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표석 따라 서울 톺아보기] 이 칼럼은 2023년도 서울시 비영리민간단체 공익활동지원사업 일환으로 문화지평이 진행하는 ‘표석이 품은 소멸문화유적을 따라 톺아보는 서울 역사’ 네 번째 답사기다.          

‘표석(標石)’은 현존하지 않는 역사적 장소, 또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사건이 발생한 공간에 설치한 표지물이다. 서울시 역사문화유적 표석은 1985년 ‘역사문화유적지 기념표석 신설 및 정비계획’에 의해 처음 설치돼 2023년 1월 현재 335개에 이른다. 신설, 철거, 이전 등으로 설치 개수와 위치는 유동적이다.           

문화지평은 지난 6월 24일 오전 10시 광화문역을 출발해 ‘개화와 개혁 그리고 학문의 표석길’이란 주제로 답사를 했다. 표석 답사는 모두 7회 진행된다. <편집자 주>     

2023년도 서울시 비영리민간단체 공익활동지원사업 일환으로 문화지평이 진행하는 ‘표석이 품은 소멸문화유적을 따라 톺아보는 서울 역사’ 4차 답사 웹포스터.          
2023년도 서울시 비영리민간단체 공익활동지원사업 일환으로 문화지평이 진행하는 ‘표석이 품은 소멸문화유적을 따라 톺아보는 서울 역사’ 4차 답사 웹포스터.          

이번 답사 예상 경로는 수진측량학교터, 정도전집터, 중부학당터, 의학교터, 제중원터, 박규수선생집터, 이상재집터(창덕여중고터), 성삼문선생살던곳, 장원서터, 김옥균집터 등이었다. 이번 해설을 맡은 한이수 해설사는 학부에서 사학과 대학원에서는 미술사학을 전공한 역사와 미술 분야 전문가다. 그래서 표석 답사와 북촌을 배경으로 한 미술 이야기를 함께 버무린 의미 있는 시간을 가졌다.      

답사 주제를 ‘개화와 개혁, 학문의 표석길’로 잡은 이유는 코스 중에 각종 학교와 정도전과 구한말 개혁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들 집터가 여럿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광화문역에서 시작한 답사는 가장 먼저 광화문역 2번 출구 옛 종로구청 민원실 오른쪽 화단에 위치한 ‘수진측량학교터’를 들렀다. 지금은 종로구청 신청사 공사 중으로 어디론가 옮겨 놓은 상황이다. 자료에 따르면 표석에는 ‘개화사상가 유길준(兪吉濬)이 수진궁(壽進宮)을 빌려 측량전문교육기관(1908~1909)을 세웠던 곳.’으로 각자 돼 있다.      

유길준은 일찍 서구 문물을 접해 개화사상이 뛰어난 인물이자 이로 인해 격동의 세월을 살았다. 1870년(고종7) 이번 답사코스에 있는 박규수의 문하에서 역시 답사코스에 있는 김옥균과 박영효·서광범·김윤식 등 개화 청년들과 실학사상을 배우면서 위원의 ‘해국도지’ 같은 서적을 통해 해외 문물을 습득했다.     

1881년 박규수의 권유로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신사유람단에 참가, 우리나라 최초 일본 유학생이 됐다. 이듬해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민영익의 권유로 학업을 중단하고 1883년 1월에 귀국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로 한성판윤 박영효가 계획한 ‘한성순보’ 발간 사업 실무 책임을 맡았으나 순조롭지 않아 사임했다.      

그 해 7월 보빙사 민영익의 수행원으로 미국으로 건너 1884년 우리나라 최초 미국 유학생이 됐다. 같은 해 갑신정변이 실패했다는 소식에 학업을 중단하고 유럽 각국을 순방한 뒤 1885년 12월 귀국했다가 갑신정변 주모자인 김옥균·박영효 등과 친분관계가 있었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법무대신을 지낸 한규설의 도움으로 극형을 면하고 가택 연금 생활을 하면서 ‘서유견문’을 쓴 인물이다.      

수진측량학교는 1908년 측량에 관한 지식과 기술을 교육할 것을 목적으로 종로구 수진동에 있던 흥사단에 설립된 사립교육기관이다. 설립 배경은 1905년 을사조약으로 국권상실의 위기를 감지한 당시 민족 지도자들의 교육구국운동 일환이었다.     

당시 1906년부터 1910년 말까지 전국에 걸쳐 농업·공업·상업 등 실업기술교육을 실시한 교육기관을 포함한 수천여 개의 사립학교가 설립됐다. 공업 분야 기술교육을 실시한 교육기관 중에는 측량 교육기관이 비교적 많았다. 수진측량학교도 이 중 하나였다.      

학교가 들어섰던 수진궁 후사가 없이 죽은 왕의 자녀, 후궁 등의 제사를 합사 하던 사우(祠宇)다. 원래는 예종의 둘째 아들인 제안대군의 궁가였다가 중종의 본궁이 되면서 수진궁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정도전·김옥균 등 선초한말 개혁 인물 수루둑

광화문역에서 시작해 정독도서관에서 마친 이번 답사에는 개화파 인물과 교육 개혁의 흔적이 서린 표석을 여럿 지났다. 문화지평 회원들이 답사 시작 전 광화문역에서 단체사진을 찍는 모습.           
광화문역에서 시작해 정독도서관에서 마친 이번 답사에는 개화파 인물과 교육 개혁의 흔적이 서린 표석을 여럿 지났다. 문화지평 회원들이 답사 시작 전 광화문역에서 단체사진을 찍는 모습.           

다음은 ‘정도전집터’ 표석인데 역시 종로구청 신청사 공사 때문에 원래 자리를 떠나 별도 관리되고 있다. 원래 자리는 옛 종로구청 미원실 입구 왼쪽 화단에 있었다. 표석에는 ‘조선 개국공신(開國功臣)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이 살던 집 터. 후일 사복시(司僕寺)·제용감(濟用監)이 이 자리에 들어섰고 일제 때에는 수송국민학교(壽松國民學校)가 세워졌었다.’라고 각자 돼 있다.      

4년밖에 살지 못했지만 이 일대 정도전이 남긴 흔적은 크다. 그의 집터에 대한 조선후기 한양 인문지리서인 ‘한경지략’ 기록에 따르면 ‘정도전의 집이 수진방(수송동)에 있었는데 지금 중학이 자리 잡은 서당 터는 정도전가의 서당 자리요, 지금 제용감 터는 정도전가의 안채 자리요, 사복시는 정도전가의 마궐 자리인데 모두 풍수설에 맞춰 지은 것’으로 묘사돼 있다. 그만큼 넓은 집터를 하사 받아 누렸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태조 이성계의 최측근으로 조선 창업 이데올로기를 수립한 건국 1등 공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이후 그의 집은 조정에 몰수됐고 한경지략과 표석에 표기된 것처럼 사복시, 제용감 등이 들어섰다. 사복시는 궁중의 마필 등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으로 마구간이 있던 터는 일제강점기 이후 기마경찰서로 사용됐다.      

해방 후 서울기마경찰대로 지속되다가 1960년대 경찰 기동 장비가 보급되고 도시교통도 복잡해지면서 기마대 규모는 축소됐다. 1972년 성동구 성수동으로 이전했고 1975년에는 전국 기마경찰대가 서울시 경찰국 기마대로 통합됐다.     

이전 후 빈 땅 위에는 '말을 이롭게 한다'는 뜻의 이마(利馬)빌딩이 들어섰고 중학당 자리에는 에는 일제강점기인 1922년 수송국민학교가 세워졌다가 1976년 큰 화재로 폐교한 후 종로구청이 위치하는 등 시간의 층위가 두터운 곳이다. 정도전의 흔적은 광화문광장에서 종로구청 앞을 거쳐 우정국로까지 도로인 삼봉로로 남아있다.     

다음으로 찾은 ‘중부학당터’ 표석은 케이트윈빌딩 앞 화단에 위치해 있다. 표석에는 ‘사부학당은 조선시대에 한성부의 중부·동부·서부·남부에 설치한 중등교육기관이다. 북부 관광방(觀光坊)이었던 이곳에 중부학당이 있었다. 1894년(고종 31) 폐지되었다.’라고 쓰여 있다.      

중부학당은 조선초기에서 조선말기까지 유지된 조선시대 국립중등교육기관 중 하나로 태조실록 권15, 태조 7년 9월 갑신에 ‘서울 안에 성균관과 오부학당으로부터 각 도에 이르기까지 모두 교관이 있는 것은 인재를 양성하기 때문인 것이니...’라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조선초기 오부학당을 두려 했지만 북부학당은 설치되지 못했고 서부학당이 조선말까지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삼청동에서 경복궁 동쪽 궁장을 끼고 청계천까지 흐르던 중학천의 동쪽 측면에 위치한 제용감, 사복시, 사포서 터와 인접해 있었다.      

조선시대 서울에는 국립 유학 교육기관으로 성균관과 사학이 설립됐다. 국가의 지도이념인 유학 교육을 진흥시키기 위한 교육 기관이다. 성균관에 입학하기 위해 필요한 중등 정도의 유학교육을 담당하는 관학이었다. 양반자제와 서민에게 모두 사학의 입학 자격이 주어졌다고 한다.     

종로 수송공원은 근대 교육의 요람

종로 수송공원 내 세워진 대한매일신보창간사옥터 뒤로 답사팀이 한이수 해설사의 해설을 듣고 있다.       
종로 수송공원 내 세워진 대한매일신보창간사옥터 뒤로 답사팀이 한이수 해설사의 해설을 듣고 있다.       

조계사 뒤편 수송공원은 표석이 여럿 세워져 있다. 그만큼 이곳이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공간이란 의미다. 공원 입구에 세워져 있는 ‘용동궁터’ 표석에는 ‘조선조 명종의 장남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책봉을 받았으나 13세에 세상을 떠나 세자빈의 속궁(屬宮)이 되었다. 조선말 경운궁(현 덕수궁) 부근에서 이곳으로 이전되었다가 독일인 묄렌도르프에 하사되었으며 그 뒤 엄비의 소유로 변하여 숙명여학교가 설립, 운영되었다.’고 적혀 있다.      

수송공원에는 입구에 보성사 터 표지석이 있다. 표석에는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와 ’조선독립신문‘을 비밀리에 인쇄한 천도교의 보성사가 있던 곳이다.’라고 적혀 있다. 수송공원 안에는 신흥대학터 표석도 있다. 표석에는 ‘일제 강점기 서간도에서 독립군을 양성했던 신흥무관학교의 후신인 신흥대학이 1949년 3월 20일 정식 대학으로 인가받아 개교한 자리. 신흥대학은 1955년 회기동으로 이전하여 1960년 경희대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쓰여 있다. 숙명여학교, 중동학교 옛터를 기리는 사설 표석도 세워져 있다. 근대 교육의 한 축을 담당했던 공간이다.      

공원 내에는 대한매일신보창간사옥터 표석도 있다. 표석에는 ‘대한매일신보는 1904년 7월 영국인 베델(Bethell)과 양기탁(梁起鐸)이 창간한 대한제국 말기의 대표적 항일 민족 언론이다. 이후 중동학교가 이곳에서 문을 열었다.’고 적혀 있다. 인접한 곳에는 이색 영당이 있다. 목은 이색의 초상을 보관하는 사적이다. 옆에는 한산 이씨 대종회가 있는 목은관이란 빌딩이 자리하고 있다.      

안국역 6번 출구 인근에 있는 의학교터 표석에는 ‘1899년 대한제국에서 김홍집의 집에 설립한 최초의 근대의학 교육기관이다. 졸업생들에게 면허증을 발급하였다. 1907년 대한의원 교육부로 개편되었다.’고 쓰여있다. 표석은 종로경찰서 정문 왼쪽에 있다.     

김홍집(1842~1896)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마지막 영의정으로 유명하다. 1880년 수신사 일행으로 일본을 방문한 뒤, 신문물을 견학하고 돌아와 개화, 개항의 중요성을 역설한 개화파로 분류됐다. 1884년 갑신정변 진압 후 우의정, 좌의정 등 전권대신이 돼 한성조약을 체결했다. 일본 측 지원으로 총리대신이 됐고 재직 중 신분제 폐지, 단발령 등을 강행하는 개혁정책으로 친일파로 몰려 아관파천 때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분노한 백성들에게 뭇매를 맞아 죽는 비운의 인물이다.     

헌법재판소 안에 ‘제중원터’ 표지석이 있다. 제중원이 처음 세워졌던 곳이고 훗날 현대 계동 사옥 앞으로 옮겨졌다. 제중원은 고종이 1885년 미 공사관 공의(公醫)인 알렌의 건의를 받아 설립한 양방 병원이다. 알렌은 1884년 갑신정변 과정에서 부상을 입은 민영익을 치료하면서 궁중의 전의(典醫)로 발탁됐다.      

실록에는 고종이 혜민서와 활인서를 대신할 의료기관의 설립이 필요하다는 의정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설치를 허락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면에는 알렌이 고종에게 서양의학의 보급과 서양식 의료기관의 설립을 건의해 제중원 설립을 이끌었던 사연이 숨어있다.     

북촌 지역은 우리나라 근대 의학의 태동지다. 김치중 이대의료원 홍보실장(전 한국일보 의학전문기자)는 “연대세브란스 병원의 모태인 제중원, 1900년대 초기 우리나라 콜레라 방역대책을 세워 근대의학 도입에 공헌한 독일인 의사 리하르트 뷘시의 병원, 백병원 설립자인 백인제 가옥 등 북촌 지역은 근대의학의 의향(醫香)이 짙은 곳”이라고 말했다.     

헌재는 근대 의학의 태동지 이전에 개화파의 심장부와 같은 곳이다. 헌재 백송 아래 녹지에는  ‘박규수집터’ 표지석이 있다. 표석 문구는 ‘조선조 말 근대화를 주장한 우의정(右議政) 환재(瓛齋) 박규수(1807~1876) 선생 집터’로 적혀 있다. 이날 답사에는 내부공사로 헌재 출입이 제한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담벼락 밖에서 설명을 들었다.         

헌재 뒷마당 백송은 박규수 집에 있던 곳이다.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다. 개화파인 홍영식의 집은 박규수 집과 담을 맞대고 있었다. 서광범은 풍문여고와 덕성여고 중간쯤, 김옥균과 서재필은 정독도서관 자리에 살았다. 김홍집도 근처에 살았다. 일대가 개화파의 산실이었던 것이다. 

헌재 한편에는 ‘이상재집터’ 표석도 있다. 표석에는 ‘이상재(1850~1927)는 한말 및 일제강점기에 활약한 정치가·사회운동가이다.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구성하여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고, 1927년에는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좌·우익이 합작하여 만든 사회단체인 신간회(新幹會)의 초대회장이 되었다.’고 적혀 있다. 창덕여고도 이곳에 있었다는 표석이 있으나 서울시가 세운 것은 아니다.      

홍현 넘어 정독도서관 앞도 표석 밀집

헌법재판소 끼고 좌회전해서 홍현을 넘으면 정독도서관에 다다르게 되는데 이곳도 표석이 밀집돼 있다. 사진은 정독도서관 앞 화단에서 답사팀이 마지막 단체 사진을 찍는 모습.  
헌법재판소 끼고 좌회전해서 홍현을 넘으면 정독도서관에 다다르게 되는데 이곳도 표석이 밀집돼 있다. 사진은 정독도서관 앞 화단에서 답사팀이 마지막 단체 사진을 찍는 모습.  

답사팀은 홍현(紅峴)을 넘어 정독도서관으로 향했다. 헌법재판소 끼고 좌회전해서 정독도서관으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이 붉을 홍, 고개 현을 써서 홍현이다. 흙색이 붉어서 붙은 이름이다. 홍현을 알리는 작은 표석이 있다. 이런 표석 하나가 서울의 역사를 두텁고 윤택하게 한다. 

답사 막바지다. 정독도서관 입구 화단에 일렬로 앉아서 설명을 들었다. 초여름 더위가 제법이다. 정독도서관 앞 찻길 변에는 동아일보창간사옥터 표석이 있다. 표석에는 ‘1920년 4월 민족언론을 표방하며 창간된 동아일보의 사옥터. 그에 앞서 1917년까지 기호학교와 그 후신인 중앙학교의 교사로 사용되었고, 동아일보사가 1926년 광화문 신축사옥으로 이전한 뒤에는 중외일보의 사옥이 되었다.’고 적혀 있다.       

도서관 입구 녹지에는 ‘성삼문선생살던곳’ 표석이 서 있다. 표석에는 ‘태종 18년(1418) 태어나서 사육신의 한 분으로 세조 2년(1456) 순절한 성삼문(成三問)선생 살던 집이 이 부근(화동 23번지)에 있었다.’고 적혀 있다. 옆에는 장원서 표석이 있다. 표석에는 ‘궁궐의 후원과 각지의 과수원을 관리하고 궁중과 여러 관아에 과일과 화초 등을 공급하던 관아 터’라고 각자 돼 있다.      

정독도서관과 전해 있는 서울교육박물관 뒤쪽 녹지에는 김옥균집터 표석이 있다. 표석에는 ‘조선말 개화파의 지도자인 고균(古筠) 김옥균(金玉均)이 거처하며 갑신정변을 논의하던 집 터(종로구 화동 260번지)’라고 새겨 있다. 이번 답사는 조선과 대한제국을 관통하면서 개혁의 인물들과 새로운 교육의 열망이 응집돼 있는 공간을 걸었다. 북촌은 이뿐 아니라 수많은 역사의 시층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다. 파도 파도 이야기가 끝이 없고 걷고 걸어도 끝에 닿을 수 없는 공간이다.   

<참고문헌>
- 2023년 역사문화유적 표석 정비 계획, 서울시 문화재정책과, 2023
- 서울시 표석현황, 서울시 역사문화재과, 2022
- 디지털 인문학과 시민 교양 : 서울시 역사문화유적 표석 관련 사료 디지털화의 필요성 및 그 방안, 장진엽 성신여대 한문교육과 조교수, 2022
- 역사문화유적 표석 :사료조사 상․하, 연세대산학협력단, 서울특별시, 2019
- 역사문화유적 표석 사료집, 서울특별시 역사문화재과,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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