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형기의 <낙화> 시 중에서

사진: ㈜메인타이틀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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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파인 칼럼=정분임 작가의 아무튼 영화&글쟁이 엿보기] 가야 할 때는 이 세상과 이별 할 때, 사랑하는 가족을 남기고 떠날 때이다.

81세의 할머니 해리엇 롤러는 죽기 전에 듣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래서 사망 기사를 전문적으로 쓰는 앤 셔먼을 찾아간다. 앤의 손을 거치면 별로였던 사람들의 삶도 모두 가치 있고 명예로운 것이 되었다.

앤은 해리엇에게서 받은 수백 명의 명단 목록대로 해리엇의 주변 인물들을 찾아 나선다. 해리엇 사망 기사에 실릴 주변인들의 평을 수집하기 위해서였다.

“그 여자 때문에 심리치료 받고 있어요.”

“그 여자가 죽으면 좋겠어요.”

해리엇을 담당했던 산부인과 의사, 미용사, 심지어 목회자까지도 그녀에 대해 악평만을 쏟아내었다.

“Never!” 좋은 얘기 한마디만 해 달랬지만 결국 “하나도 없다”였다

앤이 그녀를 위해서 쓸 수 있는 사망 기사는 “해리엇은 미국의 성공적인 광고 기획사 대표였으며, 천재적인 광고기획자였다.” 이것이 전부였다.

해리엇은 “내 인생 아직 안 끝났어”를 공표하며 앤에게 자신의 업적 다듬기를 도와 달라고 한다. 다음 날 복지관을 찾아 위험에 처한 아이들을 위해서 연설을 하고, 의도적으로 삶에 영향을 끼칠 만한 아이를 물색한다. 선생님 앞에서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대는 9살 흑인 소녀 ‘브렌다’를 발견한다. 해리엇은 브렌다의 멘토가 되기를 자청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해리엇은 인디 애호가들을 위한 라디오 음악방송국의 DJ가 된다.

사진:㈜메인타이틀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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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엇은 자신만이 옳고 합리적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다른 이에게 틀렸다, 잘못되었다고 지적했다. 그녀의 정원사에게, 미용사에게, 요리사에게, 그리고 남편에게, 또 딸에게까지. 그녀는 결혼하고도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았으며, 남편을 얼간이라고 여겼기에 22년간 부부로 살다가 헤어졌다. 딸의 약혼 파티에서 약혼자가 못났다며 악평을 해대었다. 그래서 딸은 엄마 곁을 떠났다. 그렇게 헤어진 지 10여 년 만에 모녀는 만났다.

딸은 내로라하는 최고의 뇌신경 전문의가 되었고, 두 아이의 엄마였고, 지금은 행복하다고 했다. 딸의 행복한 모습에 해리엇은 폭소를 터뜨린다. 자신이 틀린 것을 깨달을 때 그녀는 아주 크게 웃는 습관이 있었다.

자신이 나쁜 엄마였다고 생각했기에 해리엇은 그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자신이 나쁜 엄마였기에 딸이 불행할 거라 예상했다. 해리엇은 자신만만하게 앤과 브렌다에게 “난 좋은 엄마였어. 이게 바로 나야”라고 외친다. 이토록 자기중심적이고 자기긍정적인 해석은 해리엇의 가장 큰 재능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이면이기도 하다.

해리엇과 앤, 브렌다는 모두 결손 가정을 지녔다.

앤이 어릴 때 앤의 엄마는 자신의 꿈을 위해서 가정을 떠났다. 브렌다는 아빠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해리엇은 싱글맘이었다가 독거노인이 되었으니.

온전치 못한 가정사를 지닌 세 여자는 호수에서 함께 물놀이를 하였고 함께 춤을 추었고 한 침대에서 잠을 잤다. 할머니로 엄마로 딸로 손녀로 서로를 알아가며 이해했고 존중했다.

해리엇은 심부전증으로 세상을 떠난다. 앤과 브렌다가 춤추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잠자듯이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평생 록큰롤을 사랑하고 81세에 DJ가 된 해리엇 롤러가 목요일 저녁에 별세하다.’

해리엇은 장례식에 쓰이는 꽃, 음악, 성경 문구, 좌석 배치까지 모두 지침을 남겨두었다. 장례식까지 자신의 방식대로 통제하면서 떠났다. 자신의 집을 지역 사회에 기증하고, 신문사에 기부금을 전하고, 음악방송국에는 레코드 컬렉션을 전했다.

해리엇은 죽기 전에 ‘듣고 싶은 말’이 아니라 ‘가장 하고 싶은 말’을 남기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말썽쟁이 브렌다와 언제나 주저하고 망설이는 앤에게 용기를 주고 활력을 주었다.

해리엇은 수필가가 되고 싶어하는 앤에게 “현실을 쓰면 좋겠다. 앞으로 크게 실패해라. 실패해야 사는 거다”고 했다. 앤은 기자 일을 그만두고 해리엇이 선물한 항공권으로 스페인으로 떠난다.

사진:㈜메인타이틀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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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렌다에게는 램프와 함께 “네가 이끌어라. 그들이 따라올 것이다”라는 글을 남겼다.

해리엇은 마지막 이후에도 남은 이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싶어했다. 그녀는 임종을 합리적으로 준비하였기에 앤은 감동적인 추모사를 쓸 수 있었다. 합리적인 정신의 소유자 해리엇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고 소망이었다.

한 집안의 가장이 임종을 준비하지 못하고, 유언 한마디 없이 떠났을 때 유가족이 겪는 혼란과 분쟁을 종종 목격한다. 슬픔을 처리할 겨를도 없이 유산 문제 등으로 시끄러운 일이 많다. 고인을 원망하고, 남은 자들끼리 증오하면서 지낸다.

이러한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라도 아직 창창한 나이에 유언을 준비해보면 어떨까?
해리엇처럼 가장 하고 싶은 말을 가족과 친구와 이웃에게 들려주면 어떨까?
그리하면 가는 이의 뒷모습이 추하지는 않을 것 같다.
여러분은 죽기 전에 가장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정분임 작가
정분임 작가

[정분임 작가]
전) 극동방송 작가
시립강북노인복지관 문학 및 글쓰기 강사
저서 : 영화로 보는 신앙, 꿈꾸는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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