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새벽의 약속>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의 동명의 자서전을 스크린에 옮긴 ‘새벽의 약속’(에릭 바르비에 감독)은 어둡고도 밝으며, 퇴폐적이고도 아름답다. 천박하면서도 숭고하다. 어려울 듯하지만 매우 쉽고, 예술영화인 줄 알았더니 외려 블록버스터 쪽에 더 가까운 상업영화다. 자본주의적이면서도 진보적이다.

1914년 러시아(현재 리투아니아)에서 사업가 아버지와 무명배우 엄마 니나와의 사이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난 로맹 카체프는 11살 때 부모의 이혼 후 엄마와 힘든 유소년 시절을 보낸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모자는 폴란드로 이주하지만 먹고사는 일이 만만치 않자 니나는 음모를 꾸민다.

프랑스 고급 브랜드의 의상실을 차린 뒤 러시아의 동료 배우를 그 디자이너로 변장시켜 개업식에 내세우는 쇼를 연출한 것. 이에 중상류층 귀부인들이 의상실로 몰려들어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이내 시들해지자 다시 경제적 압박에 시달린다. 니나는 로맹이 14살 때 프랑스 니스로 이주를 결정한다.

니나는 가져간 앤티크 식기 등을 진품이라며 골동품 가게에 팔려고 하다 실패하지만 그녀의 언변에 반한 골동품점 사장에게 스카우트된다. 이후 그녀는 승승장구하며 부동산 사업 등에 손을 대더니 드디어 한 건물을 사 호텔로 개조해 개점한다. 그녀가 이렇게 악착같이 산 목적은 오직 로맹의 성공.

▲ 영화 <새벽의 약속> 스틸 이미지

어릴 때부터 니나는 로맹에게 남들과 다른 특별함을 주입시켰고, 반드시 고위 공무원과 훌륭한 작가가 될 것이라 세뇌시켰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로맹은 법학을 공부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땐 혁혁한 전과도 올리더니 로맹 가리로 이름을 바꾸고 공무원과 작가로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는데.

이 영화는 정신 상태가 혼돈스럽던 로맹의 말년을 현시점으로 기준 삼아 수미상관으로 배치한 뒤 폴란드 이주 시절부터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린다. 말년의 로맹은 뇌에 크게 이상이 와 죽을 때가 됐다고 생각하지만 의사는 그가 스스로 귀에 과카몰리(멕시코 요리)를 욱여넣은 게 문제라고 한다.

그것 때문에 중이염이 생긴 것은 맞지만 뇌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 실제 1979년 전처가 약물복용으로 사망했을 때 로맹은 FBI가 개입했다고 주장하더니 이듬해 권총으로 자살했다. 영화의 시작과 끝은 현대문명의 퇴폐성을 풍자적으로 고발한 작가의 혼란스럽던 내면세계를 그린 것이다.

어릴 때부터 그가 귀에 딱지가 들어앉도록 엄마로부터 들은 말이 커서 프랑스 대사와 유명 작가가 될 것이라는 신탁 같은 예언. 주변 사람들은 코웃음을 쳤지만 엄마의 신념은 금강불괴였다. 내내 영화를 관통하는 정서는 엄마의 지나친 기대와 그걸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로맹의 사명감이다.

▲ 영화 <새벽의 약속> 스틸 이미지

영화는 내내 잔잔함과 임팩트 사이를 오가는가 하면 진지하면서도 매우 유머러스하다. 특히 의외로 코미디 요소가 곳곳에 포진해있어 작가 로맹 특유의 풍자를 즐길 수 있는 게 큰 장점이다. 군에 입대한 로맹에게 니나가 권총을 주며 진지하게 히틀러를 암살하라고 하면 그걸 실행하려 하는 식이다.

당연히 시도도 못한 채 아프리카에 배속된 로맹은 “이젠 롬멜과 싸우게 됐네”라고 다시 전의를 불태운다. 폴란드 시절 국적 차별의 대표적 ‘왕따’였던 로맹에게 니나는 “누가 엄마 욕을 하면 들것에 실려 들어와야 해”라며 가족 간의 끈끈한 관계를 마치 마피아 같은 의리로 형상화한다.

니나는 여장부다. 로맹에게 “싸울 가치가 있는 건 여자, 명예, 그리고 프랑스 딱 세 가지”라며 인생관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다. 엄마가 군에 찾아와 전우들이 비웃자 엄마에게 생애 최대의 적개심을 품기도 했지만 결국 그의 가장 훌륭한 친구이자 든든한 후원자는 엄마였다.

한때 그도 그런 엄마가 무척 부담스러웠던 적이 있었다. 군 입대 전 한창 열정적일 때 그는 숱한 여자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그러자 엄마는 ‘모든’ 엄마가 그렇듯이 성공한 뒤에는 더욱 아름답고 지적이며 품격 있는 여자들이 줄을 설 테니 지금은 참을 때라고 뜯어말렸던 것이다.

▲ 영화 <새벽의 약속> 스틸 이미지

그런데 호텔에 자렘바라는 늙수그레한 화가가 1년간 장기 투숙하며 로맹에게 엄마를 사랑한다며 도와달라고 고백한다. 그가 만세를 부르며 적극적으로 도운 이유는 엄마의 관심이 남자에게로 분산됨으로써 자신이 죄책감 없이 엄마 품을 벗어나 마음대로 모험을 하러 다닐 수 있으리란 희망 때문.

그러나 그의 기대감은 단숨에 산산조각으로 부서진다. 거의 ‘모든’ 엄마처럼 니나 역시 오직 로맹의 성공 외에는 뵈는 게 없었다. 평생을 당뇨병으로 고생하면서도 로맹에게 티 내지 않고 공직자와 작가로서 탄탄대로를 달릴 수 있게끔 정신적, 경제적 지원을 하기 위해 황소처럼 일만 했다.

영화는 작은 유럽의 근현대사다. 멕시코-폴란드-프랑스-아프리카 등을 잇고 영국과 러시아를 거론하며 유대인으로서 격동의 20세기를 산 로맹과 니나를 통해 범세계적인 초월(인종, 국적, 이념 등)을 주장한다. 러시아 유대인인 니나가 프랑스를 유토피아로 삼는 건 차별에 대한 반발로서의 최종 선택이다.

사관생도 300여 명 중 로맹만 임관이 안 된 현실이 그걸 입증한다. 러시아 정교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니나의 여자 앞에서는 신발 벗을 때에도 품위를 지키라는 가르침 등은 마치 탈무드 같다. 아름답지만 아팠던 ‘자기 앞의 생’에 풍자와 유머를 듬뿍 친 또 다른 모모의 얘기다. 130분. 15살 이상. 22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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