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밤치기>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밤치기’(정가영 감독)는 독립영화의 신선함보다는 오히려 상업영화를 넘보는 발칙함이 돋보인다. 왜 독립영화가 다양성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 왜 그게 상업영화의 발전을 담보하는지 잘 보여준다. 정가영이 각본, 연출, 주연을 맡았지만 여성의 시각으로 남성을 이해하는 시선이 따뜻하다.

독립영화 연출을 위해 시나리오를 준비 중인 20대 중반 가영은 30살 남자 진혁(박종환)을 만나 그의 성생활 및 연애에 관해 내밀한 내용까지 인터뷰를 한다. 부딪치는 술잔의 수와 만나는 횟수가 더해질수록 둘은 아주 가까워져 어느덧 가영은 진혁에게 매력을 느껴 같이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애인이 있는 진혁은 강력하게 가영을 거부한다. 그런 만남이 거듭되는 동안 진혁의 질문이 점점 늘고 가영은 자신의 연애사와 연애관을 털어놓게 된다. 술을 마시고 진혁을 노래방에 데려간 가영은 그의 볼에 입을 맞추는 것까지 성공하는데 갑자기 진혁의 선배 영찬(형슬우)이 들어온다.

두 사람이 노는 새 진혁은 슬그머니 빠져나가 귀가하고 그렇게 노래방의 정해진 시간을 다 채운 두 사람은 어색한 보조로 늦은 밤의 뒷골목을 헤매며 서로의 상상에 잠겼다가 못내 아쉬운 듯 헤어진다. 그리고 가영은 갑자기 진혁에게 전화를 걸어 할 말이 있다며 당장 만나자고 하는데.

▲ 영화 <밤치기> 스틸 이미지

중반까진 남자 관객이라면 기분 나쁠 수도 있다. 영화는 철저하게 여자의 시각에서 남자를 ‘잔인하리만치’ 발가벗겨가기 때문이다. 첫 질문이 “하루에 2번 자위한 적 있나요?”다. “응” “3번은요?” “응” “4번은요?” “아니” “3점5번은요?” “그게 뭐지?” “생각만 4번째인 적” 이런 식이다.

첫 잔이 오가자마자 편하게 말을 놓으라고 주문한 가영은 그러나 정작 진혁이 매우 불편하리만치 집요하게 파고든다. ‘키스 잘 하냐’ ‘키스가 좋으냐, 오럴섹스가 좋으냐’ 등의 질문에 진혁은 ‘키스 자체는 좋지만 침대에선 그런 건 거추장스럽다’는 식으로 남자들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알린다.

혈액형과 관련된 궁합, 어릴 때 무작위로 날짜를 대면 그 요일을 정확하게 맞췄던 초능력, 애인을 놔두고 바람을 피운 적이 있느냐, 자위할 때 누구를 생각하느냐 등 그 또래들의 대화에서 있을 법한 시시콜콜하거나 유치한 얘기들이 거듭되지만 결국 동등한 시각으로 남녀의 성과 사랑의 판타지에 안착한다.

그렇게 가영의 속내가 드러날 즈음부터 이 영화의 재미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진혁은 아직도 판타지가 남아있는 오래전 ‘원 나이트 스탠딩’의 여자를 생각하며 자위를 한다. 애인을 생각하며 한 적은 없다. 언제든지 직접 상대할 수 있는데 굳이 환상 속으로 소환할 이유는 없다는 뜻이 아닐까?

▲ 영화 <밤치기> 스틸 이미지

그러나 ‘외도’는 절대 금물이다. 그러면서 지금은 혼자이지만 한때 연인이 있었던 가영이 그 당시 바람을 피운 적이 꽤 되고, 지금은 자신과 자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꾸짖으며 혐오감마저 보인다. 그는 왜 가영과 상의도 없이 영찬을 불러냈을까? 영찬은 왜 가영을 바래다주려 했을까?

과연 진혁은 가영과 잘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일까?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매우 뛰어나진 않지만 어설프지도 않은 박종환의 표정연기에서 미묘하게 복잡한 진혁의 심리상태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란 현존재 안에는 꽤 다양한 존재자가 존재한다. 다중인격은 새로 생긴 게 아니다.

진혁은 가영에게 인터뷰 비용을 받았고 밥과 술도 얻어먹는 중이다. 연애한 지 오래된 가영은 진혁이 매력적이라며 대놓고 같이 자자고 ‘들이댄다’. 초기 만남 때의 진혁에겐 원칙이 중요한 양심적인 존재자의 존재가 컸다. 그러나 충동적인 존재자의 존재가 점점 성장해간다. 영찬은 그 대리존재다.

R. B. 페리의 가치론과 윌리엄 제임스의 프래그머티즘의 충돌로 시작해 칸트에 안착하려는 의지다. 칸트는 일생에 2번 크게 놀랐다고 고백했는데 하나는 우주의 무한히 깊고 넓음, 즉 신비함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도덕률(양심)이다. 진혁은 맹자와 순자를 떠나 도덕률의 존재가 앞섰다.

▲ 영화 <밤치기> 스틸 이미지

영화를 도입한 대화 내용도 재미있다. 가영은 “영화는 비밀, 관객은 탐정”이라는 정의를 내린다. 또 “영화인은 쓸데없이 눈만 높은데 생각보다 인기가 없다”라는 자조에 빠져있다. J.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빌려 진혁의 ‘꼰대’적 의식을 비꼬는 건 어색하지만 ‘어린 꼰대’론은 충분한 공감을 준다.

‘아는 여자’ ‘7급 공무원’ ‘봄날은 간다’ ‘추격자’ ‘올드보이’ 등이 꽤 의미 있는 소재로 도입된다. 진혁과 영찬은 가영의 질문에 모두 ‘봄날은 간다’를 봤다고 호언장담하지만 모두 ‘못’ 봤다. 곧 그들은 아는 척하지만 여성의 심리를 잘 모르고, 연애에도 의외로 상식이 부족한 ‘오만과 편견’이다.

‘올드보이’를 가영 나름대로 각색하고, 인터뷰어와 인터뷰이가 바뀐 상태에서 나영이 죽은 자의 혼령이 돼 사후세계 및 환생의 설정을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시퀀스는 가장 두드러진 창의력이다. 진혁이 ‘아는 여자’와 ‘7급 공무원’을 ‘인생의 멜로 영화’로 손꼽은 건 남자들의 천박함에 대한 유머.

그는 시나리오가 완성되면 주연을 맡으라는 말에 손사래를 치지만 이내 여배우가 예쁘면 하겠다고 한다. 대다수의 남자들이 ‘아는 여자’를 동치성을 외면한 채 단지 이나영이 예쁘다는 데만 집중했다는 비판이고, ‘7급 공무원’은 그들의 가벼움을 극대화한 것. 84분. 15살. 11월 1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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