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북파요원 각군 형무소 무기수만 뽑아 결정

다음은 이 사건과 관련, 실종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회고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사건의 내용은 내가 가장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문제의 난동자들을 처음부터 관리한 것은 중앙정보부장 재임시의 나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김신조 일당의 무장공비 청와대 습격사건으로 북한에 허를 찔렸다고 생각, 보복전을 펴기로 하고 특공결사대를 조직하기로 결심했다. 박정희는 이 작전계획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재가를 내려주었다.

나는 1.21사건 직후 군첩보부대(HID)만을 더 이상 믿고 있을 수가 없다고 판단해 휘하 중정의 대북한 공작책인 제1국장 이철희(李哲熙)를 불러 야단을 쳤다.

“즉시 결사대를 조직하여 김일성 관저와 허봉학의 대남공작 지휘본부를 기습하여 묵사발을 만들어야겠소. HID와 협조하여 강훈련을 시키시오.”

이철희 국장은 우선 각 형무소에 사형수나 무기수로 극형에 처해져 복역하고 있던 죄수들을 상대로 선발했다. 훈련은 HID부대장 조대성(趙大成)준장이 담당하고 훈련에 필요한 특수장비의 조달과 급식 및 경비는 중앙정보부가 담당했다. 또 우리는 훈련장소로 서해안에 적절한 무인도를 발견하고 그들을 수용했는데 그 섬이 바로 실미도이다.

우리는 실미도에 특수훈련 장소를 개척, 김일성 관저와 허봉학의 대남공작 지휘본부의 모형을 가건축을 해놓고 6개월간의 맹훈련에 들어갔다. 이들 결사대는 평양 투입시 완전히 북한 인민군 복장으로 위장하기로 했으며 이들의 공수작전은 미 CIA가 책임져서 낙하산 투입을 시도하는 한미합동으로 작전을 전개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는 것인데 당시 남북비밀회담과 관련해 박 대통령이 실행자체를 보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회고록에서 김형욱씨는 주장한다. 그러나 김형욱씨의 증언은 검증되지 않아 얼른 납득하기에는 어렵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이후락씨였다.

그건 그렇다치고 왜 이들은 난동을 부렸을까. 까닭이 궁금해진다. 이에 대해 당시 공군참모총장이었던 옥만호 장군은 “이들의 난동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실행계획이 차일피일 미루어지자 중앙청과 청와대로 가서 빨리 북한에 보내달라고 시위하자는 것이 그들의 주목적이었던 것으로 나중에 파악됐다.”면서 “아마 계획대로 북한에 보내졌다면 일련의 난동사건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전(2011년 작고)에 밝혔다. 당시 그들은 매우 혹독한 훈련을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사건으로 모두 22명의 사망자와 1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탈출자들은 당시 총격전에서 사망하거나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모두 처형되었다. 이 사건 발생 3일만에 정래혁 국방부장관이 경질됐다.

“북에 빨리 보내달라”

옥만호 장군이 이 사건을 처음 보고받은 것은 미국에서였다. 당시 옥 장군은 참모차장 진급후 약 12일간의 예정으로 미공군부대를 방문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1971년 8월24일 저녁 미공군사관학교 방문을 끝으로 공식행사를 모두 마치고 26일 귀국을 기다리고 있던 터였다. 숙소로 돌아온 옥 장군이 잠시 쉬려고 할 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를 들어보니 주일 한국대사관에 있는 공군무관이었다. 그는 다짜고짜 “총장님, 빨리 오셔야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옥 장군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빨리 오라는 것은 무엇이고 또 ‘총장님’ 운운은 무엇이란 말인가.

옥 장군이 화를 버럭 내며 말했다.
“총장이라니 무슨 망언이냐?”
무관이 대답했다.
“국방부장관과 참모총장이 경질됐습니다. 총장님께서 신임 총장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그래? 알았다.”

옥 장군은 공군본부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당직자가 “유근창(柳根昌)국방부차관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면서 총장 임명사실을 확인해주었다. 그러면서 전화상이라 정확히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어떤 사건’으로 인해 그렇게 됐다고 설명했다.

옥 장군은 귀국채비를 서둘렀다. 그는 또 미공군본부에 즉각 연락을 취했다. 아직 비공식 일정(2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를 안내하고 있던 미공군 대령에게 본국의 급한 상황을 알리고 혼자라도 우선 귀국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당시 옥 장군은 6명의 참모와 함께 미국을 순방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2시간 뒤 미공군 안내장교한테 연락이 왔다. 옥 장군뿐만 아니라 수행원 전원이 함께 가도 좋다는 것이었다. 또한 일본 공항에 내리면 미5공군사령부에서 신속한 안내가 있을 것이라는 귀띔도 해주었다. 이튿날 아침 옥 장군 일행은 미항공편으로 미국을 출발, 저녁 무렵에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다. 대기해 있던 미공군 헬기 2대가 일행을 태워 미5공군기지에 도착한 뒤 잠시 후 김포공항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한국땅이 가까워질수록 옥 장군은 사건전말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총기난동 사건이라는 것은 보고를 받고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도대체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 길이 없었다.

26일 밤 11시가 다 되어 김포공항에 도착한 옥 장군은 곧바로 국방부장관실로 향했다. 유재흥(劉載興) 신임 국방부장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옥 장군은 우선 미공군 순방결과를 보고한 뒤 사건개요를 들었다. 실미도에 특수부대가 있었다는 것도 비로소 그 때서야 알았다. 옥 장군은 총장 취임후 실미도 사건 사후처리 과정에서 자세한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중앙청에 가서 특수부대 요원들의 충정을 알리기 위해 실미도를 탈출하는 과정에서 생겼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 김문 작가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