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제공 :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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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파인 칼럼=정분임 작가의 아무튼 영화&글쟁이 엿보기] “저는 조선의 옹주로서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나는 사람들의 희망이 되지 못했어요.” 영화 끝 장면에서 덕혜옹주가 남긴 말이다.

덕혜옹주는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마지막 딸이었으나, 그녀의 어머니는 소주방 나인 출신이었다. 옹주는 일본에 볼모로 가서, 일본 황실에서 정해준 백작과 정략결혼을 하였고, 해방이 되어서도 조국에 돌아가지 못한 채 정신병원에서 넋을 놓고 살아야 했다.

조선 황실의 마지막 황녀,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일제의 앞잡이 한택수 장관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일본에 징용된 조선인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 앞에서 덕혜옹주가 일본에 우호적인 특별연설을 하면, 어머니가 계신 조선으로 옹주를 보내준다는 제안이었다. 조선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던 황녀이기 전에 병든 어미의 딸이기도 했던 덕혜는 조선인 동포들 앞에서 인사말을 시작했다. 동포들의 앞 줄에 선 여자아이가 기침을 하자, 덕혜는 연설을 멈추고 모자를 벗으며, “동포 여러분, 아무것도 해 드릴게 없는 제 자신이 부끄럽고 죄스럽습니다. 우리에겐 돌아갈 고향이 있습니다. 빼앗긴 들에는 봄은 옵니다!.” 예정에 없던, 동포들과 조국을 위로하는 내용을 외친다. 그러자 동포들이 박수를 쳤다. 한 남자가 ‘아리랑’을 선창하자 동포들이 소리를 높여 합창을 하였다.

그리고 “우리를 조선으로 보내 주십시오.” 동포들이 대열을 허물고 옹주 쪽으로 몰려들었다. 동포들은 일본군의 군홧발에 차이고 총부리로 얻어맞는다. 덕혜도 한 장관에게 뺨을 맞는다. 덕혜는 결국 조선으로 가지 못한 채 어머니의 부음을 듣는다.

사진 제공 :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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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는 김장한(어린시절 약혼자)과 상하이 임시정부 요원들의 밀약 아래 망명을 시도한다. 초대 신무천황의 즉위를 기념하는 기원절 행사장이다. 상하이에서 온 독립투사는 행사장에 폭탄을 투척했으나 한 장관을 제거하려던 계획은 실패하였다. 행사장을 미리 빠져나온 영친왕은 해안을 통하는 도로 부근에서 붙잡히게 된다. 시즈오카현 독립군 은신처로 덕혜를 데려온 김장한은 이틀 후 복동이 준비해온 배를 타고 중국으로 향할 계획이었다. 덕혜와 김장한은 일본군의 총격을 피해 가까스로 해안가에 다다라 복동을 맞이한다. 그러나 복동 뒤에 숨은 한 장관에게 김장한은 총탄을 맞고 덕혜는 일본군에게 끌려간다.

조국은 해방되었으나 조선 왕권 부활을 경계했던 이승만 정권은 대한제국 황족들의 입국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영친왕과 덕혜는 조국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서울신문 기자가 된 김장한의 노력으로 덕혜는 1962년이 되어서야 꿈에도 가고 싶었던 조국에 갈 수 있었다.

덕혜가 말한 것처럼 그녀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옹주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었기에 늘 보온병을 안고 있었다. 독살될 위험이 있을지 모르니 물 한 모금이라도 조심하라는 어머니 양 귀인의 당부 때문에 덕혜는 늘 보온병을 지니며 그 속에 든 물만을 먹었다. 언제나 위협당하고 감시당하며 지냈던 덕혜는 어디서든 살벌하고 두려웠을 것이다. 옹주마마라는 존재 자체만으로 빛나고 영화로웠던 덕혜가 수많은 궁녀들의 도움 없이 일본에서 일본 백작의 아내로, 또 아이의 엄마로 그 모든 것을 스스로 해내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사진 제공 :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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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한이 대한민국 제1 통치권력자에게 대한제국 황족들의 실상을 고한 끝에, 조국에 돌아올 수 있었던 옹주는 조국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비탄을 터뜨리고 만다.

덕혜는 태어날 때부터 궁녀들의 섬김으로 옷을 입고, 먹으며 지냈다. 떠받들어지고 지지받은 대로 느끼고 생각해 왔기에, 백성을 먼저 섬기거나 백성을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저항의지는 부족했다. 그래서 해방 이후 자신을 옹주로 존중하고 섬겨줄 생각이 없는 조국에 대해 섭섭했을 것이고, 옹주를 잊으며 지내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조국에 돌아갈 수 없는 비탄에 자포자기하고, 여러차례 자살을 시도하며 삶의 의지를 놔버린 것이다.

결국 빼앗긴 들에도 봄은 왔다. 그러나 반쪽짜리 봄이었다. 1945년 해방을 맞이했으나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고 남북은 분단되었다. 덕혜에게 사라진 대한제국, 다시 찾은 덕혜의 대한민국이었지만 반쪽의 한반도, 반쪽의 들이었다. 이 한반도에 온전한 봄은 언제쯤 올까? 그러나 덕혜가 연설에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온다’ 했듯이 되찾은 들에서 남북한이 하나가 되어 흙을 밟아볼 그 날은 와야 한다. 그 날은 반드시 와야 한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중에서

정분임 작가
정분임 작가

[정분임 작가]
전) 극동방송 작가
시립강북노인복지관 문학 및 글쓰기 강사
저서 : 영화로 보는 신앙, 꿈꾸는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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