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미국은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혁신적인 사고가 만연된 민주국가로 인식되기 십상이다. 과연 그럴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미미 레더 감독)은 프로테스탄티즘으로 시작해 존 로크의 ‘자연주의적 관용의 원리’와 장 자크 루소의 국민 주권으로 건설된 미국의 50년 전 민낯을 까발린다.

인종 차별도 채 해결되지 못한 1956년. 결혼해 딸 제인을 낳은 루스는 하버드대학교 로스쿨에 전체 학생의 단 2%에 해당하는 9명의 여학생 중 한 명으로 남편 마티의 뒤를 이어 입학한다. 마티와 함께 정의로운 변호사를 꿈꾸던 루스는 즐거운 나날 중 경악한다. 쓰러진 남편에게 고환암 판정이 내려진 것.

하지만 그녀는 마티에게 희망을 심어준 뒤 예비 변호사, 간병인, 엄마 역할은 물론 마티의 수업을 대신 듣고 필기를 전해주는 등 1인다역을 해낸다. 호전된 마티는 퇴원해 뉴욕의 로펌에 취업이 되고, 남편과 떨어지기 싫은 루스는 학장에게 양해를 얻는 데 가까스로 성공해 컬럼비아 대학으로 전학한다.

둘째까지 낳는 가운데 수석 졸업을 한 루스는 13번째 로펌의 문을 두드린 끝에 남녀 차별의 두꺼운 벽을 넘지 못하고 법대 교수 제안을 받아들여 교단에 선다. 1970년, 베트남전 파병 반대 시위가 거리를 뒤덮는다. 15살 제인은 사사건건 부모의 바람과 달리 엇나가고 루스와 마티의 고민은 커져간다.

▲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 스틸 이미지

루스가 변호사를 꿈꾼 이유는 성차별 등 미국 사회에 만연된 모든 차별을 깨뜨림으로써 세상을 바꾸려는 원대한 야망 때문이었다. 어느 날 마티가 한 남성 보육자와 관련된 사건을 루스에게 가져온다. 루스는 이게 그 희망의 시작이라는 강력한 믿음을 갖고 시민자유연맹 대표 멜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다.

미국은 각종 차별과 관련된 178건의 송사가 있었지만 모두 ‘합법적 차별’로 판결이 났다. 루스의 주변 사람들은 모두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며 말리지만 그녀는 마티와 제인의 지원과 응원에 힘입어 이 힘든 싸움을 결연히 수행해나가기 위해 존경하던 인권 변호사 도로시를 찾아가는데.

식자는 미국에는 2가지 정신이 공존한다고 한다. 영국의 ‘국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입헌군주제가 낳은 명예 정신에 더한 경험론적 보수주의를 필두로 프랑스의 낭만주의, 독일의 관념론, 이탈리아의 예술정신 등이 혼재한 전통 대 신세대의 링컨주의(자유, 평등)와 프래그머티즘(실용)의 상존.

루스의 시대는 링컨이 목숨 바쳐 노예제도를 폐지한 지 100년이 넘었지만 그린북의 사례처럼 엄연히 인종 차별 현상이 남아있듯 성차별 역시 당연한 듯 법이 보호하고 있었다. 루스 키키 베이더 긴즈버그는 그런 각종 차별에 대항하는 혁혁한 공로를 인정받아 연방대법관까지 올랐고, 젊은 문화정신이 됐다.

▲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 스틸 이미지

1972년 6월 13일. 찰스 모리츠라는 미혼 남성이 노모 보육에 지출한 296달러에 대한 세금 공제를 거부당한 데 대한 역사적인 항소심이 열린다. 앞서 법원이 보육비 공제 신청은 여성만 가능하고, 남자는 아내가 중증 장애인이거나 사별, 이혼해야 적용된다는 법에 기준해 국세청의 손을 들어줬던 것이다.

이 사건을 처음 접한 루스는 지금까지 법이 보호해온 각종 차별에 맞서 향후 50년에 걸쳐 치를 전쟁의 포문이 될 것임을, 그 차별을 해제할 열쇠임을 직감하고 세상을 바꾸겠다고 팔을 걷어붙인다. 루스는 변론 때 “하버드 로스쿨에 다닐 땐 여성 화장실도 없었다. 그래도 불평도 못 했다”라고 토로한다.

여성은 신용카드를 남편 명의로만 발급받을 수 있고, 여성 경관은 뉴욕에서 순찰할 수 없다. 여성이 군용 수송기에 타는 것, 탄광에서 일하는 것은 불법이다. 수당을 받을 수 있는 초과근무가 금지, 일리노이주에선 변호사 시험에 응시할 수 없다. 1972년을 기준으로 보면 우리나라와 별다를 바 없었다.

첫 신. 검은색, 회색 등의 무채색 계열의 정장을 한 남자 ‘넥타이 부대’ 속에 홀로 파란색 정장을 걸치고 학교에 들어서는 루스는 바로 성차별에 대한 미국의 인식을 상징한다. 심지어 수업 중에도 남학생의 성차별 발언이 횡행한다. 로펌이 그녀를 거부하는 이유가 다른 변호사 아내들의 질투 때문이라니!

▲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 스틸 이미지

그러나 그녀는 고환암 생존율 5%와 맞싸운 슈퍼우먼이다. 이 작품은 신념과 의지의 다툼, 현실과 모험의 갈등, 전통과 개혁의 충돌에 집중한다. 이 백가쟁명은 사실 역사, 학문, 실생활 속의 오랜 쟁패다. 주지주의(지성 우선)와 주의주의(의지 우선)의, 유물론과 관념론의 영속하고 영원한 평행선 달리기다.

보수적인 하버드 학장은 당당한 루스에게 “하버드의 교육이 빛을 발하는군”이라고 은근히 자신을 과시하지만 루스는 “이건 컬럼비아에서 배운 건데”라고 통렬하게 한방 먹인다. 그녀가 로펌 취업을 포기한 뒤 찾은 일자리도 선임이었던 흑인 교수가 그만둔 공석이라는 것 역시 혹독한 차별주의를 말한다.

가장 중요한 주제는 사회적 변화의 속도에 따른 인식론의 변화와 그에 발맞춘 법 제도의 개선이다. 루스가 변론 작성 때 ‘섹스’를 ‘젠더’로 바꾸듯 시대가 변하면 생각과 제도와 개념도 바뀌어야 한다. 영화 말미의 루스의 4분여의 최종변론은 이 작품의 백미다. 단순한 페미니즘이 아니라 인권 영화인 증거다.

‘20세기 페미니즘의 얼굴’ 글로리아 스타이넘을 추종하며, “엄마는 자기 현명함을 과시하는 폭군”이라고 사사건건 루스와 대립각을 세우던 제인이 그녀의 페르소나로 성장하는 페미니즘도 교훈적이다. “내 성별에 특혜를 달라는 게 아니다”라는 루스의 발언은 모든 피차별자의 호소다. 12살. 6월 13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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