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엑시트>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이상근 감독의 데뷔작 ‘엑시트’는 신파, 빌런, 수동적 주인공이 없는 3無를 표방한다. 작위적인 최루 코드도, 개연성 없이 주인공을 괴롭혀 관객의 분노를 유발하는 악인도, 주인공의 기적을 바라는 요행수도 없이 재난 영화로서는 매우 독자적인 노선을 택했는데 살짝 가볍지만 꽤 재미있다.

3녀1남의 막내 용남(조정석)은 대학 졸업 후 입사시험에 떨어진 지 한참 된 ‘취준생’이다. 엄마 현옥(고두심)의 칠순잔치를 집에서 꽤 떨어진 ‘구름공원’에 마련한다. 점장이 바람을 잡아 잔치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 부점장인 의주(임윤아)가 허겁지겁 나타나고, 마주친 용남과 의주는 놀란다.

둘은 대학 선후배 사이로 산악부에서 만났고, 용남이 의주에게 속마음을 고백했지만 보기 좋게 딱지를 맞은 뒤 멀어졌다. 점장은 건물주의 아들로 이기적이고 비열한 인물이다. 그는 의주에게 눈독을 들이고 치근대지만 그 속내를 잘 아는 의주는 성희롱에 가까운 그의 애정공세에 선방 중이다.

잔치가 끝나갈 무렵 갑자기 창을 깨고 가스통 하나가 날아와 유독가스가 퍼진다. 가스에 노출된 첫째 누나 정현(김지영)이 피부에 발진을 일으키며 쓰러지고, 사람들은 옥상으로 피신하려 하지만 문이 굳게 잠겼다. 점장은 열쇠는 1층에 있지만 옥상에서 열 수 있다고 하며 뭔가 숨기는 듯한데.

▲ 영화 <엑시트> 스틸 이미지

재난 소재는 상업 영화에서 빠질 수 없는 단골 메뉴다. 이 영화는 ‘타워링’(1974)이나 ‘타워’(2012)에 비교하면 규모가 작은 소품 같지만 내용만큼은 버라이어티하고, 긴장감은 충분하며, 소소한 재미가 풍성하다. ‘공룡’ CJ엔터테인먼트가 텐트폴 작품으로 내세우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주제는 ‘세상에 쓸모없는 건 없다’다. 동네 놀이터에서 철봉에 매달려 고난도의 클라이밍 훈련을 하는 용남으로 시작된다. 꽤 탄탄한 근육질을 자랑하며 철봉을 자유자재로 활용한 그의 피지컬은 놀랍다. 그런데 카메라 앵글이 돌아가 그를 바라보며 감동하는 구경꾼을 비추면 동네 할머니들이다.

이어 꼬마 무리가 몰려와 용남을 보더니 ‘동네 바보’라고 중얼거린다. 용남은 현재의 ‘N포세대’를 상징한다. 인생을 믿고 맡길 직장도 별로 없지만 그런 데 취업하는 것도, 오래 붙어있는 것도 힘들어 연애도, 결혼도, 미래 설계도 포기한 젊은이들의 암울한 현실이다. 취업한 의주도 다를 바 없다.

그녀는 산악부의 에이스였다. 심지어 용남과의 대결에서도 이겼다. 그렇게 청운의 부푼 꿈을 안고 희망적인 대학 생활을 보냈지만 지금은 이기적이고 비도덕적인 사주의 아들을 상사로 모시며 성희롱을 감내하고 있다. 업무 역시 그리 비전을 주지 못한다. 손님 응대와 상사의 비위 맞추기가 전부.

▲ 영화 <엑시트> 스틸 이미지

정부는 수시로 국민들에게 긴급 재난 문자를 발송하지만 용남 자체가 집안의 재난이라는 부모의 코멘트는 참으로 참담하다. 어쩌면 TV 채널 선택권마저 없는 아버지 장수(박인환)는 용남의 미래일 수도 있다. 용남이 “불쌍한 매형, 맞고 살지나 않는지”라고 동정하는 정현의 남편도 마찬가지다.

용남이 만용을 부리자 장수는 “하지 마, 뭐든지 하지 말라고”라고 만류하고, 용남은 “나 좀 믿어줘”라고 애원한다. 젊은이들은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망설인다. 오죽하면 ‘결정 장애’란 신조어까지 생겼다. 경험 많은 어른들은 모험에 부정적이다. 어른의 경험론이 청년의 용기에 걸림돌이란 교훈.

건물 안에서 군중이 점장을 책임자로 지목하자 그는 “아버지가 책임자”라고 발뺌을 한다. 그런데 구조 헬기가 왔을 때 정원 초과로 누군가 남아야 하는 상황에서 의주는 스스로 책임을 짊어진다. 그녀를 위해 용남도 남기로 한다. 그 후 또 다른 헬기가 왔을 때 학원 아이들 먼저 구하라 청한다.

‘타이타닉’이 침몰할 때 갑판 위에서 끝까지 연주하며 승객들의 도피에 용기를 북돋워준 후 장렬하게 배와 운명을 함께한 바이올린 연주자 윌레스 하틀리 등 8명의 악사들이다. 용남은 ‘용기 있는 남자’고, 의주는 ‘의지의 주역’이다. 평범한 ‘을’과, 사회적 루저가 노인부터 아이까지 구하는 영웅이다.

▲ 영화 <엑시트> 스틸 이미지

‘Le Petit Ange’(작은 천사)라는 간판은 그들을 상징하는 미장센. 그리 크지 않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스릴만큼은 ‘타이타닉’ 못지않게 손에 땀이 흥건해질 만한 수준이다. 두 주인공과 스턴트맨의 고생이 만만치 않았음을 짐작게 한다. 숭고하고 장엄한 희생정신은 억지스럽지 않아 긴 여운을 준다.

조정석의 코미디는 ‘건축학개론’의 ‘납뜩이’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완성도를 높였고, 그 외 조연들이 저마다 코미디에 단단히 한몫한다. 장수가 오염 지역에 고립된 용남을 구하러 가겠다며 택시를 잡지만 기사가 ‘승차 거부’를 하고, 장수의 친구가 해병대 기수를 밝히자 기사가 시동을 거는 식.

클라이밍 영화로는 ‘클리프 행어’(1993)나 ‘버티칼 리미트’(2000), 그리고 국내의 ‘히말라야’(2015)까지 많았는데 건물 클라이밍이란 게 신선하다. 용남과 의주가 건물과 건물 사이를 오가고, 건물의 외벽을 타고 옥상으로 올라가는 과정은 고작 4~5m에 불과하지만 의외로 강렬한 서스펜스를 준다.

빠른 속도감도 좋고, 청룽(성룡)식 일상 도구를 활용한 생존 방식도 재미있다. 마네킹을 활용한 재치는 웃음과 감동을 준다. 1개의 카라비너가 던지는 인간 사이의 연결, 혹은 관계라는 의미도 아름답다. 이기심과 공공정신, 본능과 책임의식을 통해 이 시대 청춘들의 비상구를 묻는다. 31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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