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주혁 위원의 오늘보다 나은 세상] 자영업자가 미성년자에게 술과 담배를 판 사실이 드러나면 과징금이나 영업정지 등 처분을 받게 된다. 만일 신분증 위조 등의 방법으로 성인인 것처럼 속인 청소년에게 판 경우라면 구제받아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제까지는 속절없이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부가 방치한 셈이다. 이를 악용해 술값을 안 내거나, 신고하는 청소년들 때문에 억울한 피해를 입는 자영업자들이 있다. 이처럼 불합리한 문제를 정부가 뒤늦게나마 해결하기로 했다. 최근 국민제안 정책화과제를 발표하면서 이의신청을 하면 최종 유죄 판결 전까지 처분을 유예할 수 있도록 관련 지침을 마련하기로 했다. 자영업자의 설명과 CCTV 조사 등을 통해 고의성이 없는 것으로 인정되면 구제하겠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술 담배를 구입한 청소년을 추적해 교육을 받도록 할 방침이다. 정부는 또 다른 사람의 주민등록증 이미지 파일이나 복사본을 부정하게 사용하는 경우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주민등록법을 개정해 최근 시행을 시작했다. 위변조된 주민등록증과 모바일 확인서비스의 식별요령 등을 음식점이나 편의점 등에 적극 알릴 계획이다. 환영할 만한 일이고 만시지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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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정보를 악용한 범죄행위가 기승을 부리는 상황에서 기관 등의 개인정보 요구가 과도한 것도 국민을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런 점에서 개인정보보호위원회와 법제처가 행정·사법 분야 현행 법령 중 개인정보 침해요인이 있어 정비가 필요한 176개 법령을 발굴해 조속히 개선하기로 한 것도 반갑다. 자격증 발급 시 신분증으로 신분 확인이 가능함에도 사본 제출을 요구하거나, 관인대장 등에 생년월일로 업무처리가 가능함에도 주민등록번호를 적게 하거나, 부정청탁·외부강의 등 신고 사무에 불필요한 건강 등 민감정보 처리를 하는 경우 등과 관련한 처리 근거 법령조항을 삭제하겠다는 것이다. 개인정보를 과도하게 요구하지 않는 문화가 공공기관뿐 아니라 사회 전체로 확산되길 기대한다.

이처럼 국민들이 실생활에서 겪는 불편을 발벗고 나서서 개선하는 것이 행정부나 입법부가 시급히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아직도 정부가 긁어주지 못하는 국민들의 가려운 곳이 많은 실정이어서 안타깝다.

2021년 스토킹처벌법 시행으로 피해 신고가 급증하면서 교제(데이트)폭력 피해 신고도 더불어 급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련 법이 없어서 가해자 처벌과 피해자 보호의 사각지대가 존재한다. 상담 치료 법률 피난처 등 피해자 지원이 스토킹에 준해서 이뤄지지만 응급/잠정조치 대상에서 제외되는 등 허점이 많다. 가정폭력처벌법과 피해자보호법의 적용 대상에 연인을 포함시키든, 교제폭력처벌법과 피해자보호법을 제정하든 시급히 개선돼야 한다.

동의한 성관계는 범죄가 아니다. 반면 동의하지 않은 성행위는 범죄다. 폭행이나 협박이 수반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권력이나 힘이 센 사람 앞에서 주눅이 들어서 저항을 못하고 당할 수도 있다. 폭행 협박이 없는 성행위라고 해서 모두 동의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나 형법은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 또는 강제추행한 자를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에 따르면 2022년 1년 동안 강간 사례 4,765건을 분석한 결과 62.5%는 폭행과 협박 없이 강요, 속임이나 회유 등에 의한 것이었다. 동의하지 않은 성행위를 당했음에도 강간으로 인정되지 않아 처벌받지 않은 사례들이 적지 않은 실정이다. 당사자나 그 가족이라면 얼마나 분통 터질 일인가. 그래서 비동의간음죄 도입이 시급하다.

스웨덴 독일 영국 등 유럽국뿐 아니라 일본도 올해 비동의간음죄를 도입했다. 강제성교죄(강간죄)를 부동의성교죄(비동의간음죄)로 개정한 것이다. 성립 기준도 8가지로 나눠 제시했다. 폭행 또는 협박을 이용하거나 이를 당한 것 외에 동의하지 않는 의사를 형성, 표명 또는 완수할 틈이 없는 것 등도 해당한다. △심신의 장애를 발생시키는 것 또는 그것이 있는 것 △알코올이나 약물을 섭취하게 하는 것 또는 그 영향이 있는 것 △수면 및 그 밖의 의식이 명료하지 않은 상태로 만드는 것 또는 그 상태에 있는 것 △예상과 다른 사태에 직면하게 하여 공포를 일으키거나, 경악케 하는 것 또는 그 사태에 직면하여 두려움이 크거나 경악하고 있는 것 △학대에 기인하는 심리적 반응을 일으키게 하거나 그것이 있는 것 △경제적 또는 사회적 관계상의 지위에 기초한 영향력으로 인하여 받게 될 불이익을 우려하게 하거나 이를 우려하고 있는 것 등이다.

물론 성범죄 재판에서 쟁점은 대부분 피해자 동의 여부에 모아지고 있고, 폭행·협박이라는 용어 대신 심리적 압박이나 항거 불능 상태 등 유형력이라는 용어가 더 많이 쓰이는 추세이기는 하다. 폭행·협박 뿐 아니라 더 넓은 범위에서 강제 성관계로 나아간 영향력이 있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그러나 수사관이나 판사에 따라 형법 조항을 이유로 동의 없는 성행위가 처벌받지 않는 경우가 존재하는 현실은 마땅히 개선돼야 한다. 강간죄나 강제추행죄의 기준이 폭행 협박이 아니라 동의 여부로 바뀌어야 한다.

‘아파트서 8세 아이 던진 돌에 70대 사망, 누구도 처벌 안 받아’.

‘중학생 딸이 성폭행 당했는데 부모는 사과도 없어, 촉법이라 괜찮아’.

이같은 기사 제목을 보면 가슴이 답답하다. 피해는 발생했는데 아무도 처벌받지 않고, 가해자나 그 가족조차도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현실은 분명히 문제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슬픔 가운데서도 신경을 곤두세워가면서 미성년 가해자의 부모 등을 상대로 민사 손해배상 소송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미성년자라도 살인이나 과실치사 정도는 형사처벌이 가능하도록 하거나, 피해자가 신경 쓰지 않아도 자동으로 보상받도록 하는 등의 개선책이 마련되면 좋겠다. 법체계상 어쩔 수 없다고 방치하지 않고 묘안을 찾아내는 정부를 기대한다.

김주혁 미디어파인 논설위원
김주혁 미디어파인 논설위원

[김주혁 미디어파인 논설위원]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양성평등교육․폭력예방교육 전문강사
가족남녀행복연구소장
전 서울신문 선임기자, 국장
전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초빙교수, 여성가족부 정책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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