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리틀 포레스트>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국민 주권 사상, 프랑스 혁명, 미국 독립전쟁 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장 자크 루소는 ‘모두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주장했다. ‘참다운 삶을 위해 가장 적절한 환경은 고결한 야만’이라는 뜻. 여기엔 평등한 인권과 이타적 배려라는 유토피아적 사상과 이념까지 내재돼있다.

일본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 ‘리틀 포레스트’(임순례 감독)는 감상 직후 막걸리가 매우 당긴다는 점에선 얼핏 최불암 대신 루소가 끼어든 KBS1 ‘한국인의 밥상’ 같지만 막걸리에 불콰해질 즈음엔 저마다 철학자가 될 만큼 심오하고 깊은 상념과 사색을 유도한다.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독립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시골 소녀 혜원(김태리)은 수능시험을 보자마자 유일한 식구 엄마(문소리)에게 뒤통수를 맞는다. 뭔지 모를 말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은 편지 한 장만 달랑 남긴 채 엄마가 먼저 떠난 것.

서울에서 대학을 마친 혜원은 남자친구와 함께 임용고시에 응시했지만 남자친구는 붙고 자신은 떨어졌다. 힘든 편의점 아르바이트 생활 등 여러 가지로 삶이 피폐해진 한겨울 그녀는 모든 걸 팽개친 채 고향 집으로 돌아온다.

죽마고우인 재하(류준열)는 지방대를 졸업하자마자 취업에 성공하지만 금방 때려치우고 아버지를 이어 농부가 됐고, 전문대를 나온 은숙(진기주)은 농협에 취업했다. 재하는 밤이 무서운 혜원에게 “체온을 가진 건 모두 도움이 된다"라며 어린 진돗개 오구를 선물로 준다.

▲ 영화 <리틀 포레스트> 스틸 이미지

잠깐 머물 생각이었던 혜원은 어느덧 농사 등의 자급자족 생활에 잘 적응해간다. 그렇게 사계절을 거치는 동안 세 친구는 때론 다투고, 때론 묘한 삼각관계를 형성하는 가운데 서로가 서로의 버팀목이 되지만 갑자기 혜원이 짐을 싸는데.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친숙한, 그러면서 누구나 꿈꾸는 그런 귀촌 생활이 매우 아름답고 현실적으로 펼쳐진다는 점에선 흡사 그림 좋은 다큐멘터리 같다. 그렇다고 고리타분하다고 지레짐작하면 영화에 대한 결례. 일단 세 친구의 평범한 듯하지만 매우 디테일한 심리 묘사와 관계태가 낳은 에피소드와 대사가 무척 재미있다.

억지로 웃기려 하지 않아 따뜻하다. 묘한 삼각관계가 펼쳐질 듯한 아주 자연스러운 구조는 예상을 보기 좋게 벗어나 뿌듯하다. 혜원이 홀로서기를 준비하고 인생의 참뜻을 깨달아가는 과정에서 직접 키운 작물로 요리해 먹는 모습은 이 땅의 모든 자연에 대한 찬양과 경배다.

외양으로 보여주는 건 치열한 경쟁의 삶에 지친 이 땅의 청춘들의 사계절을 통한 힐링이지만 사실 가장 큰 주제는 아직 여고도 졸업하지 않은 외동딸을 두고 집을 나간 비정한(?) 엄마가 안고 있다. ‘과연 그녀는 왜 그랬을까?’라는 궁금증은 러닝타임 내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엄마는 아빠와의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에게 “얼마나 잘 사는지 보여주겠다”라고 선언하고 집을 나왔다. 혜원 나이 때 즈음일 것이다. 처녀 때 품었던 꿈을 갈무리한 채 ‘여자’가 아닌 아내와 엄마로서 살았을 것이다. 남편은 금세 병사했고, 이제 딸은 어느 정도 자랐다.

▲ 영화 <리틀 포레스트> 스틸 이미지

헤겔은 테제(긍정, 정립)-안티테제(부정, 반정립)-진테제(부정의 부정, 종합)에, 하이데거는 존재방식을 명확히 하는 존재론적 존재론에 각각 천착했다. 저명한 철학자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나이를 먹거나 특별한 계기가 생기면 존재론적 고뇌에 빠지는 게 사람이다.

영화는 혜원 대 재하&은숙, 혜원 대 엄마의 관계태를 통해 이 시대 젊은이 혹은 인류의 존재태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 과정에 ‘우리 것이 좋은 것’이라는 물신론이 개입하고, 자립이란 테제의 과정을 통해 ‘과연 참된 인생이란 게 뭔가’라는 진테제의 사계절로 관객을 인도한다.

어느 누구건 한자리에서 나고 자라 죽을 순 없다. 일부 식물마저도 옮겨심기(이식)와 한때 옮겨심기(가식)를 거쳐 비로소 정착하는 아주심기(정식)의 과정을 밟는다. 감독이 아주심기의 모델로 양파를 설정한 건 나름의 의미가 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라는 말이 있다. 양파는 까고 또 까도 속을 모른다. 하지만 결국 사람은 사람이다. 감독은 성선설을 믿은 루소와 뜻을 함께하는 것 같다.

▲ 영화 <리틀 포레스트> 스틸 이미지

대사를 즐기는 것만으로도 값어치는 관람료의 수십 배는 충분하다. “힘든 농사가 좋냐”라는 혜원의 우문에 재하는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편해. 적어도 농사에 사기나 잔머리는 없거든. 회사에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그런데 내 삶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란 현답을 낸다.

“잡초는 마음의 걱정처럼 뽑고 뽑아도 또 자란다”라고 푸념하는 혜원은 결국 “모든 건 타이밍, 즉 기다림”이란 엄마의 말이 무슨 뜻인지 사계절을 고향에서 보낸 뒤에야 깨닫는다. 그래서 그녀는 “떠나온 게 아니라 돌아온 것”이란 결론을 얻는다.

요소요소에 유머와 코미디가 풍부해서 지루할 틈이 없다. 형식적인 큰고모의 언행에 “고모는 고모다, 이모 아니다”라는 혜원의 독백부터 시작돼 은숙이 큰 역할을 해낸다. 재하를 짝사랑한 그녀는 노골적으로 혜원을 견제하지만 재하의 전 여자친구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망연자실해 “우리 선조 대단해. 어떻게 수백 년 뒷일을 예상하고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라는 속담을 만들었을까”라는 식이다.

그녀는 혜원의 조언대로 회식 때 노래방에서 탬버린으로 원수 같은 부장의 머리통을 후려갈기고 공교롭게도 며칠 후 부장은 다른 지점으로 발령을 받는다. 그러자 혜원은 “은숙이 부장 머리를 때린 뒤 제거 대상이 나로 바뀌었다”라고 혼잣말을 한다. 재하 때문인 것.

갑자기 혜원이 사라지자 은숙은 “통장을 스쳐 지나가는 월급 같은 년”이라고 원망을 한다. 혜원의 “겨울 술 최고의 안주는 알싸한 추위와 같이 나눠 마실 사람”이란 코멘트가 참으로 긴 여운으로 남는다. 감독이 모든 영화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 즉 관계태다.

김태리는 20대 때 이미 연기파였던 전도연을 연상케 한다. 류준열이야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고 진기주는 대단한 발견이다. 단언컨대, 21세기 한국영화 중 힐링용으로뿐만 아니라 깊이, 재미, 비주얼, 철학 등으로도 최고다. 잘살 것이냐, 잘 살 것이냐! 103분. 전체. 2월 28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