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절에 ‘정식 개봉’한 ‘파업전야’의 상징성 [유진모 칼럼]

유진모 칼럼니스트l승인2019.05.06l수정2019.05.08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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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파업전야' 예고편 캡처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배우와 스태프가 재능 기부를 하고, 각자 형편이 되는 대로 쌈짓돈을 털어 제작비에 보태 만든 독립영화 1편의 상영을 막기 위해 헬기가 뜨고 1800명의 경찰이 동원됐다. 1990년에 있었던 실화다. 노태우 정부는 ‘파업전야’가 사회 불안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이렇게 시대를 역행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파업전야’가 지난 1일 노동절에 ‘정식’으로 ‘재’개봉됐다. ‘파업전야’는 영화적 완성도로 보면 의견이 분분할 수 있다. 하지만 레니 리펜슈탈 감독의 나치 선전 영화 ‘의지의 승리’(1934)에서 보듯 영화는 선전, 선동적 기능도 담당할 수 있다. 전 세계에서 많은 ‘마블교’ 신도가 창궐하는 걸 보라!

‘파업전야’의 주인공은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면서 합리적인 급여를 못 받는 노동자다. 경제 활황으로 사장은 큰돈을 벌고, 그에게 아부하는 소수의 화이트컬러 간부는 두둑한 급여 봉투를 챙기지만 다수의 노동자들은 쇄도하는 주문량 때문에 야근과 특근을 밥 먹듯 하면서도 기계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다.

부당한 대우에도 ‘을’들은 ‘갑’들에게 정당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대들었다 해고당하면 자신은 물론 가족들의 생계가 막막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주눅 들어있던 그들은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토론을 하면서 깨우치게 되고, 노동조합 결성만이 해결책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 영화 '파업전야' 예고편 캡처

사측은 노조원들을 ‘빨갱이’라 몰아세우고 회사에 협조하는 노동자 및 용역깡패들로 구사대를 결성, 공권력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묵인 아래 폭력으로 노조를 와해시키려 한다. 1987년 6월 29일 전두환 정권의 독재에 항거한 국민들의 민주화운동에 굴복해 민주정의당 대표 노태우는 특별선언을 한다.

직선제 개헌 등 민주화 요구에 백기를 든 것. 그러나 이듬해 대통령에 취임한 그와 그의 세력은 여전히 국민의 인권을 짓밟는다. ‘파업전야’의 상영을 막기 위해 공권력을 투입한 건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 주장과, 문화적 자유와 다양성을 외친 관객의 ‘광주민주화운동’에 헬기 사격을 한 것과 마찬가지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즉 우리나라는 민주주의의 이념을 지향한다. 현재 일부 사회주의 국가를 제외한 대다수의 국가는 자본주의적 방향을 추구한다. 이는 사유재산과 시장의 자유경쟁을 인정하는 경제 체제지 민주주의의 이념적 개념이 아니다.

자본가가 이익을 더 챙기고, 경영자가 인사권의 칼을 휘두르는 건 자본주의의 논리에 부합한다. 하지만 ‘주권을 가진,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이 나오는’ 국민이 겨우 입에 풀칠할 최소한의 품삯을 받고, 상해의 위험이 공존하는 환경에서 일하며, 인간다운 대접을 제대로 못 받는 건 민주주의에 위배된다.

‘파업전야’는 파업을 선동하는 게 아니다. 독재자와 자본가가 그토록 몸서리치는 마르크스의 ‘M’자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단 하루를 살아도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것이다. 자유롭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와 안전한 환경에서 일하고, 특별한 사유가 아니면 정상적인 퇴근 후 사생활을 보장받고 싶을 뿐이다.

화질은 거칠고, 연기력이나 연출도 세련되지 못하다. 재미를 추구한다거나 남는 시간을 때우겠다면 결코 바람직한 선택지는 아니다. 하지만 역사적, 영화사적, 인권적인 차원에선 매우 가치가 높다. 게다가 비정규직 노동자가 작업 현장에서 잇달아 사망하는 현 상황에선 이 작품의 의미는 장중하다.

다수의 지식인이 마르크스에 긍정적이지만 마르크시즘은 실패했다. ‘진정한 민주주의로 가는 과정이 프롤레타리아트가 폭력으로 부르주아지를 타도하고 노동자의 독재를 세우는 것’이란 테제에 담긴 폭력과 독재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생산 수단을 쥔 자본가와 몸뿐인 노동자가 불균형인 건 맞다.

사실상 경제가 정치를 지배하는 현 자본주의 경제 체제하에서 그 균열과 괴리를 맞춰줄 가장 현실적인 조정 기구는 노동조합이다. 물론 ‘귀족노조’와 ‘어용노조’란 불건전함에서 보듯 본질을 벗어난 건강하지 못한 노조는 외려 독이 되기 마련. 그러나 과유불급은 어느 현상과 형상에도 적용되는 진리다.

▲ 영화 '파업전야' 예고편 캡처

어느 조직이든 목적이 불순하고 방법이 천박하면 명분을 쇼윈도 안에 전시하기 마련이다. 중요한 건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 권력’과 현대의 보편적 이데올로기인 만민 평등이다. 공동의 인권, 공통의 행복이다. 개개인의 교양이 인격을 부여할 순 있지만 재산이 주는 지위가 품격까지 결정하면 곤란하다.

하다못해 고대에도 ‘개체화의 원리’(아리스토텔레스)가 있었고, 중세엔 둔스 스코투스가 이에 인격을 더해 개성원리를 주창했다. ‘노동자는 내가 주는 것보다 무능하다’와 ‘회사는 내가 일한 만큼 안 준다’는 상충된 양측의 인식론은 자본주의에서 큰 난제다. 영원히 해결될 수 없는 미제로 봐도 무방하다.

합법적인 자유 경쟁의 시장 구조에 국가가 개입한다는 건 민주주의 원칙에서 어긋난다. 각 회사들만의 조정기구가 필요한데 그게 노동조합이란 걸 ‘파업전야’는 눈물로 호소하는 것이다. 더 좋은 데 갈 수 있지 못한 노동자들 역시 회사가 동맥경화로 혈액순환이 중지되거나 사망하는 건 결코 원치 않는다.

사측은 탈세 등 위법 행위를 감추고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또 다른 불법을 저지르니 투명하지 못한 회계장부를 노동자들에게 공개할 이유도, 의무도 없다. 자신들의 노동이 얼마의 수익을 올리고, 그래서 얼마만큼의 값어치를 지니는지 모르는 노동자들은 오늘도 ‘파업전야’를 꿈꾸지만 동은 틀 줄 모른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유진모 칼럼니스트  ybacchu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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