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표석 따라 서울 톺아보기] 이 칼럼은 2023년도 서울시 비영리민간단체 공익활동지원사업 일환으로 문화지평이 진행하는 ‘표석이 품은 소멸문화유적을 따라 톺아보는 서울 역사’ 여섯 번째 답사기다.                    

‘표석(標石)’은 현존하지 않는 역사적 장소, 또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사건이 발생한 공간에 설치한 표지물이다. 서울시 역사문화유적 표석은 1985년 ‘역사문화유적지 기념표석 신설 및 정비계획’에 의해 처음 설치돼 2023년 1월 현재 335개에 이른다. 신설, 철거, 이전 등으로 설치 개수와 위치는 유동적이다.                     

문화지평은 지난 10월 22일 오후 2시 경복궁역을 출발해 백운동천길을 거슬러 올라 청와대 경내를 답사하는 ‘권력의 공간 따라 걷는 표석길’을 답사했다. 표석을 중심으로 주변 역사문화, 생태경관, 산업관광자원과 특히 청와대를 단체로 관람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번이 6회 차인 표석 답사는 모두 7회 진행된다. <편집자 주>               

2023년도 서울시 비영리민간단체 공익활동지원사업 일환으로 문화지평이 진행하는 ‘표석이 품은 소멸문화유적을 따라 톺아보는 서울 역사’ 6차 답사 웹포스터. 
2023년도 서울시 비영리민간단체 공익활동지원사업 일환으로 문화지평이 진행하는 ‘표석이 품은 소멸문화유적을 따라 톺아보는 서울 역사’ 6차 답사 웹포스터. 

이번 답사 예상 경로는 내자시터-서십자각터-김정희본가터-한성정부유적지-창의궁터-김가진집터-세종대왕나신곳-대한국적십자병원터-쌍홍문터-김상헌집터-(여기서부터 비지정)-칠궁하마비-청와대 경내 각종 표석이다.  해설은 국내 표석길 연구와 답사 권위자인 김태휘 해설사가 맡았다.           

 이번 해설을 맡은 김 해설사는 프랑스 소르본대학에서 조경학 박사를 마치고 돌아와 건축문화와 역사, 환경 등에 대한 해설을 하는 역사인문학자다. 창덕궁‧의릉 궁궐길라잡이, 한양도성 시민순성관으로 있으면서 생태와 건축, 역사 분야를 전문으로 하고 있다.          

특히 이번 답사 주제인 표석과 관련 ‘표석을 따라 경성을 거닐다’, ‘표석을 따라 한성을 거닐다’, ‘표석을 따라 제국에서 민국으로 걷다’, ‘표석을 따라 서울을 거닐다’ 등 총 4권의 공저를 집필한 표석 전문가로 2016년부터 문화지평 역사문화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다.          

답사는 경복궁역 인근 ‘내자시터’부터 시작했다. 경복궁역 7번 출구 쪽에 위치한 내자시터 표석에는 ‘조선시대 궁중의 쌀, 채소, 과일 등 생필품을 공급하고 연회 등을 관장하던 관청인 내자시(內資寺) 터’라고 쓰여 있다.      

길을 건너 경복궁역 1,2번 출구 사이 신한은행 ATM 앞에는 ‘한성정부유적지’ 표석이 있다. 표석에는 ‘1919년 3․1운동 직후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대회를 열기로 하고, 그 취지서를 준비한 곳’이라고 적혀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쪽으로 가다 보면 ‘서십자각터’ 표석이 나온다. 서집자각은 ‘서십자각은 경복궁 서쪽에 있던 망루이다. 원래 궁궐의 궁은 임금의 거처를 말하고, 궐은 출입문 좌우에 설치된 망루를 뜻한다. 1923년 전차부설 공사를 하면서 철거되었다.’고 적혀 있다. 당시 전차 부설로 인한 경복궁 서측의 무분별한 훼철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인근에 있는 ‘김정희본가터’ 표석에는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는 조선 말기의 이름 높은 학자이자 서예가, 화가이다. 이곳은 그의 증조부모인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과 화순옹주(和順翁主) 때부터 경주 김씨 본가가 있던 터이다.’고 새겨져 있다.      

김정희는 조선후기 실학자이자 서화가다.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하고 추사체를 완성한 문신이기도 하다. 1786년(정조 10)에 태어나 1856년(철종 7)에 사망했다. 24세 때 생부 김노경을 따라 연경에 가서 옹방강·완원 같은 청의 이름난 유학자들과 교유했다. 문인화론을 바탕으로 뛰어난 시서화 작품을 다수 남겼고 불교에 대한 이해도 높았다.      

1840년(헌종 6년) 무렵 안동 김 씨가 집권하자 윤상도와 관련돼 제주도 유배를 가게 된다. 유배지에서의 곤궁한 생활 가운데 계속 글과 작품을 썼다. 그의 유배지에는 안동 김 씨 세도가 김유근 등이 찾아오기도 했다.     

1850년(철종 1년) 또는 1851년에 헌종묘천 문제로 실수한 의정부영의정 권돈인은 물론이고 친구였던 김정희까지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북청 유배는 1852년 예순여덟 살 겨울에야 풀려나게 된다. 12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친 그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서화와 선학에만 몰두했다. 일흔한 살 되던 해 승복을 입고 봉은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해 10월 과천으로 돌아와 생을 마쳤다.      

경복궁 서쪽에서 청와대까지 권력의 길

청와대사랑채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는 모습.
청와대사랑채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는 모습.

효자로 19 건물 앞에는 ‘창의궁터’ 표지석이 있다. 표석에는 ‘창의궁은 조선 21대 임금 영조(1694~1776)가 왕자 시절에 살던 집이다. 영조 즉위 후 왕실 사당 등으로 쓰였다. 1910년 동양척식주식회사 사택이 들어서면서 없어졌다’고 쓰여 있다.      

이곳은 원래 효종의 4녀인 숙휘공주의 부군 인평위 정제현의 옛집이었다. 그런데 숙종이 사서 그의 4자인 연잉군(뒤의 영조)에게 주었다. 이곳에는 흉고둘레 5m, 높이 16m, 수령 600년의 천연기념물 통의동 백송이 있었으나 태풍 피해로 가지가 찢어져 1993년 지정 해제됐다. 지금도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다시 길을 건너 체부동 쪽으로 가면 ‘김가진집터’ 표석을 만날 수 있다. 표석에는 ‘애국계몽정치가이며 독립운동가인 김가진(1846~1922)이 살던 집터이다. 1886년 과거에 급제한 후 주일본 판사대신, 군국기무처 회의원, 독립협회 위원, 대한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3·1운동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상하이에서 병사하였다.’고 적혀 있다.      

갑오개혁이 실패한 뒤 독립협회 위원일 때 독립문 현판석의 ‘독립문’ 글씨를 한자와 한글로 쓴 것으로 유명하다. 1902년 궁내부특진관을 지냈고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민영환 등과 함께 격렬히 반대했으나 좌절되자 1906년 충청도관찰사로 스스로 좌천했다.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한 뒤 수여한 남작 작위를 받았다가 즉시 반납했다. 조선민족대동단 총재 및 고문으로 추대돼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했다. 한학과 서예로도 유명했다. 집터에서 멀지 않은 청운동 자하문터널 입구 우측에 있는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 교회역사센터 뒤쪽에는 김가진의 별서 터가 있었다.     

자하문로를 따라 자하문터널 쪽으로 오르면 ‘세종대왕나신곳’ 표석이 나온다. 표석에는 ‘서울 북부 준수방(이 근처)에서 겨레의 성군이신 세종대왕이 태조 6년(1397) 태종의 셋째 아드님으로 태어나셨다.’고 새겨 있다.      

이름은 이도, 자는 원정. 태종의 셋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이다. 비는 심온의 딸 소헌왕후다. 1408년(태종 8) 충녕군에 봉해지고 1412년 충녕대군에 진봉 됐다. 1418년 6월 왕세자에 책봉됐다가 같은 해 8월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했다.     

원래 태종의 뒤를 이을 왕세자는 양녕대군이었지만 세자의 품위를 손상시킨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눈 밖에 났다. 태종이 양녕대군에게서 마음이 떠난 것을 알게 된 신료들은 그를 폐위할 것을 청하는 소를 올려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기에 이르렀다.      

1418년 6월에 태종은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민하고, 또 학문에 독실하며 정치하는 방법 등도 잘 안다.”라고 해 택현의 명분을 주어 세자 책봉을 결정했다. 세자 책봉 두 달 뒤 태종 선위를 이어받아 전격적으로 왕위에 오른 이가 바로 세종이다.      

정부서울청사 창성동 별관 앞에는 ‘대한국적십자병원터’ 표석이 세워져 있다. 표석에는 ‘1905년 대한적십자사 창설과 함께 개원한 병원이다. 고종의 칙령에 의해 빈민 구료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며, 1907년 대한의원에 통합되기까지 1만여 명의 환자를 치료하였다.’고 적혀 있다.      

적십자병원은 대한적십자사와 출발이 거의 같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위치는 북서영추문(지금의 경복궁 후문) 밖에 있었으며 1906년 10월 다시 지금의 원남동 남쪽으로 이전했다. 당시 적십자사가 그 규칙에 따라 환자를 치료한 것은 분명 하나 그 규모는 기록이 없어 살필 수 없다.     

또한 ‘대한국적십자사공포취지서’에는 창설 당시 고종이 적십자병원 건축비로 2만 환을 주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돈으로 얼마 동안의 공사기간을 거쳐 어떤 형태의 병원을 건축했는지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효심을 기린 정려 쌍홍문 효자동이 되다

자하문로24길 51 성주빌라 앞 보도에 있는 ‘쌍홍문터’ 표석. 효자동이란 이름이 유래한 연원이다.
자하문로24길 51 성주빌라 앞 보도에 있는 ‘쌍홍문터’ 표석. 효자동이란 이름이 유래한 연원이다.

자하문로24길 51 성주빌라 앞 보도에는 ‘쌍홍문터’ 표석이 있다. 표석에는 ‘쌍홍문은 조선 14대 임금 선조가 조원(趙瑗, 1544~1595)의 두 아들 희정(希正)과 희철(希哲)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내린 한 쌍의 정려문(旌閭門)이다. 효자동이라는 동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하였다.’고 적혀 있다.      

조원의 본관은 임천으로 판서 이준민의 사위고 조식의 문인이다. 1564년(명종 19) 진사시에 장원급제했고 1572년(선조 5)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이조좌랑, 삼척부사로 나갔다가 1593년 승지에 이르렀다. 효성이 지극했고 자손 교육도 엄했다. 효성이 부전자전이었던 셈이다.      

희철은 1589년(선조 22) 증광시 생원 2등 6위 합격, 증광시 병과 13위로 급제했다. 장남인 희정과 차남인 희철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어머니를 해치려 하자 몸으로 막다가 왜군 칼에 목숨을 잃었다. 그때가 향연 27세다.      

청와대 입구 무궁화동산에는 ‘김상헌집터’ 표석이 있다. 표석에는 ‘이 일대는 병자호란 당시 화의(和議)를 반대했던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집이 있던 곳으로, 그 후 안동(安東) 김씨가의 세거지(勢居地)가 되었다.’고 적혀 있다.      

김상헌은 조선시대 부제학, 대사헌, 예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570년(선조 3)에 태어나 1652년(효종 3)에 사망했다. 1596년 임진왜란 중에 실시한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관직에 진출했다.      

병자호란 때 예조판서로서 주화론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을 펴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안동으로 은퇴했다. 명을 공격하기 위한 청의 출병 요청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에 압송돼 6년 동안 감금됐다가 풀려났다. 효종이 북벌을 추진할 때 이념적 상징이 되기도 했다.      

김상헌은 서인 노론의 집권 이후 충절과 절개의 화신으로 남아 조선 말기까지 존경받았다. 1905년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에서도 ‘김청음(김상헌의 호)처럼 찢지는 못할 망정...’이라고 나올 정도다. 후사가 없어 양자를 들여 가문을 이어갔다, 양손인 김수항은 노론의 영수가 되었고 최명길의 손자 최석정이 소론의 영수가 된지라 대를 건너 두 집안의 대립구도가 다시 나타났다.     

이렇게 들인 양자로부터 이어진 김상헌의 종가는 조선이 망할 때까지 권문세가를 누렸다. 순조 시절부터는 아예 본격적으로 독주하기 시작했다. 김상헌의 후손들이 바로 조선 후기 세도정치의 상징인 신 안동 김 씨들이다. 그중에서도 장동 김 씨 일파다.     

조선 왕들의 생모 신위 모신 칠궁

김태휘 해설사가 칠궁에서 설명하고 있는 모습. 칠궁은 칠궁은 조선 왕들의 생모 7인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김태휘 해설사가 칠궁에서 설명하고 있는 모습. 칠궁은 칠궁은 조선 왕들의 생모 7인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이후 답사 팀은 칠궁과 청와대 경내의 역사문화자원을 둘러봤다. 칠궁은 조선 왕들의 생모 7인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1725년(영조 1) 영조가 생모이자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씨 신위를 모시고 숙빈묘라 하다가 뒤에 육상묘(毓祥廟), 육상궁으로 개칭된 곳이다. 그 뒤 1882년(고종 19) 불타 없어진 것을 이듬해 다시 세웠다.     

저경궁·대빈궁·연호궁·선희궁·경우궁 등 5개의 묘당을 이곳으로 옮겨 육궁이라 하다가 덕안궁도 옮겨와서 칠궁이라 하였다. 칠궁은 동서로 줄지어 있고 이에 따른 행랑, 2채의 재실 등이 배치돼 있다.      

동쪽으로부터 배열된 칠궁의 순서와 모셔진 신위의 내용을 보면 육상궁은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 연호궁은 추존된 왕 진종의 생모 정빈 이씨, 덕안궁은 영친왕의 생모 순헌귀비 엄씨,  경우궁은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 선희궁은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 대빈궁은 경종의 생모 희빈 장씨, 저경궁은 추존된 왕 원종의 생모 인빈 김씨 등이다.     

건물을 둘러싼 정원에는 냉천정, 초가집으로 된 정자, 늘어진 소나무, 긴 돌로 짠 연못과 축대, 벽돌담 등이 잘 어울려 있어 전형적인 우리나라 정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답사팀은 칠궁을 나와 청와대 정문으로 향했다. 휴일이라 청와대 방문객이 길게 늘어섰다.      

최고 권력의 공간 국민 품에 안긴 청와대

청와대영빈관을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찍었다. 
청와대영빈관을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찍었다. 

청와대는 종로구 청와대로1에 위치한다. 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이 건물은 대통령 집무실을 비롯해 회의실·접견실·주거실 등이 있는 2층 본관과 경호실·비서실 및 영빈관 등 부속건물이 있다. 정원과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후원, 연못 등의 미관을 갖추고 있다.     

1948년 8월 정부수립 후 1960년 8월까지 이승만 대통령 명명으로 제1공화국의 대통령 관저명 ‘경무대(景武臺)’로 불렸다. 이후 제2공화국 대통령으로 윤보선이 선출돼 입주하면서 청와대로 개명했다. 이 명칭은 대리석으로 된 본관 건물이 청기와로 이어져 있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청와대 터는 고려시대 남경의 이궁이 있던 곳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426년(세종 8)에 창건된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 밖으로 후원에 해당하는 이 지대를 경무대라 했다. 북악산 산록에 위치하여 서울 장안을 전망할 수 있는 이 경무대는 어영의 연무장이나 과거장, 친경에 사용됐다.     

일제강점 후 1927년 일제에 의하여 헐리고 일본인이 조선총독 관저가 들어섰다. 이곳을 제7·8·9대 조선총독이 관저로 사용했고 광복이 되어서는 조선주둔군 사령관 하지 중장이 사용하다가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한국정부로 이관돼 이승만 대통령 관저로 사용된 것이다.      

집무실과 관저로 사용되던 구 청와대 건물은 1993년 11월 철거됐다. 철거 뒤 그 자리를 옛 모습대로 복구시킨 뒤 옛날 경복궁을 지키던 수궁들이 있었다 하여 지금은 수궁터라 부르게 된 것이다.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대통령을 거쳐 갔다. 2022년 5월 10일 취임한 윤석열 대통령이 관저를 용산 국방부 청사를 옮기고 기존 청와대를 국민들에게 개방함에 따라 대통령 관저로서의 기능을 다했다. 답사는 청와대 입구로 들어가 춘추관을 마지막으로 모두 마쳤다.      

<참고문헌>
- 2023년 역사문화유적 표석 정비 계획, 서울시 문화재정책과, 2023
- 서울시 표석현황, 서울시 역사문화재과, 2022
- 디지털 인문학과 시민 교양 : 서울시 역사문화유적 표석 관련 사료 디지털화의 필요성 및 그 방안, 장진엽 성신여대 한문교육과 조교수, 2022
- 역사문화유적 표석 :사료조사 상․하, 연세대산학협력단, 서울특별시, 2019
- 역사문화유적 표석 사료집, 서울특별시 역사문화재과, 2015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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