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표석 따라 서울 톺아보기] 이 칼럼은 2023년도 서울시 비영리민간단체 공익활동지원사업 일환으로 문화지평이 진행하는 ‘표석이 품은 소멸문화유적을 따라 톺아보는 서울 역사’ 두 번째 답사기다.     

‘표석(標石)’은 현존하지 않는 역사적 장소, 또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사건이 발생한 공간에 설치한 표지물이다. 서울시 역사문화유적 표석은 1985년 ‘역사문화유적지 기념표석 신설 및 정비계획’에 의해 처음 설치돼 2023년 1월 현재 335개에 이른다.     

문화지평은 지난 5월 27일 오전 10시부터 12시30분까지 운현궁과 건너편 독립선언문배부터 표석부터 조계산 뒤편 수송공원까지 ‘3.1운동과 항일독립의 표석길’이란 주제로 답사를 했다. 표석 답사는 모두 7회 진행된다. <편집자 주>     

2023년도 서울시 비영리민간단체 공익활동지원사업 일환으로 문화지평이 진행하는 ‘표석이 품은 소멸문화유적을 따라 톺아보는 서울 역사’ 2차 답사 웹포스터.     
2023년도 서울시 비영리민간단체 공익활동지원사업 일환으로 문화지평이 진행하는 ‘표석이 품은 소멸문화유적을 따라 톺아보는 서울 역사’ 2차 답사 웹포스터.     

1차 답사 해설은 배건욱 해설사가 맡았다. 배 해설사는 서울KYC 대표를 지내고 한양도성길라잡이 백악구간 해설을 담당하는 서울역사학 전문가다. 한양도성과 독립운동사, 몽양 여운형 등에 대해 해박한 전문성을 가지고 있다.        

아침부터 하늘빛이 먹장이다. 비소식이 있다. 마침 사월초파일 부처님오신날이다. 안국역에서 모일까 하다가 차라리 운현궁이 낫겠다 싶어 장소를 옮겼다.       

이번 답사는 단순히 표석만 둘러보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역사문화 자원 전반을 훑으면서 서울이 가진 역사적 시층(時層)을 톺아보는 것이 목적이다. 때문에 오랜만에 운현궁을 찾는 것도 좋은 선택이었다.      

또한 산재한 표석을 무작정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일정 표석을 선별해 한 주제로 꿰서 답사하는 주제형 답사로를 만들었다. 이번 주제는 ‘3.1운동과 항일독립의 표석 길’이다. 당대 지식인들과 항쟁의 표적들이 대부분 4대문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남긴 항일운동 그것을 기리는 표석이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식민과 항쟁의 서막이 된 운현궁    

문화지평 회원들이 답사 출발지인 운현궁 경내에서 단체사진을 찍는 모습. 
문화지평 회원들이 답사 출발지인 운현궁 경내에서 단체사진을 찍는 모습. 

운현궁 자체는 표석이 놓인 장소는 아니지만 흥선대원군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만큼 돌아볼 가지는 충분했다. 흔히들 고종이 태어나고 성장한 집으로 운현궁을 기억하는데, 그보다는 오랜 섭정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다졌던 흥선대원군의 세력 결집지 정도로 바라보는 게 더 맞지 싶다.      

실제 고종이 출생한 장소는 현 운현궁이 위치한 장소의 뒤편 언덕 즈음으로, 언덕의 이름이 '운현'이었다. 운현궁은 지금 보아도 규모가 상당하다. 왕의 아버지가 기거하던 장소이므로 일반 민가와의 비교는 금물이다. 오늘날보다 당대의 운현궁은 더욱 거대했다고 한다.      

'양관'이라 불리는 뒤편의 서양식 건물이 위치한 곳을 비롯해 일본 대사관 공보관실(현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 자리 또한 운현궁의 영역이었다고 한다. 이토록 운현궁이 거대해진 데엔 흥선대원군의 어마어마한 힘이 절대적으로 작용했다. 1863년 고종이 왕이 되면서 흥선대원군은 본격적으로 운현궁의 공간 확장에 나섰다.      

노락당, 노안당 등 현재도 건재한 건물들이 당시에 지어졌으며, 여기에는 궁에 사용될 법한 최고급 건축 자재가 쓰였다. 이 외에도 흥선대원군은 부암동 석파정 등 서울 여러 곳에 별장을 소유했다. 권력은 영원할 수 없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흥선대원군의 섭정이 가능했다면 고종의 성장은 흥선대원군에겐 독이었다.      

흥선대원군이 안동 김씨 세력의 절멸을 꿈꿨다면 고종 친정 시작 이래 권력은 흥선대원군 아닌 여흥 민씨 세력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더디나마 조금씩 성장하고 있던 근대 시민 세력까지 여기에 가세하면서 조선은 급격히 혼란에 빠져들었다.      

일례로 임오군란은 단지 구식군대를 향한 차별만이 원인은 아니었다. 갑신정변의 칼날은 민씨 세력의 중심축을 차지하고 있던 민영익을 향해 있기도 했다. 이를 우리 힘으로 극복하고 새로운 질서 수립에 성공했다면 좋았겠지만, 역사는 그리 수월하게 전개되지 못했다. 청나라의 개입이 계속됐고, 일제 또한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엿보았고 결국은 식민의 어두운 역사의 서막이 되었다.      

천도교는 독립운동의 본산

배건욱 해설사가 삼일대로 SK허브프라자 앞에 있는 ‘조선건국동맹터’ 표석 앞에서 해설을 하고 있다.       
배건욱 해설사가 삼일대로 SK허브프라자 앞에 있는 ‘조선건국동맹터’ 표석 앞에서 해설을 하고 있다.       

운현궁을 나와 길을 건너 천도교 수운회관 앞에는 독립선언서를 배부했다는 표석이 세워져 있었다. ‘독립선언서배부터’에는 ‘3·1독립운동 거사를 위해 천도교 대표 등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검토 배부하던 곳’이라고 새겨 있다. 역사가 기억하는 건 1919년 3월 1일이지만, 독립운동이 3월 1일에만 국한되지 않았음은 너무나 자명하다. 3.1운동은 알고 보면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쳐 실현됐다.      

상해로 망명한 독립투사들이 파리 강화회의 참여를 준비하면서 우리가 독립국임을 알리고자 국내, 도쿄 등으로의 파견을 기획했고, 종교계, 학생 조직 등에게 집중적으로 전파된 측면이 강했다. 지도층은 익히 알려져 있듯 종교계가 주축을 이루었는데, 그중 천도교, 기독교 세력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다.      

독립선언서 인쇄 등에 큰 기여를 한 천도교 또한 1930년대 들어 국내에서의 운동이 위축되는 과정에서 교단의 위축을 경험했다. 정치와 종교는 분리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일제 강점기와 같은 시기에는 호국 차원의 종교가 사람을 모으는 구심점 역할을 수행했단 걸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몇 걸음 옮기자 ‘조선건국동맹터’ 표석이 나왔다.  표석에는 ‘조선건국동맹은 1944년 8월 10일 조국의 광복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고자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단체이다. 중심인물은 여운형, 조동호, 현우현, 황운, 이석구, 김진우 등이며, 산하조직으로 조선농민동맹을 두었다.’고 적혀 있다.      

조선건국동맹에는 노동자, 농민, 청년 등 다양한 계층이 함께했다. 이들은 다수의 강연을 접하며 광복 이후 세상을 설계해 나갈 주체로서의 역량 강화에 나섰다. 인민공화국 선포까지도 야심 차게 이루어졌다. 사회주의 계열이 많이 참여한 결과 미군정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서 조선건국동맹은 유야무야 되고야 말았다.      

안국역 방향으로 또 몇 걸음 옮기자 ‘서북학회터’ 표석이 나온다. 표석 내용은 ‘대한제국 시대인 1908년에 국권 회복 운동을 위하여 평안도·함경도·황해도민이 조직한 애국 계몽 단체였다. 1909년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자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운동으로 전하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1910년에 강제 계산되었다. 이후 이곳에는 한때 오성학교, 보성전문학교, 건국대학교 전신인 정치대학이 자리하였다.’고 적혀 있다. 한마디로 교육의 본산이다.      

주요 임원은 이동휘, 안창호, 박은식, 이갑, 유동열, 최재학 등이 있다. 서북협성학교를 운영해 교사양성에 주력했으며 노동자 교육을 위한 수상야학, 측량과, 심학강습소, 농림강습소 등을 설치해 인재 양성에 힘썼다. 또한 학회지로 ‘서북학회월보’를 발간했다.     

서북협성학교는 서우학회가 운영하던 서우사범학교와 한북흥학회가 운영하던 한북의숙이 통합돼 만들어진 학교로, 서북학회가 출범한 1908년 11월 낙원동 282번지에 신축한 서북학회 회관 교사로 이전했다. 당시 사용하던 회관은 지금 자리에선 볼 수 없지만 건국대 서울 캠퍼스 안으로 이축돼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축 복원된 서북학회 회관

낙원동에서 건국대학교로 이축된 서북학회 회관. 문화지평이 지난해 서울시건축문화 답사를 했던 곳이다.     
낙원동에서 건국대학교로 이축된 서북학회 회관. 문화지평이 지난해 서울시건축문화 답사를 했던 곳이다.     

서북학회가 해산된 후 1910년 10월 1일 서북협성학교는 오성학교로 교명을 고쳐 부르다가 1918년 4월에 총독부로부터 폐교조치를 받았다. 1918년에는 보성전문학교의 전신인 보성법률학학교가 이전해 왔고, 이후 정치대학(현 건국대), 단국대 등의 교사로 쓰였다. 1959년 이 회관을 인수한 건국대학교는 야간부 교사로 사용하다 1985년 건물을 해체해 이전·복원했다. 이 건물은 초기의 르네상스식 양관으로 우리 민족이 사용하기 위해 순수 민간자본으로 세운 것이 큰 특징이다.      

비가 점점 거세졌다. 답사팀은 인사동으로 접어들었다. 인사동길에서는 볼 수 없게 골목 안에 틀어박힌 승동교회에 다다랐다. 승동교회 안에는 ‘3.1독립운동기념터’란 표석이 있다. 표석에는 ‘3․1독립운동 거사(獨立運動擧事)를 위해 학생대표(學生代表)들이 모의(謀議)하였던 곳.’이라고 적혀 있다. 서울 시내에는 3.1독립운동기념터란 주제의 표석이 여럿 있다. 그만큼 3.1운동은 다발적으로 참가한 조직적인 항일 항쟁이었다.     

숭동교회는 면려청년회장이었던 김원벽을 비롯해 청년지도자들이 1919년 2월 20일 교회 1층 밀실에서 3.1독립만세운동을 숙의했다. 당시 차상진 담임목사는 ‘12인 등의 장서’를 조선 총독에게 제출하고 투옥당했다. 그 후로 승동교회는 일본 경찰로부터 수색 등 수난을 당했다. 승동교회는 여운형이 전도사로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가들의 근거지로서 역할을 했다. 이회영 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남대문 상동교회 등도 마찬가지다.      

인사동 초입에 있는 ‘박자혜산파터’는 신경 쓰고 보지 않으면 쉽게 찾을 수 없는 곳에 위치해 있다. 산부인과가 본격화되기 전 아이를 받는 역할을 했던 게 바로 산파였다. 표석에는 ‘박자혜(1895~1943)가 산파를 개원한 곳이다. 박자혜는 3·1운동 때 간호사들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중국으로 망명한 후 단재 신채호 선생과 결혼했다. 서울로 돌아와 산파로 활동하며 나석주 열사의 의거(1926년)를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을 펼쳤다.’고 쓰여있다.      

종로2가 YBM어학원 앞 ‘신간회본부터’ 표석에는 ‘1927년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민족협동전선으로 출범한 신간회가 1929년 이후 본부를 두었던 곳이다.’고 적혀 있다. 신간회는 1927년 2월 '민족 유일당 민족협동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제휴하여 창립한 민족운동단체이다. 박자혜의 남편 신채호도 이곳 발기인 중 한 명이다.      

내부적으로 좌우익의 갈등은 있었지만 신간회는 적극적 활동으로 전국에 지회와 분회를 조직하며 세력을 확장, 1930년에는 전국에 140여 개의 지회와 3만 90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1931년 5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에서 대의원 77명이 참석한 가운데 해산을 결의해 4년 만에 활동을 접었다.      

답사팀은 종로 YMCA 앞의 3.1독립운동기념터와 김상옥의거터를 지났다. 3.1운동기념터에는 ‘이 기독청년회관(YMCA)은 민족운동의 본거지로써 3·1독립운동을 준비하였던 곳.’이란 각자가 새겨져 있다. 김상옥의거터에는 ‘김상옥(1890~1923)은 192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의열단원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1월 12일 이곳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며 일본 경찰과 격전을 벌이다 그달 22일 효제동에서 순국하였다.’고 적혀 있다. 이 표석이 설치된 곳은 과거 종로경찰서가 있던 곳이다.      

독립운동의 용광로 같은 ‘수송공원’

조계사 뒤편 수송공원에서 답사를 마친 일행이 우정총국 앞에서 해산을 했다. 비가 많이 왔지만 끝까지 많은 분들이 남아 ‘3.1운동과 항일독립의 표석길’을 함께 답사했다. 
조계사 뒤편 수송공원에서 답사를 마친 일행이 우정총국 앞에서 해산을 했다. 비가 많이 왔지만 끝까지 많은 분들이 남아 ‘3.1운동과 항일독립의 표석길’을 함께 답사했다. 

빗방울이 잦아들 생각을 안 하고 점점 더 세차지기만 한다. 답사를 조금 서둘러 마쳐야 할 것 같아 조계사 뒤편 수송공원으로 향했다. 때마침 부처님오신날에다가 점심 공양시간이라 조계사 인근은 인산인해였다.      

조계사는 사찰이 들어서기 전 보성학교와 학교소속 인쇄소인 보성사가 있던 자리란 것을 증명하는 나무다. 당시 학교를 찍은 사진에 회화나무가 선명하게 나와 있다. 대웅전 앞 회화나무를 기준으로 건물의 대략적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귀한 지표다.   

보성사는 천도교의 보문관과 보성학원 보성사를 합병한 것이다. 천도교 중앙교당 천도교 관계 서적 및 교회기관지인 ‘천도교월보’를 찍어내는 창신사가 있었다. 1910년 말 천도교에서 보성학원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보성사와 창신사를 한데 묶고 이름을 보성사로 했다. 보성사는 최남선이 설립한 광문회의 신문관과 더불어 당시 인쇄계 양대산맥 이었다.     

보성사의 역사적 의미는 독립선언서 인쇄에 있다. 1919년 2월 최남선이 초안을 잡은 독립선언서를 신문관에서 조판하고 보성사에서 찍어냈다. 인쇄계 양대산맥의 합작품이 셈이다. 찍어낸 분량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3·1운동 거사 4일 전인 2월25일 2만5000장, 이틀 전인 27일 추가로 1만장을 찍었다고 했다. 일제는 3‧1운동 직후 보성사를 폐쇄하고 6월23일 밤에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수송공원 입구에는 보성사 터 표지석이 있다. 표석에는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와 ’조선독립신문‘을 비밀리에 인쇄한 천도교의 보성사가 있던 곳이다.’라고 적혀 있다. 독립선언서를 인쇄 과정에서 발생한 중대 사건에 대해 설명을 이어갔다. 천도교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 주시하던 일제 고등계형사 신승희가 인쇄 현장을 목격하는 일촉즉발의 일이 발생했다.     

보성사 사장이던 이종일은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5000원을 받아 신승희에게 전달해서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다. 수송공원 한가운데 서 있는 동상의 주인공이 바로 이종일이다.      

또 한 번은 인쇄된 독립선언서를 손수레에 실어 천도교 본부로 옮기던 중 일경에게 검문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이를 족보라고 속여 넘어간 일화도 회자되고 있다. 두 사건이 유야무야 됐기 때문에 3·1운동이란 거국적 거사가 계획대로 진행될 수 있었다.      

수송공원 안에는 신흥대학터 표석도 있다. 표석에는 ‘일제 강점기 서간도에서 독립군을 양성했던 신흥무관학교의 후신인 신흥대학이 1949년 3월 20일 정식 대학으로 인가받아 개교한 자리. 신흥대학은 1955년 회기동으로 이전하여 1960년 경희대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쓰여 있다. 신흥대학터 역시 항일운동의 역사적인 공간이란 점에서 이번 답사의 의미를 더했다.    

배 해설사와 답사팀은 우정총국 처마아래서 비를 피하며 마무리 인사를 나눴다. 항일운동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저항 운동으로 우리나라에서는 3.1운동, 중국의 5.4 운동 등을 거쳐 만주사변 후에 격화되면서 점차 무력 투쟁으로 발전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런 노력과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란 생각을 다시한번 하게 된 답사였다. 

<참고문헌>
- 2023년 역사문화유적 표석 정비 계획, 서울시 문화재정책과, 2023
- 서울시 표석현황, 서울시 역사문화재과, 2022
- 디지털 인문학과 시민 교양 : 서울시 역사문화유적 표석 관련 사료 디지털화의 필요성 및 그 방안, 장진엽 성신여대 한문교육과 조교수, 2022
- 역사문화유적 표석 :사료조사 상․하, 연세대산학협력단, 서울특별시, 2019
- 역사문화유적 표석 사료집, 서울특별시 역사문화재과,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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