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김원봉]

▲ 의열단 : (사진 출처-김문 작가: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소설가 박태원씨의 만남

-의열단 활동얘기는 나중에 다시 얘기하기로 하고 출생과 어린 시절 얘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소설가 박태원씨를 압니까?”

-아, 소설 ‘구보씨의 하루’를 쓴 작가이군요.

“그렇습니다. 나에 대한 얘기를 1947년 5월에 ‘약산과 의열단’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펴냈습니다. 거기에 보면 나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김삼웅씨가 쓴 ‘약산 김원봉 평전’에도 기록됐는데 어디서 그런 자료들을 찾았는지, 아무튼 많이 애를 썼더군요. 소설가 이원규씨가 쓴 ‘약산 김원봉’은 소설형식으로 잘 풀어썼더군요.”

-혹시 소설가 박태원씨와는 안면이 있었나요.

“1947년 무렵 당대 최고의 작가였죠. 그 무렵 박태원씨가 의열단 단원 유자명이 쓴  ‘의열단간사(義烈團簡史)’와 ‘수삼동지’라고만 기록된 인물이 쓴 ‘단간령묵’, 근근이 보존되어있던 의열단 단원들의 편지를 참고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일본 경찰의 검거 작전 상황이나 재판 등을 보도한 당시의 신문기사 내용을 찾던 중 나와 인터뷰를 하게 됩니다.”

-태어난 곳이 밀양 내이동이라 돼 있던데요

“맞습니다. 그러니까 1989년 8월13일 오전입니다. 새벽부터 진통이 온 어머니는 몇시간 동안 계속되다가 마침내 온동네 떠나갈 듯한 울음소리를 내며 사내 아이를 낳았는데 바로 나였지요. 아버지는 결혼 1년만에 사내를 보게 됐다며 매우 반가워했습니다. 아버지는 싱글벙글하면서 집 앞을 흐르는 실개천으로 걸어내려가 세수를 했습니다. 그때 커다란 뱀장어 한 마리가 힘차게 꿈틀거리며 기어오르고 있는 것을 보게 됐습니다. 잡아서 애를 낳느라고 고생한 부인에게 고아주려고 했지만 오늘 만큼은 살생을 금해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지요. 이때 옆집에 사는 윤희규가 언제 왔는지 부채질을 하며 얘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윤희규는 무과 병과에 급제하여 정3품인 통정대부로서 시종원의 시종직 벼슬까지 올랐었습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아이의 이름을 부탁했습니다. 윤희규는 얼른 집으로 가서 주역을 꺼내 아이의 사주를 풀어보았습니다. 잠시 후 윤희규는 입을 떡 벌리며 아버지한테 ‘이렇게 좋은 사주는 처음 보네. 장상(將相)이 될 팔자일세. 장남이기도 하니 으뜸 원(元)를 넣어 원봉이라고 하게’라고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윤희규는 3년 뒤 넷째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김원봉을 도와 조선의용대의 제2인자가 된 윤세주였습니다.”

다음은 김삼웅씨가 기록하고 있는 김원봉의 집안내력이다.

김해 김씨 73세(世) 참판공파 42세손인 김원봉의 아버지는 김주익이고 어머니는 이경염이다. 어머니는 차남 경봉을 낳고 병사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천연이(千蓮伊)와 재혼했고 장녀 복잠과 6남 봉철, 7남 봉기, 8남 덕봉, 9남 구봉 차녀 학봉을 낳았다. 또 아버지는 박순남이라는 여인을 별도로 두고 3남 춘봉, 4남 용봉, 5남 익봉을 낳았다. 넷째 아들 익봉만 어렸을 때 죽었다. 해방후 김원봉이 월북하자 보도연맹사건 등으로 봉찰, 봉기, 덕봉 구봉 등 친동생 4형제가 처형되고 아버지는 굶어 죽었다.

김원봉은 고향의 명소인 영남루 앞을 유유히 흐르는 남천강과 유서깊은 표충사, 마을 뒷산인 재약산을 놀이터 삼아 석전(石戰)놀이를 하면서 성장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을사늑약에 대해 어른들로부터 들었고 조상 대대로 가꿔온 논밭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빼앗겼다는 것을 알게 됐다. 1910년 8월29일 나라가 일본에 넘어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뒷날 큰 뜻을 함께 펼칠 윤세주 등 마을 친구들과 눈물을 흘리며 복수를 맹세했다.

김원봉은 8세 때 서당에 들어갔다. 여느 아이들처럼 ‘통감’을 읽으면서 한학을 공부했다. 11세 때에는 밀양공립보통학교에 편입해 한학 대신 신식 교육을 받게 됐다. 그러나 이때는 조선총독부의 지침에 따라 일본어와 일본역사 교육이 강요됐다.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약산 김원봉(이원규, 2005, 실천문학사), 경성의 사람들(김동진, 2010, 서해문집), 한국 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김영범, 1997, 창작과 비평사), 양산과 의열단(박태원, 2000,깊은샘), 약산 김원봉 평전(김삼웅, 2008, 시대의창)

▲ 김문 작가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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