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권제의 생활어원 및 상식] 이집트 아랍 공화국/ 이집트 또는 에굽은 남북 길이 1,055km에 세계에서 38번째 넓은 나라로 남한 10배, 한반도의 4.5배 정도이다. 북쪽에 지중해, 북동쪽은 가자 지구와 이스라엘, 아카바 만과 접하며, 동쪽에 홍해, 남쪽에 수단, 서쪽에 리비아가 있다. 시나이 반도를 통한 아프리카와 아시아 두 대륙 사이의 요충지로 사이에 수에즈 운히를 통해 지중해와 인도양이 연결된다.

나일 강은 이집트를 두 지역으로 나눈다. 큰 서부 사막지대는 와디(건천)가 없는 저지며, 작은 동부 사막은 석회암과 사암층의 대지로 와디에 의해 널리 개석됐고, 남동부에는 험준한 산이 있다. 시나이 반도 남부에 최고봉 캐서린 산(2,642m)과 홍해 구릉지대에 해발 1,800m이상 산이 많다. 지류없는 나일 강은 카이로 북쪽에서 삼각주 저지대를 형성한다. 이따금 비가 내리는 동부 사막은 타마리스크, 아카시아 등의 가시관목, 작은 다육식물과 방향성 약초 등이 자란다.

이집트는 겨울(11∼3월)과 여름(5∼9월)만 있다. 유일하게 비오는 겨울은 서늘하고 온화하며, 여름은 무덥다. 카이로 남쪽 연 강우량은 약 2~5mm로 몇 년에 가끔 내리며, 북부 해안 지역은 10~3월에 410mm까지 내린다. 홍해 연안 평야는 비가 거의 없다. 시나이 산지와 다미에타, 발팀, 알렉산드리아 등 북부 일부 해안 도시는 눈이 내린다. 서리는 시나이 중부나 중부지역에서 볼 수 있다. 평균 기온은 여름 27~32 °C로 홍해 해안은 43°C까지 상승하며 겨울 평균 기온은 13~21°C 정도이다.

도시는 고대부터 알렉산드리아, 아시우트, 카이로, 엘 쿠브라, 기자, 룩소르, 콤 옴보, 알 미냐, 포트 사이드, 수에즈 등이 있다. 오아시스는 바하리야, 엘 다클라, 파라프라, 엘 카르가, 시와가에 있다. 보호 지역은 라스 모하메드 국립공원, 자라니크 보호구역, 시와가 등이다.

역사를 보면, 이집트는 세계 최고 문명국가 중 하나로 B.C 2925년경 상, 하 이집트가 메네스 왕이 통일하며 문명은 절정기에 들어섰다. 31개 왕조에 B.C 332년까지 계속된 이집트의 고대사는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으로 구분된다. 피라미드는 고왕국, 오시리스 숭배와 조각의 세련미는 중왕국, 제국시대와 유대인의 출애굽은 신왕국에 속한다.

아시리아 침략이 B.C 7세기에 있었고, B.C 525년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제국이 이집트에 왕조를 세웠다. B.C 332년 알렉산드로스 3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시작됐다. 로마가 B.C 30∼A.D 395년 이집트를 점복하며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관할이 되었지만 비잔틴 제국의 지배는 642년에 끝났다. 그후 200∼300년 내에 이집트는 아랍어 사용국으로 바뀌었고, 이슬람교가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다. 이집트는 우마이야 왕조와 압바스 왕조 칼리프국의 일부였다. 1171년 압바스 왕조의 지배로 귀속됐지만 맘무크들이 득세하며 1250년 무너졌다. 이들은 아랍 세계의 용병으로 비아라비아, 비이슬람의 노예들이었다. 이들의 이집트 왕조는 1517년 오스만 트루크에 함락될 때까지 지속되며, 이집트를 이슬람 세계의 동부 아랍어 사용권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1798년 나폴레옹 침략으로 몇 년간 지배를 받았지만, 프랑스 철수 후 알바니아인 무함마드 알리가 지배하며 오스만을 명목상 종주국으로 하는 왕조를 세웠다. 그와 그의 후계자들의 치부와 팽창주의 정책은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그 중 하나가 운하로 알리의 아들 사이드파샤의 수에즈 운하는 수만명 노동자들로 12년이 걸리며 영국과 프랑스에 많은 빚을 졌다. 영국은 국제 정세와 이집트의 상황을 이용해 1882년 내란의 와중에 이집트를 점령했다. 1914년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지만 저항과 제1차 세계대전 기간이라 영국은 분쟁을 원치않았다. 그래서 1922년 명목상 독립을 얻고 입헌군주국이 됐다. 그러나 군권 및 운하 이권 등 권리가 영국에 있었다. 군대가 1937년 독립하며 공군도 창설됐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연합 회원국으로 가입했고, 제1차 중동 전쟁도 참가했다. 1952년 쿠데타로 군주제가 타도되고, 혼란을 틈타 가말 아브델 나세르가 1953년 공화정을 선언했다. 그는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고 아스완 하이 댐을 건설했다. 1956, 1967년에 이스라엘과 2차례 전쟁을 치렀으나 실패로 끝났다.

후계자 안와르 엘 사다트는 이스라엘과 단독 평화노선으로 팔레스타인 문제를 묵인하며 타 아랍 국가들의 지탄을 받았지만 중동 평화회담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다 1981년 10월 암살됐다. 부통령인 호스니 무바라크가 계승해 그의 평화주도정책을 계속했으며, 1982년 1967년에 잃었던 시나이 반도에 대한 영유권을 회복했다. 그는 30년 재임중 2011년 2월 11일 반정부 시위로 물러났다. 이후 권력은 군부가 가졌지만 총선에서 무함마드 무르시가 당선됐다. 2013년 2월 1일 무르시 반대 시위가 발생했고 2013년 7월 3일 압둘팟타흐 시시 국방장관의 군부 쿠데타로 무르시가 축출되며 이후 압둘팟타흐 시시가 2014년 6월 8일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임기 6년의 대통령은 국회의 지명으로 국민투표로 선출되며(연임 가능), 국가원수와 군 최고 사령관을 맡는다. 또한 부통령, 총리, 내각과 국회의원 454명 가운데 10명을 임명한다. 국회는 정부의 정책을 심사하고 승인하며, 국회의원은 5년 임기로 일반투표로 선출된다. 이집트는 제한된 복수정당제도를 운영한다. 공산주의자들과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정당을 결성 및 정권 경쟁에 나서는 것은 금한다.

일반 공립교육은 초등(6), 예비(3), 중등(3)의 3단계다. 6∼12세 초등교육은 의무이며, 시험에 합격하면 계속 교육이 가능하다. 이슬람교 기관들의 교육기관도 있는데, 알아자르 대학교(970 설립)는 세계 유수의 이슬람, 아랍 학문의 중심지다. 15세 이상의 주민 중 55%가 문맹자다.

건강한 남자는 군대에 가는 징병제(고졸자까지 3년, 대졸 및 대학생은 1년)를 실시한다. 하지만 기독교 계통인 콥트교 신자들은 병역면제 대상이다.

인구 약 9,937만(2018년) 명 중 90% 이상이 국토의 약 5%인 나일 강변에 거주하며, 95%인 사하라와 리비아 사막 지역은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다. 평균수명은 남자 59세, 여자 62세이다. 중동에서 제일 인구가 많고 아프리카에서는 나이지리아 다음이다. 셈족과 함족의 혼혈로 외모가 거의 동질적이다. 이슬람 전래후 아랍화되어 그들을 아랍인으로 본다. 이는 아랍인들과 혼혈 및 고대 이집트인들이 아랍문화에 동화한 결과다. 소수민족은 나일 강 유역 남부의 누비아인, 동부 사막 남부의 함족 계통의 베자인, 서쪽의 시와인들, 서부 사막의 아랍인과 베르베르인의 혼혈족이 있다.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에 유럽인이 있다.

이집트의 경제는 수에즈 운하 수입과 관광 수입에 의존한다. 주민 40% 이상이 농사 짓는 나일 강 계곡과 삼각주 평야 및 오아시스 주변의 총 경지 면적은 국토의 2.3%로, 연간 2∼3모작 농작물을 생산한다. 가경지의 약 3/4을 차지하는 환금 작물은 면화, 사탕수수, 토마토, 수박, 양파, 오렌지 등이다. 식량작물은 옥수수, 밀, 보리, 쌀, 콩, 과실, 대추야자, 기름야자 등이 재배된다. 식량의 절반 이상을 수입한다. 목초지는 없지만 농장과 마을에서 물소, 소, 당나귀, 양, 염소, 닭, 오리, 비둘기 등이 사육된다. 신규 농지조성을 위해 지하수로 사막 관개 및 유수의 고도이용으로 토지개간을 한다. 총 어획고의 약 80%가 민물고기, 20%는 바다 물고기이다. 광업은 석유와 천연 가스가 주종인데 제조업을 합쳐 GDP의 22%를 차지한다. 광업은 노동인구의 0.3%를, 제조업은 16%를 차지한다. 혁명 후 공업화 정책으로 철강, 정유, 기계, 자동차조립, 화학, 건재, 제지 등이 새로 일어났다. 주 제품은 정유제품, 시멘트, 면직/ 모직물과 의류, 밀가루 등이다. 석유는 시나이 반도의 유전에서 생산된다. 석유 외에 광물 매장량은 보통으로 천연 가스, 철강, 인광, 망간, 석고, 인산염, 우라늄 등이 있다. 전력 생산은 아스완 댐과 아스완 하이댐이 담당한다. 고대와 중세의 기념물들, 온화한 겨울기후, 지중해의 해수욕장과 휴양지들은 관광객들을 많이 끌어들인다. 주요 관광지는 카이로의 가자 피라미드 지구와 스핑크스 그리고 이집트 고고학 박물관, 아스완의 아스완 하이댐과 필레 신전, 아부심벨 신전, 콜옴보 신전과 에드푸 신전, 룩소르의 함세슈트 장제전 및 카르나크 신전, 휴양도시인 후루가다 등이 있다.

교통기관은 대부분 국영이다. 자동차 발달로 도로가 정비되며 포장률이 70% 이상이다. 국영 철도는 1859년 카이로∼알렉산드리아를 효시로, 카이로를 중심으로 발달했다. 국영 이집트 항공이 국제, 국내 항공을 운행하는데, 카이로 공항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행 국제 항공의 요충지이다. 보행자용 육교/ 횡단보도나 지하보도 등이 거의 없어 매년 8,000명 이상이 죽는다. 나일 강은 수단에 이르는 수송담당 교통로로, 내륙수로는 총길이 3,200km 이상으로 수에즈 운하 제외 시 전부 나일 강 수로이다. 수에즈 운하로 매년 2만여 척의 배가 다닌다.

이집트 국민의 90%는 공인 종교인 이슬람교 수니파 신자이며, 10%는 기독교 신자이다. 이슬람교 계율을 지키는 일은 다른 나라처럼 엄격하지 않다. 기독교 신자 대부분은 이집트의 전통적 기독교인 콥트교도다.

639년 아랍인 침입 이전에는 고대 이집트어인 콥트어가 종교와 일상생활의 언어였다. 그러나 12세기까지 거의 아랍어로 대체됐고, 콥트어는 교회 전례용 언어로만 존재한다. 대다수가 공용어 이집트 아랍어를 사용한다. 주 외국어로는 영어와 프랑스어가 있고 일부 아르메니아어, 그리스어, 러시아어도 사용된다.

거대한 피라미드와 엄청난 분묘의 이집트 문명은 고대 건축가이자 엔지니어인 임호텝이 디자인한 죠세르 왕조의 피라미드, 스핑크스, 아부 심벨사원 등이 유명하다. 이집트 예술은 위사 와세프의 람세스, 하산 화티의 버내큘러식 건축부터 마흐무드 모카타르의 조각상, 아이작 파노스의 콥트식 도상까지 양식이 다양하다. 이집트의 대표적인 문화재로 세계 8대 불가사의인 피라미드가 있다. 작가로는 198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 나기브 마푸즈가 있다. 현대극은 유럽의 수입판으로 극작가 마흐무드 타이무르와 타우피크 알 하킴이 발전을 주도했다. 대중 음악은 고전음악, 민요, 서양음악이 섞여 있다. 매년 2/ 22일과 10/ 22일에 아부심벨 신전에서 아부심벨 축제가 열린다.

파라오의 나라 ‘이집트(Egypt)’는 어디에서 유래가 되었을까?

초기 이집트어 ‘Hat-ka-Ptah(멤피스의 프타 신전 이름인 ‘프타의 카(영혼) 사원)’가 미케네 그리스어로 인종 이름인 ‘ai-ku-pi-ti-jo(Egyptian)’로 변형됐다. 이 말이 고대 그리스어 ‘Aíguptos’로 유입됐고 다시 라틴어 ‘Aegyptus’와 중세 프랑스어 ‘Egypte’를 거쳐서 최종 ‘Egypt’로 정착을 했다.

고대 이집트 국호로 ‘Kemet’가 있는데, 나일 강 홍수로 형성된 흑토인 ‘kem(검다)’에서 유래했다. 이 이름은 이집트 콥트어 시대에 ‘kīmi/ kīmə’가 되었으며, 초기 그리스어는 ‘Khēmía’로 나온다. 다른 명칭으로 ‘ta-mry(강가의 땅)’가 있다. 상하 이집트는 각각 ‘Ta-Sheme'aw(사초가 자란 땅), ‘Ta-Mehew(북쪽 땅)라 했다.

현대 이집트의 공식 국호는 ‘미스르(아랍어: Miṣr, 이집트 아랍어: Maṣr)’이다. 셈어 기원으로 ‘두 개의 좁은 땅’을 뜻하며 ‘대도시’, ‘문명’, ‘나라’, ‘변경의 땅’도 의미한다. 형용사 ‘aigýpti/ aigýptios’는 콥트어에 차용되어 ‘gyptios, kyptios’가 되었으며, 아랍어에서 ‘qubṭī’가 되었다가 ‘qubṭ’로 변해 영어의 ‘copt’가 되었다. 이 말은 후기 이집트어 ‘Hikuptah(Memphis)’에서 나온 말로, 초기 이집트어 명칭 ‘Hat-ka-Ptah’가 와전된 것이다.

[김권제 칼럼니스트]
고려대학교 영어교육학과 졸업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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