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언론회유를 위한 K-공작계획

우리나라 현대사 가운데 가장 숨가빴던 시기는 1979년과 1980년, 그러니까 2년 동안이라고 할 수 있다. 1979년 제3공화국 18년 통치의 종지부를 찍은 10.26사건에 이은 12.12사건, 그리고 신군부에 의해 주도된 5.17과 5.18 등 실로 굵직굵직한 일들이 연이어 벌어졌다. 그럴 때마다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대체 진실은 무엇인지 잘 모르는 국민들은 까막눈이 된 채 막강실권을 잡은 신군부의 발표해 의해 그저 귀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 언론은 어떠했을까. 당연히 신군부에서는 언론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언론을 정리해야 했다. 흔히 말하는 ‘언론통폐합’이 그것이다. 1980년 한 해동안 전국에 있는 신문사와 방송사 등을 대상으로 통폐합을 진행하면서 국민의 눈과 귀까지 막았다.

2010년 1월 7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는 1980년 11월 당시 전두환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할 목적으로 언론통폐합과 언론인 강제 해직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진실화해위는 2007년 11월 조사 개시 결정 이후 2년여 동안 4만5000쪽의 광범위한 자료 수집과 150여명의 관계자 진술, 29개 언론사가 제출한 서면답변과 증빙자료를 토대로 이 같은 내용을 밝혀냈다. 이에 따르면 신군부의 언론사 통폐합 및 정기간행물 폐간, 언론인 해직은 법적 근거가 없었으며 통폐합 대상 선정은 1980년 4월 언론사주 및 기자 동향 파악을 시작으로 친정부 성향 여부, 특정 정치인과의 친소 여부에 따라 결정됐다고 했다. 언론사통폐합을 주도한 보안사 요구에 불응할 경우 세무사찰 및 경영감찰 등의 위협도 가했다. 신군부는 또 동향파악을 통해 언론계 저항세력을 30%로 규정하고 이들을 해직하도록 언론사에 강요했다. 해직 언론인 명단은 보안사가 선정해 각 언론사에 전달한 것으로 드러났다. 보안사에서 넘긴 명단은 900여명이었고, 실제 해직된 언론인은 1500명에 달했다. 특히 해직 언론인 가운데 30여명은 삼청교육대에 3주간 입소해 혹독한 시련을 겪었으며, 나머지 해직 언론인들도 취업이 제한돼 가정파탄, 생계곤란, 불명예 등의 고통을 당했다.

보안사 정보처에 언론반 가동

그렇다면 언론통폐합의 배경은 무엇일까. 신군부는 1980년 초부터 집권을 위해 언론을 활용할 계획을 구상했다. 이를 위해 보안사는 1980년 2월 정보처를 신설하고 정보처 내에 언론관계 업무를 담당하는 언론계를 두었고, 이와는 별도로 이상재씨를 책임자로 하는 이른바 ‘언론반’을 가동했다. 여기에서 언론에 대한 회유와 공작을 핵심으로 하는 'K-공작계획'을 만들었다. K-공작계획은 ‘단결된 군부의 기반을 주축으로 지속적인 국력 신장을 위한 안정 세력을 구축’을 위해 언론회유를 주목적으로 한 것이다. K-공작반 담당은 언론사 차장급 이상을 회유하기 위한 반장 1명, 중진기자 이상을 상대로 여론을 수집하는 분석관(문공부 직원) 2명, 여론 수집 및 언론사 행사일정을 입수하는 수집관 5명 등 모두 14명으로 편성됐다. K-공작에 의한 언론인 접촉은 1980년 8월 하순까지 진행됐다. 당시 K-공작 실무를 담당했던 한 관계자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2.12 이후 권력장악에 자신감을 얻은 신군부는 집권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 대중조작을 위해 3월초부터 언론대책반을 가동시켰다.”면서 “사실 보안사의 언론대책반은 12.12이전부터 보안처 산하에 설치돼 있었고 그것이 2월초 신설된 정보처 산하로 옮겨지면서 확대개편됐다.”고 말한다. 이상재씨의 활동도 그때부터 시작됐으며 3김씨를 타도하고 권력을 장악하겠다는 길로 확실하게 나서게 됐다고 말한다. 아울러 언론검열의 방향은 다분히 ‘혼란방치’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혼란이 극심해져야 안정세력의 명분이 생기는 것 아니냐고 덧붙였다.

허문도가 주도한 ‘언론통폐합’

▲ 사진=sbs 화면 캡처

그러던 1980년 11월 신군부는 계엄해제 이후 예상되는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는 언론통폐합이 필요하다는 인식 하에 허문도를 중심으로 ‘언론창달계획’을 입안, 전두환 사령관의 결재를 득한 후 집행을 보안사에 위임했다. 그러자 보안사는 즉시 언론사 사주들을 연행,소환하여 통폐합조치를 통보하고 이의가 없다는 내용의 각서를 강제로 받았다.

이와 관련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과거사위)는 2007년 10월25일 보안사령부가 언론반을 설치한 근거문서인 ‘언론조종반 운영계획’을 처음으로 확인했으며 중진언론인들을 회유하기 위한 공작인 ‘K-공작계획’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의 결재를 받아 실시됐다고 발표했다. 1980년 신군부가 보안사령부를 동원해 언론탄압을 자행한 실상이 관련문건으로 재차 확인됐다는 것이다. 당시 밝혀진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K-공작계획은 1980년 3월 보안사 이상재 언론반장이 ‘단결된 군부의 기반을 주축으로 지속적인 국력신장을 위한 안정세력 구축’을 명분으로 회유공작 계획을 수립해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결재를 받았다. 특히 보안사는 K-공작의 일환 또는 연속선에서 보안사령관과 언론사주 및 언론사 간부 면담을 추진해 언론으로부터 신군부에 유리한 여론을 얻어내려 했다. ‘보안사령관과 언론계 사장의 면담보고’ 자료에 의하면 신군부는 계엄해제를 앞두고 계엄기간 중 검열된 기사를 계엄 이후에도 게재하지 못하도록 간담회를 개최해 각서까지 받았다. 과거사위 관계자는 “K-공작은 전두환을 최고 인물로 만들기 위한 언론공작” 이라며 “K-공작계획의 문건 발견은 처음” 이라고 말했다.

계속해서 과거사위가 밝히는 내용이다. 1980년 8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는 언론인 정화 대상자를 A, B, C 3급으로 나눠 문화공보부에 통보했다. A급은 국시부정 행위와 제작거부 주동, 특정 정치인 추종, B급은 제작 거부 주동 및 선동, 부조리 행위자, C급은 단순 제작 거부동조, 부조리 행위자 등이었다. 또한 과거사위는 작성주체와 날짜가 적혀있지 않은 ‘언론정화자명단’이라는 문건을 찾아냈다. 이 문건에는 정화보류자 44명과 정화자 938명 등 합계 982명의 이름과 등급이 손 글씨로 적혀 있다. 정화사유로는 국시부정(10명), 반정부(243명), 부조리(341명), 기회주의·무능(123명), 근무태만(3명) 등이며 아무런 이유도 기재되지 않은 경우도 109명에 달했다.

과거사위는 “이 명단에서 누락된 해직언론인이 얼마나 되는지는 추산할 수 없었다.”며 “1980년 11월 단행된 언론사 강제 통폐합 과정에서도 상당수의 언론인이 해직되었다고 하나 이에 대한 기록은 발견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보안사는 해직언론인 711명에 대해 신분별로 취업제한기간을 뒀다. 당시 부국장 이상 42명은 1년, 부장 이하 627명은 6개월, 나머지는 영구제한 조치를 취했다. 이후 A급 13명은 영구, B급 96명은 1년, C급 602명은 6개월로 제한기간이 바뀌었다. 보안사 정보처 정보2과에서는 해직언론인에 대해 계엄 해제 이후에도 동향을 파악했다. 보안사는 당시 해직언론인 가운데 49명을 A, B, C, D등급으로 나눠 동향을 분석했다. 외관상으로는 한국신문협회와 한국방송협회의 자율결의 형태였으나 실제로는 국보위가 국시부정 행위자, 제작거부 주동자 등을 해직한다는 기본 방침을 수립하고 보안사가 주축이 된 합동수사본부에서 작성한 해직 대상자의 명단을 문공부가 각 언론사에 하달했다. 1982년 7월 작성된 ‘숙정위해언론인’이란 문건에 의하면 해직언론인을 A급(극렬비판 인물로 순화가 불가능), B급(비판활동 재개 가능성, 순화 및 미행감시 요구), C급(비판성향은 잠재해 있으나 특이동향 없는 자, 순화만으로 회유 가능자), D급(문제성은 있으나 자숙하면서 생계에 전념 중인 자, 거주파악 외 별도조치 필요 없는 자)으로 각각 분류해 동향을 파악한 것으로 밝혀졌다.

언론사 강제통폐합은 당시 청와대 허문도 비서관이 작성한 ‘언론창달계획’을 문화공보부 이광표 장관이 전두환 대통령의 결재를 받아 강행됐으며 포기각서 문안을 작성해 언론사주로부터 포기각서를 받았다. 보안사는 보도성향과 국가관 및 시국관, 특정 정치인에 대한 지지 여부 등을 지방지 통폐합의 평가기준으로 정했던 사실도 드러났다.

당시 언론통폐합을 주도적으로 작성했던 허문도는 허삼수, 허화평 등 '쓰리 허'로 불리며 권력의 최상부에 위치한 5공화국의 실세였다. 원래 조선일보 기자였던 허문도는 조선일보 주일 특파원과 주일 대사관 공보관을 지내면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만나게 됐고 청와대 정무1비서관, 문공부차관, 청와대 정무1수석 등을 거쳐 통일원장관까지 지냈으며 2016년 3월 76세로 세상을 떠났다.

국보위때 운영위원장이었던 이기백 장군은 국보위 시절을 회고하면서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털어놨다. 운영위원장은 상임위원장인 전두환 사령관과 하루에도 몇 번씩 독대하는 중요 직책이었다. 이 장군이 국보위에 근무한 지 얼마 안돼(7월초) 전두환 사령관으로부터 “국보위운영자금 140억원을 잘 관리하라”는 지시와 함께 “이 장군 혼자서만 아는 것이 좋겠다.”는 귀띔을 받았다. 그래서 이 장군은 140억원 전액을 은행에 예치하고 여기에서 나오는 이자를 별도 관리하면서 그때그때 융통자금으로 활용했다.

이 돈의 출처에 대해서 이 장군은 “경제기획원으로부터 들어온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당시 김원기(金元基) 부총림 겸 경제기획원장관은 “실권자가 돈을 내주라고 하면 어쩔 수 없었고 5.16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던 것으로 안다.”고 밝힌 바 있다.

국보위는 비자금 140억원이 어떤 근거로 책정됐으며 과연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조성됐는지는 차치하고 어쨌든 거액을 끌어쓸 수 있다는 것은 당시 국보위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임에는 틀림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국보위 활동비는 비자금 140억원의 이자로 충당됐을 뿐 원금은 전두환 사령관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전액 청와대 금고로 고스란히 옮겨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 장군은 흥미있는 일화 한 가지를 떠올렸다.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 입성하자 친인척들이 권력주변에서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했고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예가 전 대통령의 친동생인 전경환씨였다. 기업체 회장이나 부인들이 전경환씨 집에 계속 들락거리며 이권을 얻기 위한 물밑접촉이 빈번한 가운데 전경환씨를 둘러싸고 “어느 기업체로부터 돈 얼마를 받았다더라.” 등의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러한 잡음은 곧 청와대 정보망에 걸려들었고 전 대통령은 동생에게 “대통령 체면이 뭐가 되느냐, 절대 그러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결국 전경환씨는 한달 동안 칩거를 하며 감시를 받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장군이 청와대에서 전 대통령과 독대할 기회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이 장군은 “각하, 금고에 있는 140억원 중에서 1억원만 뚝 떼어 전경환씨한테 주면 더 이상 기업체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며 문제도 없을 것입니다.”라고 건의했다. 그러자 전 대통령은 고함을 버럭 지르며 “무슨 소린가? 대통령 기밀비에서 매월 15만원씩 주는데 뭐가 부족해서 1억원이라는 큰 돈을 준단 말인가.”라며 절대 불가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국보위 비자금 140억원은 결국 어디로 갔을까. 이에 대해 이 장군은 “나중에 국고로 환수됐을 것”이라고만 말했다.

▲ 김문 작가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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