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7호실>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7호실'(이용승 감독)은 제목만 보고 ‘7번방의 선물’ 같은 휴먼코미디나 혹은 미스터리액션 등을 상상해선 곤란하다. 결코 가볍거나 쉽지 않은 블랙코미디다. 킬링타임용 심심풀이를 의도한다면 패스, 감독과 함께 현실을 고민해보고자 한다면 도전!

40대의 두식(신하균)은 서울 압구정동 로데오거리에서 할리우드 DVD방을 운영하며 여기서 먹고 잔다. 대학생 태정(도경수)은 ‘알바생’. 말이 할리우드지 사실은 젊은 연인들이 은밀하게 사랑을 즐기는 곳이다. 하지만 하루에 손님이 1~2쌍밖에 안 올 정도로 파리만 날린다. 트렌드가 스쳐 지나간 압구정동에 빛바랜 DVD방이 의미심장하다.

두식은 결혼해 김포에서 채소가게를 했지만 망했고, 아내는 그런 그를 가차 없이 차버리고 떠났다. 전셋집을 처분하고 누나한테 빌린 2000만 원까지 보태 권리금 1억 원이란 거금을 투자해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겠다는 절실한 마음으로 이곳에 들어왔지만 풍요가 넘쳐흐르는 압구정동과 그의 운명은 애당초 인연이 없었다.

▲ 영화 <7호실> 스틸 이미지

뒤늦게 부동산중개업자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았지만 누굴 탓할 수도 없는 상황. 전전긍긍하는 와중에 건물주는 보증금과 월세를 올려달라고 독촉한다. 월세는 물론 각종 공과금마저 밀리자 두식은 밤에 대리운전을 하며 나름대로 안간힘을 쓰지만 희망이 안 보인다. 결국 패배를 인정한 그는 권리금을 깎아서라도 매도를 하겠다며 부동산에 매물로 내놓는다.

태정은 학자금 대출금 1800만 원을 갚아야 한다. 넉넉지 못한 부모에게 손 벌릴 생각도 없다. 그런데 월급은 2달이나 밀렸다. 아끼는 노트북을 전당포에 맡기고 급한 불을 끄지만 미봉책. 결국 은밀하게 알고 지내던 마약밀매상 타투(김도윤)를 찾아간다.

경찰의 추적을 받는 타투는 한 꾸러미의 마약을 태정에게 2주 동안 맡아달라며 거액을 제시한다. 당장 돈이 급한 태정은 마약을 들고 와 7호실에 감춘다. 할리우드를 내놓은 지 5개월이 넘도록 매수자가 나타나지 않자 두식은 빠른 매도를 위해 빠릿빠릿한 조선족 한욱(김동영)을 ‘알바생’으로 추가로 고용한다.

▲ 영화 <7호실> 스틸 이미지

의외로 수완이 좋은 한욱의 활약에 힘입어 손님이 슬슬 늘기 시작해 가게의 분위기가 살아날 즈음 매수의향자가 나타난다. 안정적으로 노후를 보낼 방법을 찾던 정년퇴직한 전 교감선생(김종구)이 할리우드를 보고 만족한 것. 그런데 계약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청소를 하던 한욱이 감전으로 급사한다.

패닉상태에 빠진 두식은 휴대전화로 119를 눌렀다 이내 통화정지 버튼을 누른 뒤 한욱의 시신을 7호실에 숨기고는 여러 개의 자물쇠를 채운다. 사망사고가 났다는 게 알려지면 계약이 깨질 게 분명한 상황. 어떻게든 계약만 성사시킨 후 뭘 하든 해야겠다는 얄팍하지만 나름대로 그에겐 절실한 해결책이 고작 그것이었다.

마약을 살 사람이 나타났으니 가져오라는 타투의 말에 할리우드에 간 태정은 깜짝 놀란다. 7호실이 폐쇄된 것. 어떻게든 7호실을 열어야 하는 태정과 어떻게든 그걸 막아야 하는 두식이 생사를 건 신경전을 펼치고, 설상가상으로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는 듯 형사까지 나타나는데.

▲ 영화 <7호실> 스틸 이미지

등장인물들은 모두가 ‘을’이다. 그렇다. 이 영화는 국민의 대다수인 ‘을’의 애달픈 현실을 블랙코미디로 풀고자 한다. 취업이 힘들어 어렵게 창업을 하지만 절반이 1년 안에 문을 닫고, 그런 자영업장에서 ‘알바’를 하는 이들 역시 열악한 급여와 근무환경을 감수하고서라도 취업을 하고 가게가 망하면 또 새로운 가게를 찾아 살아가야 하는 처참한 경제상황을 말하고자 한다.

흔히 대리운전기사를 부르면 추레한 차림새의 늙수그레한 남자가 올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지만 현실은 많이 다르다. 깔끔한 옷차림에 훤칠한 외모의 30대 젊은이가 흔하다. 그들에게 꽤 심도 있는 시사이슈를 화두로 던질지라도 매끄러운 답변이 술술 흘러나온다. 배울 만큼 배웠다는 증거다.

그들이 자야 할 시간에 남의 승용차의 운전대를 잡는 이유는 대학을 나와도 취업이 안 되고, 그래서 창업을 했다 실패했거나, 아예 그럴 소자본마저 없어 포기한 데 있다. 영화는 서울의 늦은 밤 자동차의 불빛들이 반짝이는 자동차전용도로의 드론 부감촬영으로 시작된다. 정장차림으로 운전대를 잡은 두식으로 컷이 바뀐다. 자신의 차가 아니다. 대리운전 중이다.

▲ 영화 <7호실> 스틸 이미지

마지막은 두식이 운전하는 경차가 장식한다. 그마저도 자가용이 아니라 임시로 빌린 ‘대포차’다. 뭘 잔뜩 실었는지, 아니면 초소형차라 그런지 뒷문이 닫히지 않아 노란 테이프를 덕지덕지 붙여 간신히 임시로 조치한 상황.

이 영화의 주제는 말미에 태정이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뭐 (세상이) 이렇게 ‘ㅈ’ 같냐”고 자포자기의 한탄을 토해내는 데 함축돼있다. ‘을’은 아무리 몸부림쳐봐야 팍팍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두식은 가게 안에 일본의 고양이 장식물을 마치 불상처럼 모셔놓고 “제발 부자 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를 올린다. 디테일만 다를 뿐 우리 이웃이자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경차는 ‘을’이 가진 경제력의 한계고, 그 문을 닫을 수 없을 만큼 넘치는 짐은 ‘을’이 바라는 경제적 목표다. 경차의 저장능력에 아주 약간 넘치는 그 ‘욕심’마저도 이룰 수 없는 게 냉혹한 현실이라는 이 메타포는 참으로 보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두식의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시퀀스는 정말 흔하게 볼 수 있는 우리의 기도문인데 이는 사실 엄청난 ‘떼부자’를 바라는 게 아니라 먹고사는 데 아무런 걱정이 없을 만큼만 안정적인 벌이를 달라는 것이다.

▲ 영화 <7호실> 스틸 이미지

수십 억, 수백 억 원을 벌 수 없다는 현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직전만큼만 벌어서 노후걱정도 안 하고, 자식에게도 떳떳할 수 있을 만큼 유산을 물려주게끔, 딱 그만큼만 벌게 해달라는 간절한 애원이다.

한껏 꿈에 부풀어 미래를 설계할 태정에게선 단 한 번의 웃음도 찾아볼 수 없다. 늘 불만스럽고, 외로우며, 뭔가에 쫓기는 듯한 불안한 표정으로 일관한다. 애인도, 친구도, 취미도 없다. 습관적으로 데모테이프를 연예기획사에 보내는 게 유일한 희망이라면 희망이지만 허황된 기대는 하지 않는다. 지극히 관성적인 행동일 따름이다.

1970년대엔 유소년부터 학생을 향한 “넌 꿈이 뭐니?”라는 질문이 일상이었다. 십중팔구 대통령-판사-검사-의사 등의 답이 나왔다. 지금은 아예 그런 질문조차 사라졌다. 대통령의 뒷모습이 안 좋고 변호사가 손가락을 빠는 현실 때문일까, 아이들의 꿈을 알 수 없게 됐다. 그게 아니다. 아이들이 자신의 꿈이 뭔지 알 수 없게 됐거나, 아예 꿈도 못 꿀 만큼 삶이 퍽퍽해진 이유다. 100분. 15살 이상. 11월 15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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