로선 매우 멋들어지게 쌓아 올렸을 많은 건물들이 친일 잔재라는 이유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나, 경성부 청사만은 도서관이 되어 오늘날에도 나름의 역할을 수행 중이다.      

굴욕의 역사를 삭제하는 게 바람직한지 여부를 두고 한동안 논란이 있었다. 흔적을 없애려든 엄연히 존재하는 역사 자체가 날아가는 건 결코 아니다. 역사를 어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옳은지 심사숙고가 필요하다.     

서울도서관을 출발한 답사팀은 그리 멀리 가지 않아 다음 목적지에 도달했다. 길 하나를 건너 서울시의회 건물 앞에 서자 ‘부민관 폭파의거터’ 표석을 마주할 수 있었다. 표석에는 ‘부민관 폭파 의거는 1945년 7월 24일 류만수, 강윤국, 조문기 세 청년의사가 부민관에서 친일부역자 박춘금 일당이 한국인들을 일본의 침략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아시아민족분격대회’를 개최하자 행사장에 폭탄을 터뜨린 사건이다.‘고 적혀 있다.      

부민관이라는 명칭은 경성부의 '부'로부터 비롯됐다. 이곳 역시 서울 도서관 건물과 마찬가지로 일제의 야욕이 한껏 영향을 미쳤다. 때는 1930년대 중후반 우리나라 지배에 만족 못한 일제는 중국 본토를 본격적으로 공략하기 시작했다. 1937-8년 경에는 이광수, 모윤숙 등 유명인사들이 대거 대중집회 연단에 몰라 전쟁 참여를 독려하며 젊은이들을 사지로 몰아넣기도 했다.      

미국은 일제의 이러한 움직임을 부담스러워 했다. 그들이 과연 본토 공격 가능성을 우려했는지 여부는 알 길 없으나, 일제는 욕심이 과한 나머지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1944년 이미 많은 이들이 광복 이후를 고민했다. 우리 손으로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필요성은 애국청년당 등 정당의 창당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일본식 표현이라 조금은 어색한데, '아시아민족분격대회' 장에서 폭탄이 터진 것도 이와 같은 움직임의 일환이었다. 계획했던 때보다 조금은 이른 시점에, 주최 측이 도화선을 잘못 건드렸다. 의도했던 것보다는 파괴력이 미약했으니 준비했던 측으로서는 아쉬움이 컸을 것이다. 성패도 물론 중요는 하나, 누구도 다 익은 감이 떨어지는 모양새는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뜨거운 도가니 같은 열강 각축장 정동

‘정미의병 발원터’를 중심으로 단체사진을 찍는 모습.
‘정미의병 발원터’를 중심으로 단체사진을 찍는 모습.

열등하다는 세간의 손가락질은 많은 이들이 기울인 노력을 무시하는 처사라 하겠다. 또 다른 장소로의 이동에 앞서 바로 옆 세실극장 건물 옥상 정원에 잠시 올랐다. 덕수궁 정관헌과 서울주교좌성당이 코앞에 보이는 명당 중의 명당이었다.      

머지않은 곳에 영국 대사관저가 있었다. 지금이야 문화재지, 과거 덕수궁은 청와대 못지않은 혹은 그보다 훨씬 중요한 공간이었다. 외세에 의해 원치 않는 문호개방을 당한 직후, 호시탐탐 이 땅을 노리던 세력들, 특히 기독교 등 종교가 향한 곳이 바로 정동 일대였다. 대사관저도 대거 들어왔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이 외교관을 상실하게 됨에 따라 일본의 동맹국인 영국과 미국을 제외한 나머지 대사관들은 철수를 했다. 이와 같은 연유로 영국 대사관저가 지금의 위치에 남아 있게 됐다. 역사가 결코 과거 어느 한 시점에 단절된 무언가가 아니라는 걸, 대사관저 건물의 위치가 제대로 말해주는 듯했다. 서울도서관 안에 있을 땐 미처 보지 못했던 서울시청 신청사 건물이 길 건너편으로 뚜렷이 보였다. 이는 동대문DDP, 새빛둥둥섬 등과 더불어 현  오세훈 서울시장의 작품이다. 건물 하나당 4000천억에서 많게는 6000천억 원에 달하는 막대한 비용이 소요됐다.      

공모를 거쳤으나 실제 건축 과정에서는 설계 변경이 있었고, 무엇보다 외적 아름다움 추구에 치중한 나머지 실용적으로는 부족이라는 단점을 낳기도 했다. 실제 서울시는 신청사 건립에도 불구하고 사무 공간이 부족해 여기저기 부서가 흩어져 업무를 보고 있는 실정이다.     

살짝 덕수궁 안으로 뻗은 산책로를 걸었다. 원래는 월산대군의 집이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임시거처로 사용되면서 궁의 지위를 얻게 됐고 '경운궁'이란 명칭으로 오랜 기간 불렸다. 덕수궁은 대한제국이 탄생한 공간이기도 하다. 대한제국이라 하니 우유부단했던 군주 고종 생각이 물씬 났다.      

흥선대원군의 섭정으로부터 자유를 얻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했다. 겨우 왕으로서의 목소리를 낼 법한 상황에 이르렀을 땐 이미 열강의 각축이 치열해진 후였다. 러시아와 일본이 힘겨루기를 하는 와중에 그의 선택은 러시아였다.      

이는 훗날 독립협회와의 갈등 원인이 되기도 했다. 물론 독립협회의 한계로 분명하다. 민중과 호흡하고 소통하는 역할을 수행하기에 독립협회 회원들은 심히 고결했다. 그래도 세상 흐름을 적어도 방향만큼은 제대로 읽었던 그들이 보다 힘을 발휘했더라면 우리의 역사가 조금 덜 구슬프지 않았을까 싶어 아쉽다.     

걸음은 한 때 배재 고등학교가 있었던 자리까지 이어졌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 러시아와 수교를 맺었다. 러시아대사관이 이 근방에 들어선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원래는 구 러시아 공사관 자리를 탐했던 듯하다. 제국주의의 그릇됨을 부르짖는 건 약자의 몫 같다. 그로 인해 수혜를 본 이들은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는 일에 박하다.      

러시아 대사관 쪽으로 뻗은 길 앞 J.P.MORGAN이 새겨진 조형물이 놓여 있어 이색적이었다. 서울 노른자위에 언제 이리 자리를 잡은 건지, 그들의 날렵함이 놀라웠다. 참고로 배재학당은 현재 동관만이 남아 있다. 서관은 배재 고등학교가 위치한 명일동으로 이전한 상태다. 건물 뒤편에서 독립신문사터임을 알리는 표석을 볼 수 있었다.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뿔뿔이 흩어졌을 때, 서재필 또한 미국으로 이주해 의학을 공부했다. 미래가 암담하다고 여겼지만 김옥균을 제외한 대다수가 다시금 조정의 부름을 받았다. 중추원 고문 등 유력 자리를 역임하는 건 물론, 독립신문 창간 등에도 힘을 쏟으며 나름의 역사를 써 내려갈 수 있었다.      

독립신문에 대해서는 제도권교육을 받은 이들이라면 다들 익히 들어보았을 것이다. 예로부터 글은 소수 지배계층만의 전유물이었다. 우리에겐 일찌감치 세종대왕이 발명한 훈민정음이 있긴 하였으나, 유학자들은 이의 가치를 좀체 인정치 않았다. 독립신문은 한글판 발간으로 많은 이들에게 읽혔다. 한 부가 팔려 나가면 구입한 이는 물론 주변의 여럿이 나눠 읽었는지라 기록된 발간부수에 비해 그 파급력이 상당했다. 독립신문이 시 서울인 한양을 'SEOUL'이라 영문 표기했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다. 문득, 서울이 언제부터 서울이라 불리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각종 공사로 인해 표석 3개나 ‘오리무중’

경복궁 궁궐길라잡이이자 우리 역사문화에 조예가 깊은 오수잔나 씨가 ‘시위병영터’ 표석 있던 자리를 가리키고 있다. 이번 답사에서는 표석 3개를 공사 때문에 볼 수 없었다.
경복궁 궁궐길라잡이이자 우리 역사문화에 조예가 깊은 오수잔나 씨가 ‘시위병영터’ 표석 있던 자리를 가리키고 있다. 이번 답사에서는 표석 3개를 공사 때문에 볼 수 없었다.

알게 모르게 주변이 공사판이었다. 펜스를 두름에 있어 표석에 대한 고려는 없었던 모양이다. 동화약방 자리에 놓여 있었다는 ‘서울연통부’터 표석을 비롯하여, ‘이중순자결터’, ‘시위대병영터’ 등을 알리는 표석을 볼 수 없었다. 펜스 뒤에 고스란히 놓여 있는지, 잠시 제거해 다른 곳으로 옮겨 놓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서울연통부 표석은 지난 1995년 서울시는 광복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동화약품의 창립지(서울특별시 중구 서소문로9길 14)가 위치하고 있는 자리에 기념비를 세웠다. 당시 대한매일신보 사옥 복원과 항일 독립운동가 집터 등의 표석 설치와 함께 서울의 근대문화유적지로 거듭나기에 이른 것이다.      

기념비에는 ‘서울연통부’의 활약상과 설립 의의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서울 연통부는 삼일 운동 직후에 체계화된 독립운동을 위해 수립된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국내와의 연락을 위해 만들어진 비밀 단체이다. 당시 동화약방(現 동화약품)의 사장이었던 민강 선생이 행정 책임자를 맡아 국내외 연락을 담당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활동을 했다.      

일제 강점기 당시 활명수 한 병 값은 50전. 이는 설렁탕 두 그릇에 막걸리 한 말 가격과 맞먹었다. 독립운동가들은 중국으로 갈 때 활명수를 가져다가 현지에서 비싸게 팔아 자금을 마련했다고 전해진다.     

호암아트홀 리모델링 공사로 세종대로7길 쪽 화단 앞 보도에 있어야 할 ‘이충순 자결 터’ 표석은 어디로 사라진 지 보이질 않는다. 요즘은 공사를 하면 도로점용허가증을 공사장 가림막 외벽에 붙여 놓는다. 허가조건을 세세하게 명시하게 돼 있는 데, 차제에는 표석의 이동 여부와 이동 시 위치까지 적시해서 만의 하나 분실을 막아야 하겠다.       

당장 확인 할 순 없지만 표석에는 ‘구한국군 시위대 참위 이충순(李忠純 1877-1907)이 군대 강제해산에 저항, 서소문에서 대일(對日) 시가전을 전개하다가 장렬히 자결 순국한 곳.’이라 적혀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검색에는 ‘이충순은 대한제국기 육군 보병 참위 출신의 의병이다. 1903년 육군무관학교 졸업 후 임관되어 몇 차례 전임된 후 1907년에는 서울시위대로 근무하였다. 1907년 8월 한국군의 강제해산령이 내리자 이에 불복하여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와 제2연대 제1대대가 합세하여 일본군과 교전하던 중 사망하였다.’고 나온다.      

자결과 교전 중 사망으로 역사적 사실이 엇갈린다. 서울시의 표석은 ‘자결 터’로 명시하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국책연구기관이다. 사실을 좀 더 연구해서 바로잡히길 바란다.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한 평가가 너무 크게 엇갈린다. 그의 희생의 값은 변함이 없을지라도.         

저 멀리 서울의 몇 안 남은 철길 건널목이 보인다. 그 옆쪽으로는 만초천 위에 지어졌다는 서소문 아파트가 있었다. 서소문 아파트는 앞선 여러 번의 답사를 통해 그 존재를 알고 있었다. 건물 자체는 낡았으나, 1층에는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맛집들이 대거 입점해 있는 매우 레트로한 공간으로 서소문아파트를 기억하고 있다. 충정로아파트도 그러하거니와 서소문 아파트도 개발 길이 열렸다는 소식을 얼마 전 접했다.   

표석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 장소에 깃든 이야기는 무척이나 심오했다. 일제는 치밀하게 조선, 더 나아가 대한제국의 모든 걸 야금야금 먹어 치웠는데, 그중엔 군대도 있었다. 한 때 5000명에 달했던 국왕의 친위대는 차츰 규모가 작아진 끝에 무장해제를 당했고, 을사늑약 이후로는 일제의 입맛대로 독립군 탄압에 앞장서기도 했다.      

모든 군인이 일제의 명령을 곧이곧대로 이행했던 건 아니었으니, 무기를 탈취해 일본 군대에 맞선 이들도 있었다. 특히 시위대 대대장이었던 박승환 자결 소식이 전해졌을 무렵 의병에 가담한 이들의 수가 급증했으니, 우리는 그들을 정미의병이라 부른다.      

대한상의 근처에 있는 ‘정미의병 발원터‘ 표석으로 사라진 아쉬움을 달랬다. 표석에는 ’1907년 군대 해산령에 분격, 朴昇煥 대대장이 자살하자 한국 군인들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의병투쟁을 격화시킨 곳.‘이라고 쓰여 있다.      

세브란스병원·서울역은 3.1운동 기념터

서울역 광장 강우규 의사 동상 앞에서 ‘항일 무장투쟁의 표석길 답사’를 마치면서 문화지평의 ‘2023 서울시민간단체공익활동지원사업’도 마무리했다.
서울역 광장 강우규 의사 동상 앞에서 ‘항일 무장투쟁의 표석길 답사’를 마치면서 문화지평의 ‘2023 서울시민간단체공익활동지원사업’도 마무리했다.

서울역과 부쩍 가까워졌다. 답사의 끝을 얼마 아니 앞둔 시점에서 연대세브란스 빌딩을 마주했다. 연세대학교는 신촌에 있는데 어찌 이곳에 세브란스 빌딩이 놓였는지 그간 의아함이 컸다. 원래 세브란스와 연희전문학교는 따로 있었다. 세브란스 빌딩 자리는 1900년 세브란스 기부금으로 지어진 병원이 있던 곳이다.      

세브란스병원은 딜쿠샤 주인인 앨버트-메리 테일러 부부와 연관이 있는 장소다. 3.1 운동이 발발하기 직전, 아이 출산을 위해 병원에 입원한 메리 테일러의 침대 밑으로 3.1운동 전단지를 간호사가 숨겼다는 이야기는 무척이나 유명하다. 만일 메리가 그 시점에 병원에 입원하지 않았더라면, 통신원인 앨버트 테일러에 의해 3.1 운동 소식이 세계에 전파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서울역 바로 옆이긴 하나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을 법한 자리에 이날의 마지막 표석인 '3.1독립운동기념터' 표석이 놓여 있다. 3.1운동 자체가 3월 1일 단 하루에 끝난 운동은 아니었다. 표석은 3월 5일 2차로 벌어졌던 대규모 시위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3.1 운동을 기점으로 일제는 통치 방식을 변경한다. 그간 모든 걸 마구잡이로 억눌러 왔던 방식을 폐기하고 기만적인 문화통치를 펼쳤다. 사이토 총독의 부임 또한 이러한 변화 속에 이루어진 일이다.   

새 총독은 환영받지 못했다. 서울역 광장서 동상으로 만나볼 수 있는 강우규 열사는 신문을 통해 새 총독의 부임 소식을 접하고는 폭탄을 구해 투척하기에 이르렀다. 상대적으로 고령이어서 일경의 감시가 소홀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의거는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그는 악명 높은 한인 경찰 중 한 명이었을 김태식에 의해 검거돼 사형을 당했다. 서울역 광장 강우규 의사 동상 아래서 7회차 답사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참고문헌>
- 2023년 역사문화유적 표석 정비 계획, 서울시 문화재정책과, 2023
- 서울시 표석현황, 서울시 역사문화재과, 2022
- 디지털 인문학과 시민 교양 : 서울시 역사문화유적 표석 관련 사료 디지털화의 필요성 및 그 방안, 장진엽 성신여대 한문교육과 조교수, 2022
- 역사문화유적 표석 :사료조사 상․하, 연세대산학협력단, 서울특별시, 2019
- 역사문화유적 표석 사료집, 서울특별시 역사문화재과, 2015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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