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보헤미안 랩소디’의 스코어가 800만 명을 넘어섰다. ‘스윙 키즈’가 강적 ‘마약왕’과 ‘아쿠아맨’ 사이에서 선전 중이다. 내년 1월 3일엔 구소련의 저항과 자유의 아이콘 빅토르 초이를 내세운 록 무비 ‘레토’가 개봉된다. 음악은 영화의 유닛이지만 연출이나 배우 못지않게 중요하고 때론 절반 이상이다.

퀸의 리드 보컬리스트 프레디 머큐리, 북측 군사로 한국전쟁에 참전해 혁혁한 전과를 올린 주체사상으로 무장한 로기수, 펑크록그룹 키노의 리더 겸 유명 영화배우 빅토르 초이의 공통점은 시대의 반항아란 것이다. 기성 체제에 반발해 자신만의 자유로운 영혼을 추구하고 예술의 숭고미를 찬양했다.

머큐리는 1946년 페르시아인 조로아스터교도의 피가 흐르는 인도 국적 아버지의 1남 1녀의 장남으로 영국 식민지 잔지바르에서 파로크 불사라라는 본명으로 태어났다. 그 후 인도를 거쳐 영국에 가 개명했다. 영화에도 등장하듯 그는 인종차별에 시달렸고, 게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퀸의 앨범 데뷔는 1973년이었다. 1970년 사실상 비틀즈가 해체한 이후 패닉 상태에 빠져있었던 록 팬들에게 영국의 ‘여왕’은 ‘영국의 록의 왕’ 비틀즈의 대안으로서 썩 괜찮았던 모양이다. 퀸의 전성기인 19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진 지금까지 거론되는 모든 록 스타들의 춘추전국시대였다.

특히 당시는 굳이 비틀즈와 퀸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레드 제플린, 딥 퍼플, 핑크 플로이드, 에릭 클랩튼, 제프 벡 등 영국 뮤지션들이 록의 종주국인 미국 시장을 쥐락펴락할 만큼 강세를 보였었고, 그 중심에 섰던 퀸은 비틀즈보다 쉽고, 딥 퍼플보다 부드러운 형식의 음악으로 대중과 만났다.

▲ 영화 <스윙키즈> 스틸 이미지

퀸은 글리터 록, 혹은 글램 록으로 분류된다. 그 장르는 음악의 형식보다는 패션 스타일을 말한다. 데이빗 보위가 대표적으로 성별을 초월한 의상이 특징이다. 퀸이 사랑받은 이유는 레코딩에 남다른 노력과 더불어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많이 불어넣는다는 것과 라이브에서 땀을 많이 흘리는 데 있다.

요즘 젊은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활동했던 퀸에 열광하는 이유는 영화의 완성도보다는 그들의 히트곡의 우수성과 더불어 라이브를 방불케 하는 영화적 장치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퀸의 히트곡들은 각각 고유의 감수성과 중독성이 강하다. ‘Bohemian rhapsody’는 오페라의 도입이 핵심이다.

‘We will rock you’는 저절로 발을 구르게 만드는 리듬감이 좋은 전형적인 라이브형 넘버고, ‘Love of my life’는 한 편의 아름다운 서정시를 연상케 만드는 러브 발라드다. 퀸에겐 하드록도, 심포니록도, 프로그레시브록도, 록발라드도 모두 포함돼 있다. 그 음악의 장르를 규정하지 못하는 이유다.

기수는 지금은 비록 미군의 포로지만 북측 군인 사이에선 일당백의 신화를 쓴 영웅이다. 전향파와 급진파로 세가 갈린 거제포로수용소 안에서 당연히 그는 급진파의 정신적 지주다. 하지만 어릴 적 러시아 민속춤을 배웠을 만큼 예술을 향한 본능적인 재질과 애정이 강해 우연히 탭댄스에 빠지게 된다.

미국 제국주의가 타도의 종점인 북측 군인에게 미국의 춤이라니! 그때부터 그는 이념과 본능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한다. 미군이 지도하는 탭댄스팀에 들어가 절대 가까이해서는 안 될 금기였던 생경한 미국의 문화에 빠지게 되면서 지금까지 자신이 배우고 정립했던 사상과 개념이 흔들리게 된다.

음악과 춤은 인류의 신화, 주술, 신앙, 행사, 노동, 역사 등 문화 기원의 전방위에 걸친 파트너다. 블루스는 북아메리카 대륙에 끌려온 아프리카 출신 노동자들의 너른 밭에서의 안부 인사, 노동요, 일과를 마친 뒤의 여가와 탄식에서 비롯됐다. 리듬은 뼈와 근육을, 음정은 심장과 피를 미치게 한다.

▲ 영화 <레토> 스틸 이미지

‘스윙 키즈’가 사족을 애무하고, 피를 뜨겁게 달구는 이유다. 음악과 춤에 사상이 뭔 대수일까? 음악도, 춤도, 이념도, 종교도 모두 사람이 만들었다. 만든 이유는 본능이 반응하고, 관능이 충동하며, 믿음이 충만하기 때문이다. 그럼 몸과 정서가 따르는 대로 즐기거나 믿으면 될 따름이다.

기수가 그걸 깨닫고 인간 본연의 예술적 숭고미와 비장미를 깨닫는 과정과 결과는 블루스고, 그리스의 비극이다. 백인 주인들은 흑인 노예들의 블루스를 훔쳐 리듬앤드블루스를, 또 거기에 자신들의 컨트리앤드웨스턴을 비벼 로큰롤을 만들었다. 고대 그리스 음악은 아폴론과 디오니소스가 공존한다.

빅토르는 고려인 2세와 우크라이나 태생의 러시아인 사이에서 1962년 카자흐스탄공화국에서 태어나 레닌그라드에서 자랐다. 레닌주의를 독재로 받아들인 스탈린 이후 흐루시초프-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 등의 권력자 시대를 산 그의 정서는 아마 음울하고 반항적인 그 음악과 같았을 것이다.

1990년 고르바초프가 대통령이 되던 해 의문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소비에트에서 5명의 여자가 그 뒤를 따랐으며, 카잔, 키예프, 알마아타, 타슈겐트 등지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생겼고, 모스크바 예술의 거리인 아르바트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모의 벽이 세워졌다.

만약 고르바초프가 조금 더 일찍 집권했더라면 빅토르의 삶과 죽음과 음악 스타일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의 최대의 히트곡 ‘혈액형’의 가사는 현학적인 듯하지만 사실 무의미의 의미를 뜻하는 다다이즘적이다. 전쟁의 아픔! ‘레토’는 펑크 록의 성지를 순례하는 디오니소스적인 황홀경의 도취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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