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례와 강학의 공간 성균관 그리고 반촌 [문화지평 답사기]

전수정 칼럼니스트l승인2020.11.26l수정2020.11.26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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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파인 칼럼=전수정의 서울 프롬나드] 가을 정취를 만끽하기도 전에 찾아온 추위로 한동안 온몸이 움츠러들었다. 추위에 적응한 건지 날이 풀린 건지 조금은 나아졌다 싶을 무렵, 올해의 마지막 답사가 열려 참석했다.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성균관대 정문으로 향하는 길목은 코로나의 여파인지 주말임에도 휑했다. 젊은이들의 조잘대는 소리마저도 날려버린 징한 바이러스라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젓고야 말았다.

성균관대학교는 요근래 부쩍 인지도가 올라갔다. 우리나라 제1 의 대기업 삼성과 손을 잡아 졸업생들의 취업이 한결 수월해졌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고도 있다. 그러나 이 대학의 명칭에서 우선적으로 엿볼 수 있는 건 조선시대 교육 기관이자 제례 기관이었던 성균관이다.

교육은 늘 있어 왔다.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고구려의 태학, 신라의 국학, 고려의 주자감 등과 만날 수 있다. 성균관의 시초가 태학이다, 주자감이다 다툼이 존재하지만, 1398년 세워진 성균관이 조선이라는 나라의 근간이 된 곳이라는 점에 있어서만큼은 모두가 같은 인식을 품고 있지 싶다.

하나의 나라가 건립되면 종묘와 사직, 궁궐, 도성, 교육 기관 등이 순차적으로 생기기 마련이다. 성균관은 1398년 세워졌다. 조선의 개국이 1392년의 일이니 채 10년이 흐르기 전에 조선은 나라의 기틀을 다졌다고 보아도 될 듯하다. 앞서 언급하였듯 성균관은 강학과 제례라는 이질적인 요소가 공존하는 곳이다. 각각의 목적에 맞게 공간의 배치가 이루어진 터라 알고 접하는 이들에게는 무척이나 풍성한 이야기를 선사하나 모르는 상태라면 그저 그런 기와집의 연속으로만 보일 거 같다.

내가 방문한 날은 음력 초하루와 보름마다 지낸다는 삭망제(朔望祭)가 있는 날이었다. 평소에는 굳게 닫혀 있는 신삼문이 열리는 진기한 광경을 의도치 아니하였음에도 접했다. 한 번도 성균관 내부를 샅샅이 살핀 적이 없어서인지, 여느 날보다도 나의 걸음은 더뎠다. 2시간 반을 훌쩍 넘긴 시점까지도 나의 발길은 유생이라도 된 것 마냥 성균관에서 벗어날 줄 몰랐다.

성균관대학교 정문을 지나쳐 가장 먼저 만난 건 탕평비각과 하마비였다. 영정조 시대를 일컬을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탕평책의 흔적을 이곳에서도 만날 줄이야. 부디 성균관 유생들이 탕평의 정신을 받들길 바라는 마음이었겠지만 이미 노론 일색으로 기운 나라의 운명을 바꾸기엔 역부족이었을 듯하다. 생각을 이리 품어서인지 ‘성균관 유생들이 앞으로라도 당쟁 않고 서로 잘 화합하는 기회를 만들어보면 어떠할까’ 의향을 묻는 듯한 탕평비의 문장이 한없이 나약해 보였다.

하마비의 경우, 다른 곳에서도 본 적이 여러 차례 있는데, 새겨진 글자에까지 눈길을 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여기를 통과할 사람은 여기서 내려라’. 오늘날의 말로 풀어 읽으니 문장이 몹시 단호했다. 다른 곳의 하마비는 신분이 높은 사람, 낮은 사람 모두 말에서 내릴 걸 주문하곤 했는데, 아무래도 성균관에 말을 타고 들어오는 이들의 신분은 고귀할 수밖에 없으므로 이리 적은 게 아닐까 싶다.

후대로 갈수록 옅어지긴 하였으나 조선은 기본적으로 신분제 사회였고 계층에 엄격한 모습을 보였다. 고작(?) 말을 타는 문제만 하여도 정일품은 10보 전, 정삼품은 20보 전, 정칠품 이하는 30보 전에 말에서 내려 걸어야만 했을 정도였다. 조선이 그토록 지향했다는 명나라의 질서 또한 이러했을지. 사용된 명나라의 연호 ‘정덕’이 1505~1521년을 뜻함을 확인하고 나니 그나마 기분이 덜 씁쓸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다 겪고 풍전등화처럼 휘청거리는 상황에서 형식에 이토록 힘을 쏟았다는 생각은 차마 하고 싶지가 않았다.

유난히도 탐스러운 꽃이 달린다는 무궁화나무 이야기를 들으며 동삼문 쪽으로 향했다. 임금이 올 때만 열리는 문은 오늘도 굳게 닫힌 상태였다. 바로 뒤편 임금이 타고 온 가마를 놓는 공간인 하연대가 비어 있는 걸로 보아 오늘은 임금의 행차가 없는 날이다(?). 임금도 아니면서 동삼문을 넘봤던 나는 얌전히 어떠한 이름도 아니 붙었을 거 같은 문을 이용해 대성전으로 나아갔다.

평소 같았으면 맘껏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주어지지 않았을 대성전이 내게 들어오라 손짓했다. 제를 앞둔 시점이라 허락된 호사였다. 가운데 공자님을 중심으로 좌우를 총 39명의 제자와 유학자들이 호위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중국 성현 일색일 줄 알았으나 설총, 최치원을 필두로 정몽주, 안향(안유) 등 우리나라 유학자들에게도 한 자리씩이 배정돼 있었다.

지난 정규 교육과정에서 실학이 중시되는 풍토의 영향을 받았던지라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의 배향 여부가 궁금했다. 오로지 성리학에만 경도되지 않았던 정약용은 안타깝게도 공자 맹자 주자의 가르침에 한 치라도 어긋나면 모시지 않는 원칙(!)에 의해 성균관에 모시지 못했다는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그를 무척이나 아꼈던 정조조차도 품지 못했던 게 서학이었다. 비록 신앙 차원은 아니라고 하나 살아서도 크게 쓰임 받지 못했던 다산 선생은 사후에도 정통 성리학자로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듯했다. 성리학이 옹졸한 나머지 다산을 아우르지 못했다 하면 무례한 평이겠지만 나의 생각은 자꾸만 그 쪽으로 흘렀다. 조선 사회가 다양성에 관대하지 못한 나머지 스스로의 건강을 해하고야 말았다는 식으로.

제 준비가 한창이어서 재빠르게 이동이 필요했다. 짧게나마 묘정비 앞에서 대성전을 바라보았다. 건물에 걸린 ‘대성전’은 떡 써는 제 어미의 지극정성 보살핌에 힘입어 당대 최고의 명필로 군림했던 한석봉의 글씨라 하였다. 한문이라면 지레 겁부터 먹곤 해온 나의 눈에는 그보다 대성전 앞 나무로 시선이 쏠렸다. 모양이 참으로 기이했다.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길 좋아하는 인간은 이를 ‘삼강오륜’ 나무로 칭하기도 하였다. 오른쪽 나무는 세 개, 왼쪽 나무는 다섯 개로 갈라진 가지가 일품이었다. 비록 말 없는 나무라지만 서당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으니 수백 년 이 자리를 고수한 나무 또한 성균관의 의미를 알 터였다.

뒤로 돌자 이번에는 은행나무가 나를 반겼다. 공자가 행단(杏壇) 아래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기록에 따라 공자와 연관 있는 시설에는 어김없이 은행나무가 식재됐다고 들었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이야기 속 나무가 살구나무라는 주장도 있었다. 어느 쪽이건 공자는 나무가 드리운 그늘을 무척이나 사랑했던 것 아니겠냐며, 내 멋대로 추측해 보았다. 상상하는 순간의 즐거움에 취하니 사실 여부는 그리 중요치가 않았다.

또 하나의 문을 거쳐 이웃 공간으로 접어들었다. 제기 등을 보관하는 건물인 제기고와 온갖 허드렛일을 담당했을 수복이 거주했던 수복청이 나를 반겼다. 이번에도 건물 앞에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그대 죽었는가, 살았는가! 왠지 말을 붙이면 나무가 근엄한 표정을 띠고 날 바라볼 것만 같았다. 이로부터 그리 머지않은 곳 전사청과 포주도 눈여겨보게 됐다. 동물을 잡아 손질해 필요로 하는 음식을 만드는 일은 지체 높은 양반들이 거들떠 볼 성질의 일이 아니었다. 그저 사악한 기운을 막아 낸다는 회화나무(회나무 혹은 괴나무로도 불린다)를 심어 찜찜한 기운을 물리치려 들었던 게 양반이 행한 전부가 아니었을까 싶다. 자연스레 이야기는 ‘반촌’으로 흘러갔다.

지금도 규모가 작다고는 할 수 없는 성균관이다. 하나의 독립된 사회로서 성균관이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손길들이 바삐 움직여야만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성균관에는 딸린 노비들이 있었다. 그들은 고려 시대 때에도 조선의 성균관과 흡사한 기능을 수행했던 공간에서 주어진 일을 했다. 고려말 안향(안유)이 자신의 노비 100여 명으로 하여금 그와 같은 임무를 행하도록 명한 뒤부터 그리 됐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세워지자 그들은 한양의 성균관으로 이동해 반촌을 형성했고, 손에 피를 묻혀 가며 성균관 유생들의 식생활을 책임졌다. 성균관이 신성한 공간이라 가외 이득를 누린 건지, 그들의 거주지 반촌은 치외법권 지역이었다. 끔찍한 죄를 범한 흉악범도 이곳에 진입하면 처벌을 면했다. 아니, 이미 우리는 삼한시대에 ‘소도’라 하여 치외법권 지역을 운영(?) 해본 역사가 있다. 그만큼 성균관 또한 신성시 여겼다는 방증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 세대를 거쳐 가며 쌓인 반인(반촌 거주민)들의 한은 근대에 와 자녀 교육에서 드러났다. 현재도 존재하는 서울혜화초등학교는 반인들이 세운 학교라 한다.

제례의 공간을 둘러보았으므로 이번에는 강학을 위한 공간으로 넘어갈 차례다. 명륜당 앞에는 천연기념물 59호로 지정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울창함을 뽐내고 있었다. 조선시대 최고의 유생들이 모여들었을 성균관의 모습이 은행나무의 나이테마다 새겨져 있을 듯했다.

명륜당 앞에서는 조선의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김홍도의 그림을 통해 어느 정도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서당을 시작으로, 향교와 서원을 거쳐 성균관까지. 조선은 나름의 교육 체계를 지닌 국가였다. 그 중 성균관은 세종 때까지만 해도 고작 100명만이 입학할 수 있었던 조선 유일의 국립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소과(생원, 진사 시험) 합격자에게만 문이 열린 줄로만 알았더니 그렇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기부 입학에 해당하는 무언가가 있었을 줄은 몰랐다.

조선시대의 과거 급제는 오늘날의 대입에 버금갔다. 성균관은 자연스레 ‘조선판 국립 행정고시 학원’인양 과거 시험 준비 기관으로 전락하는 모양새를 띠기도 했다. 흥선대원군이 나서 ‘서원철폐령’을 내려 전국에 단 47개의 서원만을 놔두고 모조리 철폐에 나선 것 또한 성균관의 변질로부터 출발한다. 창창한 앞날을 희망했던 이들이 지방으로 낙향해 서원에 몸담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의 서원 숫자는 급증했다. 400개에 달하는 서원 중 사액서원(왕으로부터 서원명 현판과 노비·서적 등을 받은 서원)이 198개나 됐고, 이는 국가 재정을 휘청거리게 만든 원인이기도 했다.

명륜당 좌우로는 동재와 서재가 위치했다. 이는 성균관 학생들의 숙소와 같은 곳이다. 총 28개의 방으로 빼곡하게 들어찼으며, 생원진사 합격자들은 동재에, 사학 지방향교 출신인 경우에는 서재에 보통 머물렀다. 동재에 달린 북이 나를 유혹했다. 한 번 두드리면 고이 잠들어 있던 유생들이 기지개를 펼 테고, 또 한 번 두드리면 정갈하게 옷소매를 가다듬은 그들이 글을 읊을 것이다. 그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기 위한 아침 식사를 알리는 세 번째 북 두드림은 그들이 행하는 걸 보고 난 후에 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하련다. 배고픔도 배고픔이지만, 식년시, 알성시 등 시험을 치르려면 점 300개(식사 한 끼가 1점)를 모아야 했던 그들에게 나와 같은 사감(!)은 최악이란 평을 듣기에 충분할 것이다. 인터넷도 텔레비전도 없었을 시절, 단조로운 삶을 버티려면 이와 같은 낙(?)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난 히죽히죽 웃었다.

강학을 했던 공간이자 임금이 성균관을 방문하면 과거 시험을 운영하기도 했다던 비천당을 거쳐 존경각(도서관)과 육일각(활을 보관했던 건물)을 스쳤다. 이완용, 박제순, 홍종우, 윤덕영 그리고 이상설까지. 같은 공간이 낳은 다른 길에 대한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이미 무게 추는 기울었다. 어떠한 노력으로도 회생이 불가능해 보이는 조선을 버리는 게 개인의 안위를 위해서는 최선이었을 수도 있다.

국가가 시행하는 과거에 급제할 정도로 비상한 두뇌를 자랑했던 이들이 이를 몰랐을 수는 없다. 삶을 도모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다. 비상함에 충실했던 이들은 자신의 총명함을 인정해준 국가를 배신하는 것을 본능 추구의 방편으로 삼았다. 조선인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자 김옥균을 암살한 대한제국의 ‘황실파’ 관료였던 홍종우의 길도 어찌 보면 친일파가 택한 길과 유사해 보인다. 그는 조선이 정답이라는 신념에 매달렸다. 김옥균은 자신이 믿어온 바람직함에 균열을 가한 인물이므로 제거해야 마땅했다.

나는 가끔 시대를 고민한다. 만일 내가 일제 강점기 혹은 그보다 앞선 조선 말기에 태어났다면, 과연 난 어떤 길을 택했을까. 이상설과 같은 독립운동가의 삶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의지가 약하면 필히 흔들린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친일반민족행위자들 또한 그랬다.

단아한 건물을 앞에 두고 이 무슨 생각인지. 스치는 바람에 나는 어렵사리 현실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성균관과 반촌의 경계 부분에 가까워서인지 온갖 기능을 수행하는 공간들이 거듭 전개됐다. 제관들의 공간이라는 향관청, 서월랑, 동월랑 앞에서는 나지막한 굴뚝에 잠시 시선을 드리웠다. 굴뚝이 내뿜는 연기가 무척이나 매캐할 것만 같았으나 이 또한 일종의 훈증 효과를 누리기 위한 설계라니 놀라웠다. 화려한 단청을 뽐내는 건물의 굴뚝은 처마보다 높이 쌓아올렸다고 한다. 선조들의 지혜는 나의 짐작보다 훨씬 뛰어났다.

사무를 보는 인원이 머물던 공간인 정록청에서는 방과 마루를 구분하는 방법을 익혔다. 머름이라 하는 구조물(창 아래 설치된 높은 문지방)이 존재하면 방이요, 없으면 마루다. 뭔가 다르다고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데, 이와 같은 차이에 대해 알려 든 적이 없음이 부끄러웠다.

건물로 만나진 못했으나 유생들의 식사를 담당했던 여자 하인들을 위한 공간 ‘비복청’도 이야기로 접했다. 앞서 거닐었던 수복청 소속 하인과 비복청의 하인이 결혼해 아들을 낳으면, 그 아이는 커서 수복이 된다. 만일 수복청의 하인이 반촌의 여식과 결혼해 아들을 낳으면 그건 서리다. 서리는 조선 시대에, 중앙 관아에 속하여 문서의 기록과 관리를 맡아보던 하급의 벼슬을 지칭하는 명칭이다. 천대 받는다는 점은 동일할 테지만 그래도 글을 다룰 수 있었단 사실이 놀라웠다.

아직 많은 이야기가 남은 듯 한데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빠듯했다. 직장에서의 일로 인해 자리를 떠야만 한다는 압박이 슬슬 나를 괴롭혔다. 잠시였지만 진사식당을 바라보고 앉았다. 항시 향했던 방향과는 정반대라 할 수 있는, 툇마루에 앉아 바라보는 세상은 사뭇 달랐다. 손님[客] 아닌 주인[主]으로 이 세상을 살아 본 적이 있었던가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후로도 답사는 이어졌지만, 나의 답사는 성균관에서 마무리됐다. 이미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웠다. 과거시험을 치르러 한양으로 향해야겠다.

전수정 칼럼니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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