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암수살인>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새롭게 극장가의 흥행 판도를 짠 ‘베놈’과 ‘암수살인’(김태균 감독)의 경쟁에서 한국 영화인 이유도 있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에서 ‘암수살인’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여기에 역시 이지은 감독이 실화에서 모티프를 얻은 ‘미쓰백’이 오는 11일 가세한다.

‘암수살인’의 변별성은 여타 미스터리 스릴러가 범인이 누구인지 수수께끼를 풀어나가거나 범인을 잡는 과정의 스릴을 즐기게 만드는 것과 달리 잡힌 범인이 주장하는 알려지지 않은 살인사건의 진위 여부와 사실일 경우 그 피해자의 신원을 어떻게 밝히고 시신(유골)을 어디서 찾아내는가에 있다.

살인마 태오는 부산의 실제 연쇄살인범을 모델로 한다. 영화는 ‘추격자’처럼 잔인한 범행 수법과는 거리를 둔 채 형사 형민이 태오와 치열한 심리전을 펼쳐 승리함으로써 온데간데없는 실종자의 유해를 찾는 구성으로 사회적인 관심을 촉구한다. 그런 면에선 ‘미쓰백’도 같은 길을 걷는다.

소재가 아동학대라면 주제는 관심과 행동에 대한 호소다. 또 ‘암수살인’처럼 법의 허점 혹은 사법부의 직무유기를 향해 포효한다. 30대의 백상아는 한겨울에 맨손으로 찬물로 세차를 하고 마사지사로도 근무하는 등 한 푼도 안 쓰려고,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악착같이 살아가는 ‘외톨이’다.

▲ 영화 <암수살인> 스틸 이미지

어릴 때 엄마에게 학대를 받았고, 결국 버림받은 뒤 보육원에서 자란 탓에 비사교적, 반사회적이다. 수년 전엔 자신에게 부당하게 대한 재벌 2세에게 대들었다 역으로 살인미수죄로 복역하고 나온 뒤 세상을 향해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았다. 사건 때 알게 된 형사 장섭의 애정공세도 무시한다.

그런 그녀가 얇은 옷차림에 맨발로 거리에서 서성대는 소녀 지은을 발견한다. 망설이다 평소대로 나 몰라라 외면하는 쪽으로 마음의 가닥을 잡지만 이내 지은에게 다가간 뒤 주린 배를 채워준다. 지은의 아버지 일곤은 20살 때 지은을 낳았다. 지은은 엄마가 누구인지 모르고 죽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덜컥 2세를 떠맡은 일곤은 당황스럽고 막막했을 것이다. 그건 이해는 되지만 아버지로서 책임은 지는 게 지극히 당연한데 그는 오로지 지은 때문에 자신의 입지가 좁아졌다는 피해 의식만 팽배하다. 미경과 동거 중인데 둘은 번갈아 지은을 때리고 굶기는 등 학대를 일삼는다.

형민은 원래 마약수사대에 근무했다. 그런데 태오의 범죄사실을 밝히기 위해 강력계로 자원해 자비를 들여가며 지루하고 승률 낮은 ‘도박’에 매진한다. 동료 형사들은 ‘접수’된 사건에 대한 ‘명령’을 따르기도 벅찬데 신고도, 실체도 없는 뜬구름을 잡으러 다니는 그를 곱지 않은 눈으로 쳐다본다.

▲ 영화 <미쓰백> 스틸 이미지

상아는 지은을 보호하기 위해 미경과 몸싸움을 벌이다 결국 지구대로 연행된다. 미경과 일곤은 자신들이 보호자임을 앞세우고, 상아는 가정폭력을 하소연하지만 경찰은 상아의 전과를 확인하곤 그녀를 가해자 및 잠재적 유괴범으로 몰아간다. 영화이기에 그럴까? 실제 모든 경찰은 성실할까?

‘암수살인’은 배경이 부산임을 드러내고 ‘미쓰백’은 그렇지 않지만 상아와 지은이 본격적으로 가까워지면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월미도에 놀러 가는 시퀀스로 미뤄볼 때 인천 혹은 인근으로 짐작이 가능하다. ‘암수살인’의 시작은 바다, 끝은 강이다. 끝을 알 수 없는 사람의 마음과 미제 사건들이다.

끝이 보이지 않았던 태오의 ‘자백’을 마무리한 형민은 그러나 존재 여부가 불투명한 숨은 살인사건을 쫓는 수사를 계속한다. 그는 자신의 죽음조차도 유족에게 알리지 못한, 그래서 염조차도 못한 유해를 차가운 땅속 혹은 물속에 둔 채 떨고 있을 영혼을 위로하며 ‘어딨노, 니?’를 뇌까린다.

‘미쓰백’에서의 바다는 해방(자유)이고 손은 인정(관심)이다. 처음 함께 밥을 먹던 두 사람 앞에 미경이 나타나 보호자라며 데려가겠다고 했을 때 지은은 살며시 그러나 간절하게 상아의 손을 잡으며 거부의 뜻을 보이지만 상아는 그걸 뿌리친다. 하지만 월미도에선 상아가 먼저 지은의 손을 잡아준다.

▲ 영화 <미쓰백> 스틸 이미지

지은이 너른 바다와 맑은 하늘 사이의 공간을 자유로이 나는 갈매기를 보고 처음으로 옅은 미소를 지었기 때문이다. 처음 만났을 때 지은이 아줌마라고 부르자 상아는 아줌마 아니라며 상아 이모도 아닌 ‘미쓰백’으로 불러줄 것을 요구했다. ‘미쓰백’은 자신처럼 학대받고 자란 이의 대명사인 것.

두 영화는 시나리오도, 연출도, 배우들의 연기도 모두 탄탄하다. 배우와 배역의 조화도 매우 훌륭하다. 설정으로 관객을 분노하게 만드는 힘은 주술적이기까지 하다. 그런 모든 게 가능한 근원적 바탕은 바로 실제 사건에서 출발했다는, 실화가 가진 힘이다. 현실이라 더 빠져들게 되는 것.

인트로에서 야무지게 세차를 하는 상아의 손은 한겨울 같은 험한 세상에 피투된(내던져진) 한 여자의 일상존재를 상징한다. 영하의 날씨에 차가운 물을 뒤집어쓰고도 꿋꿋하게 현실을 온몸으로 받아내던 손은 20년 전의 자신인 ‘미쓰백’ 지은을 지키면서 동시에 지은의 손의 온기라는 지킴을 받는다.

그 온기와 관심은 형민의 ‘어딨노, 니?’의 연장선상에 있다. 다른 형사와 경찰이 공무원이 아닌 월급쟁이로 살아갈 때 형민만큼은 형사이자 아주 친한 이웃으로서 관심과 성의를 보인다. 만약 상아가 지은에게 무관심했다면 곧 죽임을 당했을 시퀀스에 미뤄 ‘미쓰백’은 스릴러고 또 다른 ‘암수살인’이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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