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표석 따라 서울 톺아보기] 이 칼럼은 2023년도 서울시 비영리민간단체 공익활동지원사업 일환으로 문화지평이 진행하는 ‘표석이 품은 소멸문화유적을 따라 톺아보는 서울 역사’ 다섯 번째 답사기다.               

‘표석(標石)’은 현존하지 않는 역사적 장소, 또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사건이 발생한 공간에 설치한 표지물이다. 서울시 역사문화유적 표석은 1985년 ‘역사문화유적지 기념표석 신설 및 정비계획’에 의해 처음 설치돼 2023년 1월 현재 335개에 이른다. 신설, 철거, 이전 등으로 설치 개수와 위치는 유동적이다.                

문화지평은 지난 10월 1일 오후 4시 종각을 출발해 명동성당까지 ‘3.1운동과 항일의 항일독립의 표석길’ 남측 길을 표석을 중심으로 주변 역사문화, 생태경관, 산업관광자원 등을 함께 둘러봤다. 표석 답사는 모두 7회 진행된다. <편집자 주>          

2023년도 서울시 비영리민간단체 공익활동지원사업 일환으로 문화지평이 진행하는 ‘표석이 품은 소멸문화유적을 따라 톺아보는 서울 역사’ 5차 답사 웹포스터.               
2023년도 서울시 비영리민간단체 공익활동지원사업 일환으로 문화지평이 진행하는 ‘표석이 품은 소멸문화유적을 따라 톺아보는 서울 역사’ 5차 답사 웹포스터.               

이번 답사 예상 경로는 황성신문터, 조선일보창간사옥터, 신문관·조선광문회터, 나석주의사의거기념터, 이회영·이시영6형제집터, 이재명의사의거터, 김익상의거 터, 이회영기념관 등 보신각 기준 남쪽 지역 표석 자원이다. 해설은 국내 표석길 연구와 답사 권위자인 김태휘 해설사가 맡았다.      

 이번 해설을 맡은 김 해설사는 프랑스 소르본대학에서 조경학 박사를 마치고 돌아와 건축문화와 역사, 환경 등에 대한 해설을 하는 역사인문학자다. 창덕궁‧의릉 궁궐길라잡이, 한양도성 시민순성관으로 있으면서 생태와 건축, 역사 분야를 전문으로 하고 있다.     

특히 이번 답사 주제인 표석과 관련 ‘표석을 따라 경성을 거닐다’, ‘표석을 따라 한성을 거닐다’, ‘표석을 따라 제국에서 민국으로 걷다’, ‘표석을 따라 서울을 거닐다’ 등 총 4권의 공저를 집필한 표석 전문가다.     

답사는 ‘3.1운동과 항일독립의 표석길’ 북측 답사에 이은 두 번째다. 북측 답사는 종각을 기준으로 북쪽 지역을 지난 5월27일 배건욱 해설사가 운현궁 건너편 독립선언문배부터 표석부터 조계산 뒤편 수송공원까지 걸었다.      

남측 답사는 종각에서 시작해 명동성당까지 가면서 3.1운동과 항일독립운동 흔적 위에 새겨진 표석을 따라 걸었다. 초가을 걷기 좋은 쾌청한 날씨 덕에 종각에는 많은 답사객이 모여들었다.       

종각은 과거 운종가의 중심으로 인파가 몰리던 곳이다. 따라서 3.1운동의 거점이 될 수밖에 없는 곳이다. 그래서 ‘3․1독립운동기념터;보신각앞’이란 표석이 서 있다. 표석에는 ‘1919년 3·1독립만세 시위의 중심지로 4.23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한성정부(漢城政府)를 선포한 곳.’이라고 쓰여 있다. 3월 1일 종각 타종을 시작으로 서울지역 3·1독립만세시위의 상징적 구심점이 된 곳이다. 학생단 주도로 제2차 대규모 시위가 있었던 3월 5일 남대문역 광장에서 여러 갈래로 나뉘어졌던 시위대는 정오경 이곳에 모여 독립연설회를 개최했다. 3월 9일부터 상인들의 동맹철시가 단행될 때도 종각이 중심지가 됐다.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 성격의 한성정부의 수립을 선포하는 4월 23일의 국민대회도 이곳에서 열렸다. 국내 ‘13도 대표’ 25명의 명의로 배포된 한성정부 선포 문건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당시 ‘한성정부’의 법통을 주장하는 근거가 됐다.      

보신각은 3.1독립만세운동 중심지 

‘3.1운동과 항일의 항일독립의 표석길’ 남측 길 답사를 시작하면서 만세운동 중심지 종각(보신각)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3.1운동과 항일의 항일독립의 표석길’ 남측 길 답사를 시작하면서 만세운동 중심지 종각(보신각)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종각과 3.1운동에 얽힌 이야기를 마치고 영풍문고 쪽으로 길을 건넜다. 그곳에는 녹두장군 전봉준의 앉은 모습의 동상이 있다. 동학농민운동 주동자로 1894년 12월 체포돼 교자에 포박돼 한성부로 압송되는 모습을 본 딴 것이다.      

전봉준은 개항기 동학 접주, 동학농민군 대장 등을 역임한 지도자다. 1855년(철종 6)에 태어나 1895년(고종 32)에 사망해 항일운동과는 관련이 없다. 다만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이 극심하자 1894년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했고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구국의 기치 아래 다시 봉기하는 등 폭정과 외세에 저항했다는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다.      

영풍문고 자리는 과거 감옥인 전옥서가 있던 곳으로 ‘전옥서터’ 표석이 있다. 표석에는 ‘조선시대에 죄인을 수감하였던 감옥으로 한말 항일의병들이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곳’이라고 적혀 있다.       

전옥서터 표석 가까이 ‘황성신문터’ 표석이 서 있다. 표석에는 ‘황성신문은 1898년 남궁억 등이 창간한 국한문 혼용의 애국계몽 일간지로서 국권을 수호하고 국민을 계몽하였다.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이란 통분 논설을 게재하였다가 정간 당하였다.’고 새겨져 있다.      

국한문 혼용이라고 했지만 거의 한자에 한글로 토를 달았다. 당시 독립신문 이후 여러 신문들이 순 한글로 제작되던 전통을 거슬렀지만 한학을 기반하는 식자층 독자층을 확보할 수 있다. 1900년 1월5일부터 로이터 통신 협약 기사를 내보내는 등 일찍이 외신을 빠른 시간에 보도했다. 심한 경영난을 겪다가 1910년 한일강제병합 후 제호가 강제로 ‘한성신문’으로 변경됐다. 약 보름 정도 방행하다가 문을 닫았다. 민족의식의 고취와 문명개화 선구자로서 많은 공헌을 한 민족지로서 평가받고 있다.      

답사팀은 광교 아래 청계천 변으로 내려가 광교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다. 흔히들 광교라 부르는 광통교도 표석이 있다. 물론 서울시가 세운 표석이 아니라서 이번 표석답사와는 관련이 없다. 광통교는 조선 태조 때 만든 흙다리(토교)였으나 홍수로 무너지자 1410년 돌다리(석교)로 고쳐 세웠다. 이때 다리 건설에 사용한 돌은 태종(이방원)의 계모 신덕왕후가 묻혔던 정릉에서 가져왔다. 태종이 신덕왕후를 미워한 역사의 흔적이다. 지금도 일부러 거꾸로 쓴 부재들이 여럿 보인다.      

을지로 SKT타워 앞에는 ‘신문관·조선광문회터’ 표석이 있다. 표석에는 ‘신문관은 최남선이 1908년에 설립한 출판사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잡지 『소년(少年)』 을 발행하였다. 최남선, 박은식 등은 1910년 신문관에 조선광문회를 설립하여 수많은 고전을 간행하였다.’고 적혀 있다.      

영문도 병기돼 있다. ‘Founded in 1908 by Choe Nam-seon, the Sinmungwan Publishing Company published Sonyeon (Boys), Korea’s first modern magazine. In 1910, Choe and other intellectuals, including Park Eun-sik, established an in-house organization known as Joseon gwangmunhoe(Korean Association for Cultural Enlightenment), which published a wide variety of literary classics.‘라고 적혀있다.    

궁궐길라잡이 경복궁 외국어 해설담당인 오수잔나 씨는 각종 문화재 등 영문 해설 오류에 대해 늘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최소한의 검수 과정을 거친 것인지 의심이 드는 영문 해설이 차고 넘친다는 지적이다. 글쓴이, 교정 교열, 검수 등 적어도 세 단계를 거친 해설을 통해 오류를 줄여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그는 문화지평 답사에 나와 영문은 물론 중문, 일문 해설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김 해설사는 신문관에 대해 신문관은 1910년부터 19년까지의 언론·출판·결사·집회 등의 자유가 전혀 보장되지 않은 암흑기에 폭넓은 출판활동을 한 곳“이라며 ”잊혀져가는 우리 문화의 발굴, 전승과 창달을 위해 노력함으로써 민족정신의 고취와 대중계몽교육의 선구자로서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고 설명했다.      

이어 답사팀은 ‘나석주의사 의거기념터’ 표석 앞에 다다랐다. 김 해설사는 표석 설명에 앞서 맞은편 빌딩에 대한 해설을 꺼냈다. 외환은행 옆에 외벽에 도자기 작품이 수 놓인 오양빌딩은 건축가 김수근(1931~1986)이 설계를 맡아 1964년에 준공한 건물이다.      

노출콘크리트와 전면부 전체를 뒤덮고 있는 장식이 인상적인 건축물로 도자기 장식은 화가, 서양화가, 판화가, 도예가로 활동한 현대 미술가 정규(1923-1971)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외벽에 한국의 도자기와 소품 등 한국적 전통을 살린 예술성이 담겨 있으며 콘크리트의 질감과 도조 장식에 의해 예술적 가치가 돋보이는 건축물로 명동을 방문하는 관광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김 해설사는 “1960년대 한국의 건축 양식을 알 수 있는 건축물임과 동시에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김수근이 한국 전통과 서양건축을 접목시켜 탄생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은 쌍용빌딩이란 이름으로 상가건물로 이용 중이며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의열단 나석주 식산은행·동척에 투탄 후 자결 

옛 동양척식주식회사 자리에 세워진 KEB하나은행 본점 명동9길 쪽 화단에 있는 나석주 의사 동상 앞에서 해설을 듣는 답사팀. 
옛 동양척식주식회사 자리에 세워진 KEB하나은행 본점 명동9길 쪽 화단에 있는 나석주 의사 동상 앞에서 해설을 듣는 답사팀. 

 김 해설사는 나석주 의사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갔다. 의거기념터 표석에는 ‘1926년 12월, 나석주 의사가 일제 동양척식회사(東洋拓植會社)에 투탄(投彈)하고 일본경찰과 총격전 중 자결한 곳’이라고 쓰여 있다.      

나석주는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며 의열 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다.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의열 투쟁을 벌이다가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 경무국 경호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의열단과 한국노병회에 가입해 활약하다가 김창숙이 제공한 자금을 기반으로 경성에 들어와 폭탄 투척 항일운동을 했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 만주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로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했다. 의열단 창단 당시의 단원은 대체로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중심이 됐다,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에 걸쳐 민족주의 급진파를 표방하는 단체로 변모했다.      

나석주는 1926년 12월 28일 오후 2시경 동척과 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했다. 의열단이 그동안 계획한 여러 차례의 암살 파괴공작이 실패한 뒤 모처럼 성공한 거사란 평가다. 먼저 식산은행에 들어가 폭탄 1개를 던지고, 다시 동척으로 들어가 폭탄을 투척하고 권총을 난사했다. 일경의 추적 도중 권총으로 자결했다.     

나석주의사 의거기념터 표석을 지나 하나은행을 끼고 우회전하면 ‘장악원터’ 표석과 ‘김범우집터’를 알리는 천주교 순례길 표지판이 나온다. 장악원터는 ‘음악의 편찬 교육 행정을 맡았던 조선왕조 관아 자리’라고 설명돼 있다. 김범우는 한국 최초의 천주교 증거자로 기록된 인물이다. 김범우 집에서 모인 신자들 중심으로 ‘명례방공동체’란 신앙공동체가 만들어졌고 이승훈, 이벽, 정약용 등 주요 천주교 관련자들이었다.      

이회영·이시영6형제집터 표석을 가기 전 ‘우당 이회영 길’이란 중구청에서 세운 표지판을 만날 수 있다. 정식 도로명은 중구 명동11길이다. 이곳은 이회영 선생이 살았던 집터로 현재는 YWCA 건물이 들어섰고 건물 앞에는 이회영 생가터임을 알리는 표석과 흉상이 위치하고 있다.     

당대 손꼽히는 거부였던 이회영 선생 가문은 우리 역사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대표 집안이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명동과 남대문 일대의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6형제 60명에 달하는 가족 모두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이곳에서 10년 동안 3500여명의 독립군 지도자를 양성해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2017년 우당 선생의 탄생 150주년을 맞이해 중구청은 이회영 선생의 정신을 지속적으로 기념하고 기리고자 이곳에 ‘우당 이회영길’이라는 명예도로명을 부여했다. 도로를 따라 명동성당 쪽으로 오르다 보면 ‘이회영·이시영6형제집터’ 표석이 나온다. 

독립운동의 대명사 우당 일가 흔적의 길

이회영·이시영6형제집터 표석이 있는 길은 ‘우당 이회영 길’로 명예도로로 명명됐고  그들이 살았던 집터 표석과 흉상이 위치하고 있다. 
이회영·이시영6형제집터 표석이 있는 길은 ‘우당 이회영 길’로 명예도로로 명명됐고  그들이 살았던 집터 표석과 흉상이 위치하고 있다. 

표석에는 ‘독립운동가 이회영(1867~1932)과 이시영(1869~1953)은 1910년 건영·석영·철영·호영 등 나머지 4형제와 함께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 지도자를 양성하였다. 이회영은 1932년 일본군사령관 사살을 계획하다가 체포되어 고문으로 순국하였고, 이시영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에 재임한 후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고 적혀 있다.  

이회영은 다방면으로 활발한 독립운동을 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신민회 활동이다.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는 많은 학교를 세워 교육을 통한 구국활동을 했다. 독립군 양성운동과 계몽·강연·출판 등으로 국민들의 애국심과 국권회복 의식 등을 고취시켰다. 신민회의 독립군 양성운동은 신흥무관학교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 밖에도 민족교육을 위한 서전서숙과 상동청년학원 개설, 교민자치단체 경학사 조직, 항일구국연맹 조직 등 이회영은 독립운동에 평생을 헌신했다.      

이시영은 1905년 외부 교섭국장에 임명됐으나 을사늑약을 계기로 사직했다. 이후 평안남도관찰사, 중추원의관, 한성재판소장 등을 역임하면서 안창호·전덕기·이회영 등과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다.     

국권을 빼앗긴 후 신민회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 계획에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신흥강습소를 신흥무관학교로 확대·발전시켰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북경에서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초대 법무총장과 재무총장, 국무위원 등을 역임했다. 광복 후 고국으로 돌아와 1948년 7월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에 당선됐으나 이승만 통치에는 반대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 됐다.       

이회영, 이시영이 살단 집터는 지금의 중구 명동13길 27-5 일대에 해당한다. 지금은 당시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고 그 자리에 빌딩 등이 들어서 있다.     

답사팀은 명동성당 입구에 다다랐다. 답사의 마지막 코스다. 명동성당 입구 왼쪽 편 도로 가운데쯤에 ‘이재명 의사 의거터’가 있다. 표석에는 ‘이재명(1890~1910)은 친일 매국노인 이완용(李完用)을 척살하려 한 독립운동가이다. 평북 선천 출생으로, 1909년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을 마치고 나오는 이완용을 칼로 찔렀으나, 복부와 어깨에 중상만 입히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이듬해 순국하였다.’고 쓰여 있다.      

이재명은 평양의 일신학교를 졸업하고, 1904년 미국노동 이민회사의 모집에 응해 하와이로 갔다가 1906년 3월에 공부를 더 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그러나 곧 제 1·2차 한일협약이 강제 체결되자 항일운동을 위해 귀국 후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갔다. 그러던 중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순종의 평양 순행 소식을 듣고 귀국했다.      

1909년 1월 동지들과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고자 평양역에 대기했으나 안창호의 만류로 단념했다. 이어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소식을 듣고 친일매국노 처단 차원에서 이완용을 찌른 것이다. 명동성당에 올라 미사가 열리는 성당 내부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공식 답사는 성당 뒤편에서 모두 마쳤다.       

일부 인원은 조금 더 걸어 ‘조선일보 창간사옥터’와 ‘대한천일은행 본점터’를 둘러봤다. 조선일보 창간 사옥터 표석에는 ‘1920년 3월 5일 창간한 조선일보사 사옥 터. 조선일보는 3·1운동 이후 민족 자본으로 이곳에서 창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쓰여 있다. 그 문구가 유효한 지는 곱씹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일제 강점기 조선일보가 보인 행태 때문이다.       

대한천일은행 본점터 표석에는 ‘1899년에 창립한 민족계 근대은행으로 오늘날 우리은행의 전신이다. 창립 초기에는 대한제국의 중앙은행 역할을 하였으며, 우리 고유의 회계법인 송도사개치부법을 사용하였다. 1906년 이후에는 일반은행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라고 새겨져 있다.      

천일은행은 근대적 금융기관의 선구가 되는 민족계 은행이었다.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이래 일본 금융업 진출이 뚜렷해지자 지식인층과 실업가들은 민족자본으로 은행을 설립해 경제파탄을 막고자 했다. 1910년 국권 상실 후 일제 강요로 ‘대한’이라는 용어를 폐기하고 1912년 2월 상호를 조선상업은행으로 개칭했다. 지금도 조선상업은행종로지점이란 대리석 현판이 건물에 심어져 있다.       

1950년 한국상업은행, 1999년 한일은행과 합병해 한빛은행이 됐으며 한빛은행은 2001년 우리금융지주로 편입됐다. 2002년 5월 우리은행으로 명칭을 변경해 종로지점으로 운영되고 있다.      

<참고문헌>
- 2023년 역사문화유적 표석 정비 계획, 서울시 문화재정책과, 2023
- 서울시 표석현황, 서울시 역사문화재과, 2022
- 디지털 인문학과 시민 교양 : 서울시 역사문화유적 표석 관련 사료 디지털화의 필요성 및 그 방안, 장진엽 성신여대 한문교육과 조교수, 2022
- 역사문화유적 표석 :사료조사 상․하, 연세대산학협력단, 서울특별시, 2019
- 역사문화유적 표석 사료집, 서울특별시 역사문화재과,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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