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주혁 소장의 성평등 보이스] 고정관념의 대표적인 경우가 성별(역할) 고정관념이다. 성별에 따라 정해진 성 역할대로 살아가도록 기대하고 제한하는 사고방식이다. 개인별 특성을 무시한 채 남성은 누구나 이래야 하고, 여성은 누구나 저래야 한다고 천편일률적인 기준을 들이대는 것이다.

‘성’(性)이란 우리말에는 세 가지 뜻이 담겨 있다. 신체적으로 타고난 성(sex)과 사회·문화적으로 길러진 성(gender), 성적 행위와 태도 등을 가리키는 섹슈얼리티(sexuality)다. 그 중 성역할 고정관념은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을 강요하는 젠더와 직결된다. 우리 사회에서는 남자아이에게는 배냇저고리부터 이불과 가방에 이르기까지 파란색 계열로 도배를 한다. 로봇, 총, 자동차 장난감을 사주며 울거나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가르친다. 반면 여자아이들은 분홍색 옷과 가방, 인형이나 소꿉놀이 장난감을 받으며 함부로 나대지 않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얌전하고 예쁜 아기구나.”, “씩씩하고 튼튼하게 생겼네.”처럼 칭찬의 말이 성별에 따라 다르다. 취미와 운동, 직업도 성별에 따라 적합 여부 분야가 정해져 있는 듯하다. 강인함과 박력, 적극성, 독립성 등이 남성적 가치로, 연약함과 온유함, 순종, 의존성 등이 여성적 가치로 제시된다. 남성은 바깥사람이자 생계부양자로서 데이트와 신혼집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고 압박을 받는다. 반면 여성은 집사람으로서 집안일과 육아를 책임져야 한다고 당연시한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말했을 정도다.

희한하게도 여자들만 있는 여학교에서는 무거운 것도 여자들이 들고, 남자들끼리 야외로 놀러 가면 남자들도 요리를 한다. 그러다가 남녀가 함께 있으면 무거운 건 남자가 들고, 요리는 여자가 하는 게 당연시된다. 합리적이라면 필요한 분업일 수도 있지만, 문제는 그것이 선택의 여지없이 사회적으로 강요된 것이라서 합리적이지 않고 불만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요즘처럼 여성들을 성적 대상으로 삼아 각종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여성에게 순종만을 강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여자는 예쁘고 날씬해야 한다고 고정관념을 주입하다 보면 많은 여성들이 무리한 다이어트로 질병을 얻고 성형수술에 의존하는 사회로 치닫게 된다. 남성들이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면 병이 될 수 있다. 남성들도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움을 청하는 것이 나약한 게 아니라 당연한 일이다. 선진국에서는 장난감의 성별화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성 역할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아이들은 창의성에 상당한 제약을 받는다. 자녀들의 창의성을 북돋워주고 싶다면 성 역할 고정관념을 강요하거나, 부모들이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야 한다.

교육심리학자 산드라 벰에 따르면 실험 결과 대학생의 35%가 자신과 다른 성의 특성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 역할 고정관념이 강하지 않을수록 창의성이 뛰어나고, 심리적 안정을 누리며, 대인관계가 원만하다는 것이다.

부부 중 한쪽만 수입 노동을 할 경우 집안일과 육아를 누가 더 많이 해야 하나? 맞벌이나 은퇴부부라면 어떤가? 맞벌이라면 공평하게 나눠서 하고, 남자든 여자든 집에 있는 쪽이 더 많이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물론 자녀가 미취학일 경우에는 부부가 총력전을 펼쳐야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직 그렇지 못 한 게 현실이다. 이제는 대표적인 부부 고용 형태가 맞벌이인 만큼 ‘남성은 바깥일, 여성은 집안일’이란 성 역할 고정관념은 시대에 맞지 않는다. 한참 전에 용도폐기 됐어야 한다. 남성들도 생계부양자의 부담에서 해방돼야 한다. 바깥일을 하는 여성을 ‘집사람’ ‘안사람’이라고 말하는 것도 부적절하다. ‘배우자’ ‘동반자’ 등 좋은 말이 많지 않은가.

물론 시대 변화에 따라 성역할 고정관념도 변하고는 있다. 그러나 그 속도가 너무 느리다. 그러다 보니 문화 지체(Cultural lag) 현상이 생긴다. 성별에 따른 취미나 직업 장벽이 줄어들고는 있으나 정작 내 아들이 간호사나 발레리노가 되겠다고 한다면, 내 딸이 중장비 기사나 축구 선수가 되겠다고 한다면 흔쾌히 지지할까. 아니면 불편한 마음에 반대를 할까. 환경이 이미 변했고 머리가 변해도 가슴과 손발은 여전히 변하는 중인 과도기인 것이다. 그에 따른 부작용이 심하다. 변화 속도를 높일 필요가 있다.

▲ 김주혁 가족남녀행복연구소장

[김주혁 가족남녀행복연구소장]
여성가족부 정책자문위원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양성평등․폭력예방교육 전문강사
전 서울신문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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