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운궁(慶運宮) 궁담길 정동에서 전통과 100년 전 근대을 만나다 [최철호 칼럼]

최철호 성곽길 역사문화연구소 소장l승인2019.05.16l수정2019.05.16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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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만을 향해 탐스럽게 필 함박꽃_작약

[미디어파인=최철호의 한양도성 옛길] 입하를 지나 소만(小滿)으로 가는 절기다. 경희궁의 모란이 지고 작약이 꽃망울을 터트린다. 겨우내 땅속에서 버틴 작약은 탐스럽게 함박꽃이 되어간다. 경희궁 꽃길 따라 성벽이 이어져 있다. 성벽과 성벽 사이 성문이 보이지 않는다. 서쪽에는 서대문이 없다. 돈의문터만 외로이 표석으로 서 있다. 100여 년 전 근대화의 바람에 소리 없이 사라지고 없다. 돈의문 언덕위에서 경운궁을 향해 거닌다. 덕수궁(德壽宮)이 더 친근한 이름이다.

경운궁 궁담길의 역사와 유래

▲ 전통과 근대의 만남_경운궁 궁담길 따라 현대가 공존한다

덕수궁은 성종의 친형이자 세조의 장손 월산대군의 사저였다. 임진왜란 후 모든 궁이 불타 버렸다. 덕수궁은 선조가 한양도성으로 돌아와 잠시 머물던 정릉동 행궁이다. 행궁은 주변의 집들을 사 규모가 점점 커지며 정동 1번지를 거의 차지하였다. 광해군이 창덕궁 중건 후 이궁하며 정릉동 행궁에 궁호(宮號)를 내린다. 이곳이 바로 경운궁(慶運宮)이다. 덕수궁 돌담길 역시 경운궁 궁담길이 제격이다. 그 뒤 오랜 세월 왕이 살지 않았고, 명성황후 시해 후 고종이 거주하며 정치와 외교 1번지가 되었다.

왕릉의 길, 정동길을 걷는다

▲ 경희궁과 경운궁 사이 정동길_정동 가장 높은 곳에서 바라 본 서울의 현대 모습

정동(貞洞)은 600여 년 전 정릉(貞陵)이 있었던 왕릉터다. 조선 최초 왕비의 능터다.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 능이 도성안에 있었다. 최초 왕비의 능이 4대문안 숲속에 조성되었다. 태조 이성계가 경복궁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두고 싶은 마음에서다. 경복궁 인정전에서도 볼 수 있는 거리다. 걸어서 10분이면 정릉에 행차 할 수 있었다. 애틋한 사랑이 느껴진다. 정동은 정릉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600여 년 역사와 전통이 깊이 배어 있다.

▲ 역사와 외교의 거리_경운궁 궁담길

개항기에 한양도성 안과 밖은 빠르게 변한다. 궁과 궐도 정동길도 변해갔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후 서양 제국들은 도성안으로 물밀 듯 들어 왔다. 미국과 러시아가 통상관계를 계기로 정동은 세계에 문을 연다. 돈의문을 통해 신문물이 도입된다. 1880년 중반 정동은 전통과 근대가 공존하는 대표적인 공간이었다. 모던이즘의 시작이 정동이었다. 1883년 미국공관을 시작으로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정동에서 출발한다. 서양식 건물과 서양식 물건, 서양식 복장과 서양식 음식이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양풍(洋風)이 이 길을 따라 들어오고, 양식(洋式)이 이 길을 타고 퍼져갔다.

외교의 중심, 정동길은 역사길이다

▲ 정동의 제일 높은 언덕에 자리잡은 옛 러시아 공사관

영국총영사관이 개설되었다. 러시아 공사관,프랑스 공사관,독일 공사관,이탈리아 공사관과 벨기에 공사관까지 경운궁 궁담길 주변을 에워싼다. 공관들이 즐비하자 정동은 새로운 외교거리가 되었다. 정동은 외교,교육의 중심지로 서양문물이 넘쳐났다. 정동길에서 외교가 시작되고,사교가 이루어졌다. 당구장과 커피숍이 생겼다. 근대의 맛과 근대의 멋이 이 길 위에서 시작하고 이 길에서 퍼져나갔다. 정동길을 걷는 외국인은 외교관과 선교사,의사,교사 그리고 금광 채굴 엔지니어,전기 기술자등 새로운 문명의 거리였다.

대한제국의 나라, 황제의 시간여행

▲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교회_정동제일교회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서울을 제국에 걸맞게 설계한다. 연호를 광무(光武)로 정하고 황제로 즉위 환구단에서 하늘과 땅에 제를 올렸다. 대한제국으로 동양의 전통적인 제국과 서양의 근대적인 모습을 공유했다. ‘옛 것을 근본으로 새 것을 참작한다’는 구본신참(舊本新參)으로 의례를 정비하고 개혁을 추진 하였다. 자주 독립국의 상징으로 독립문을 만들고,오얏꽃과 태극기를 사용하였다. 대한제국이 당당히 외국들과 동등한 관계로 문호를 개방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 대한제국의 시작과 끝을 알린 고종의 집무실_덕수궁 중명전

정동은 외교인들이 오가는 거리었다. 신문물과 전통이 공존하는 개화의 거리었다. 대한제국은 서울을 전통과 근대가 공존하는 도시로 설계하려 하였다. 경운궁은 전통적인 건축과 서양의 건축물이 만나는 공간이다. 중명전은 궁궐에 지어진 최초의 서양식 건축물이다. 석조전은 대한제국이 열강들과 견주어 뒤지지 않게 지었지만 쓰지는 못했다. 또한 정관헌(靜觀軒)은 동양과 서양의 건축 양식이 혼합된 건물이다. 정관헌의 기둥에는 황실의 행복을 상징하는 박쥐도 그려져 있다. 정관헌은 고종이 커피 향을 마시며 음악을 듣고 외교사절단을 만났던 궁안의 고요한 공간이다.

정동길,길 위에서 길을 찾다

▲ 전통과 근대의 만남_우리나라 최초의 교회당_정동제일교회

정동 주변에는 각국 공관과 서양식 학교가 세워졌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그리고 정동제일교회가 새롭게 선 보였다. 고종은 친히 학교와 학명을 편액하여 주었다. 학생들까지도 추천하여 학교에 보내 주었다. 서울 주변 곳곳을 대한제국에 맞게 변화 시켰다. 전기가 들어오고, 전차가 다녔다. 사통팔달(四通八達)로 도로가 방사형으로 뻗어났다. 전신주가 즐비하고,가로등이 설치되었다. 서울은 계획적인 도시로 변해갔다. 종로통에 칭경기념비전이 설립되고, 최초의 국립현충원인 장충단(奬忠壇)을 목멱산 도성안에 세웠다. 대한제국의 위상과 황권의 상징이었다. 정동이 변하듯,서울이 변해갔다. 경운궁 궁담길은 근대 역사의 시작이자 아픔의 뒤안길이다.

▲ 전통과 근대의 공존,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사립학교_이화학당 정문

정동은 대한제국의 시작이자과 끝이다. 경운궁과 환구단에서 시작하여 중명전(重明殿)에서 끝났다. 정동길은 일제강점기의 시작을 알린 공간이다. 정동은 돈의문과 소의문의 중심에 있다. 정동은 경희궁과 경운궁의 사이에 있는 핫 플레이스다. 도성안과 밖의 중심이듯, 서양문화와 전통문화의 경계에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역사가 필요하다. 미래를 선도하는 리더에게 100여 년 전 정동은 역사책이자 100년 후 예측하는 교과서다. 역사와 문화가 가득한 경운궁 궁담길에서 시간여행을 한다.

여기는 서울의 한복판 외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공간이다. 위풍당당한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궁과 궐이 있는 신성한 곳이다. 가장 활발한 거리에서 가장 가까운 미래를 설계한다. 100년 전 새로운 심장 정동은 100년 후 가장 활기찬 미래가 될 것이다. 서울의 미래가 대한민국의 내일이다.

▲ 최철호 성곽길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 (저서) ‘한양도성 성곽길 시간여행’

[최철호 소장]
성곽길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양도성에 얽힌 인문학’ 강연 전문가
한국생산성본부 지도교수
지리산관광아카데미 지도교수
남서울예술실용전문학교 외래교수

저서 : ‘한양도성 성곽길 시간여행’

최철호 성곽길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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