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리얼>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요즘 영화계에서 가장 뜨거운 단어는 ‘리얼’일 듯하다. 김수현의 영화 ‘리얼’(이사랑 감독, 코브픽쳐스 제작) 때문이다. 중국의 알리바바 픽처스가 115억 원을 투자한 이 영화는 개봉 초 반짝했지만 이내 “‘클레멘타인’에 버금가는 한국영화 중 최악”이라는 입소문을 타고 곤두박질치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관객의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평일 하루 2만여 명이 볼 정도. 누적관객수도 어느덧 40만 명을 돌파했다. 물론 장점도 있다. 일단 비주얼은 훌륭하다. 화려한 조명과 장식 등 미술에 굉장히 공을 들인 기색이 역력하다. 김수현의 1인2역 연기도 썩 좋은 편이다. 설리도 별 필요성 없는 베드신을 매끄럽게 소화해냈다. “여긴 너무 밝아. 침대로 가”라는 대사 한 마디만 남을 뿐이지만 존재감의 임팩트는 빼어났다.

▲ 영화 <리얼> 스틸 이미지

그런데 그게 전부라는 게 문제. 영화는 대중문화 콘텐츠 중 가장 포괄적인 종합예술이라고 한다. 미장센 조명 사운드 스토리 배우, 그리고 그들의 연기력 등이 모두 조화로워서 관객들에게 잠시나마 영화가 사실인 양 착각하게 만드는 게 선결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매끄러운 시나리오다. 각 시퀀스가 개연성과 타당성을 갖고 연계돼 완벽한 플롯을 이루는 게 기본기다.

‘리얼’의 가장 중요한 소재는 마약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각 시퀀스는 마약에 취한 듯 몽롱해 연결고리가 나약하고, 캐릭터의 정립도 미로를 헤매는 듯하다. 갑부인 붕대사나이의 정체가 오리무중인가 하면 노형사 이경영의 투입은 생뚱맞고 어리둥절하다. 물론 영화는 감독의 연출철학이 앞장서는가 하면 관객의 시각차가 뚜렷하기 마련. 관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나만 좋다면 남이 악평을 해도 즐기면 된다’는 의미이거나, 김수현에 대한 무조건적인 애정인 듯하다.

▲ 영화 <리얼> 스틸 이미지

그런 방어기제의 합리주의 혹은 강력한 주관은 김수현에게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는 수많은 관객과 관계자가 지적하는 이 영화의 문제점을 직관으로 부정하는 듯하다. 영화의 개봉과 맞물려 홍보 차 많은 매체들과 인터뷰를 했는데 한결같이 영화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보내고 있는 게 근거다.

“10년 동안 연기하면서 나를 깨고 망가뜨리면서 학습해 농축된 모습이 ‘리얼’에 남김없이 들어갔다. 욕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앞으로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지만 ‘리얼’을 계속 사랑할 것 같다. 시간이 흐른 뒤 지금의 나를 돌아봤을 때 20대에 ‘리얼’을 했다고 기억되길 바란다. 그래서 ‘리얼’이 자랑스럽다”

한 매체와의 인터뷰다. 여기서 그는 이종사촌형인 이 감독에 대해 “가장 믿음이 가는 눈과 귀를 가진 사람”이라며 그가 준 ‘리얼’의 시나리오에 대해 “처음엔 영화의 정답을 알지 못했지만 계속 읽다보니 찾았다. 그 과정이 통쾌했다”고 평했다.

▲ 영화 <리얼> 스틸 이미지

모든 감독은 연출화법이나 영화철학이 다 다르기 마련이다. 비슷하더라도 원칙이나 법칙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다수의 감독이 리허설과 콘티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홍상수나 김기덕은 촬영 당일 시나리오나 콘티를 내놓는다. 그래도 해외에선 극찬을 받는다. 임권택은 한때 다른 영화를 잘 안 보는 감독으로 유명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사랑은 데뷔작임을 떠나 갑작스레 메가폰을 잡았다. 그의 출발은 제작사의 대표였다가 이정섭 감독이 물러난 자리에 앉아 연출은 물론 편집까지 개입했다고 한다. 데뷔작에서 완성도를 인정받는 감독도 있지만 봉준호마저도 ‘플란다스의 개’로 흥행에 쓴맛을 봤다. 박찬욱은 혹평 속에 2편을 연속으로 말아먹고 나서야 ‘공동경비구역 JSA’로 일어섰다.

‘리얼’의 혼란스러움은 각색 각본 연출을 해낸 이정섭의 스타일일 수도, 후반 연출한 이사랑의 취향일 수도 있다. 영화가 꼭 다수의 관객에게 친절해야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극장상영용 장편상업영화라면 투자자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감은 지키는 게 상도덕이다. 그런 면에서 누가 뭐래도 두 감독은 투자자나 관객에게 무책임했다.

▲ 영화 <리얼> 스틸 이미지

그건 김수현 역시 마찬가지. ‘리얼’에서 배우로서 그가 보여준 연기력은 놀라웠다. ‘드림 하이’에 나오던 김수현이 아니었다. ‘별에서 온 그대’의 아이돌 스타 같은 이미지도 벗었다. 그가 그간 쌓은 연기력이 농축된 모습이라고 자부심을 가질 만했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자긍심은 고찰의 여지가 남는다. 그는 이제 30살이다. 아직 영화에 대해 충분하게 알 나이나, 이러쿵저러쿵 평가할 경력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백 보, 천 보 양보해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누가 뭐래도 그는 대중과 소통하고, 그들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하는 연예인이다. 거의 모든 관객이 혹평을 해대는 영화를 찍은 것을 자랑스럽다고 고집을 부리는 불통은 뛰어난 연기력마저 희석시킬 여지가 있다.

▲ 영화 <싸울아비> 스틸 이미지

한때 청춘스타였던 최재성이 2001년 주연을 맡은 ‘싸울아비’라는 영화가 있었다. 언제 개봉됐는지도 모른 채 소리도 소문도 없이 막을 내렸다. 누리꾼은 ‘리얼’을 ‘클레멘타인’에 비교하지만 ‘싸울아비’ 역시 정말 ‘만만치 않은’ 영화였다는 평단의 혹평을 들은 바 있다. 최재성도 이 영화에 대해 잘 언급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대중은 ‘클레멘타인’은 알아도 ‘싸울아비’란 영화가 있었는지조차 모른다.

헤겔은 일반적 존재를 아직 성숙하게 발전되지 않고 자기반성이 결여된 직접태 잠재태 무자각태 등의 즉자로 봤다. 즉자가 다른 것과의 교류 등의 경험을 통해 실체에서 주체로, 의식의 대상에서 자기의식의 대상으로 전환됨으로써 대자에 이른다고 했다.

그래서 그의 철학을 정리한 ‘미학’은 예술의 미적 개념을 ‘헛된 주관적 표상이 아니라 감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속에서 실현된 이념, 즉 이념의 감각적인 가상화’라고 썼다. 또한 ‘인간적 실천을 거쳐서 모든 예술의 근거와 미적 내용을 결정한다’고 보고, ‘전신적인 활동을 매개로 해 내부로부터 이성적인 것을 이끌어내 진정한 외부적 형상으로 현출시켜 즉자대자적으로 창조하는 게 예술의 목적’이라고 정의했다. 즉, ‘예술은 절대정신이며 객관정신’!

물론 헤겔의 변증법이 금과옥조는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변증법에 반기를 든 대표적인 물결이다. 만약 김수현이 군복무를 마치고, 직접 투자 제작 연출 등을 경험하고, 또 이준익 감독이 왜 ‘사도’를 ‘정립-반정립-종합’의 법칙으로 완성하려 했는지 이해한 다음에도 ‘리얼’에 대한 강력한 신뢰를 잃지 않는다면, 쓴소리를 쏟아냈던 수많은 관계자는 이 영화에 대해 고개를 숙여야하고, 대중은 김수현을 아티스트로서 인정해야할 것이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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