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도산 안창호] -선생님께서 민족중흥, 청년 교육 등을 위해 설립한 학교나 단체가 적지 않지만 그 중에서도 방금 말씀하신 흥사단은 특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1913년 선생님께서 창립한 이래 현재까지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살아있는 조직이기 때문입니다. 흥사단 창립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시겠습니까.“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겠습니까. 흥사단도 처음 조직될 때는 제가 일정 역할을 했겠습니다만 오늘날까지 그 단체가 명맥을 유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도산 안창호] -다음으로 교육 사업에 대해 말씀을 좀 나눠보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디 가나 학교를 세우시고 후학을 양성하며 평생을 교육자로도 사셨습니다. 교육에 그렇게까지 힘쓰신 이유는 무엇입니까?“간단합니다. 교육은 비할 바 없이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단언합니다. 독립 운동 기간일수록 우리는 더 교육에 힘써야 합니다. 죽고 살고 또 노예가 되고 독립이 되는 것은 지력과 금력에 좌우됩니다. 우리의 청년들이 하루 동안 학업을 하지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도산 안창호] -요즘은 정치인이라고 하면 나쁜 의미가 많아서 꺼림칙합니다만 선생님도 정치지도자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사람들을 이끌고 정부에서 일하셨고 민족 유일당 운동을 벌이시다가 1930년에는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셨습니다.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후배 정치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십니까?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제가 한창 활동하던 시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우리 사회에는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누가 무슨 글을 쓰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해외 생활을 말하자면 가족 문제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스물네 살에 이혜련 여사와 결혼을 하셨고 슬하에 2남2녀를 두셨습니다. 그런데 결혼생활 총 36년 동안 가족과 같이 생활을 하신 것은 12년 정도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가족 분들은 미국에 계셨지만 선생님께서는 국내와 하와이, 상해, 만주 심지어 남미 지역 등을 다니시며 활동을 하셨으니 말입니다. 당연히 그리우셨겠지요.“어찌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소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도산 안창호] -도산이라는 호가 하와이를 뜻한다는 것은 사실입니까? 도산은 후손들에게도 워낙 유명한 호라서 뭔가 훌륭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허허허, 호라는 것이 편히 부르는 별명 같은 것인데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여 짓는 것도 우습지 않습니까. 스물네 살쯤이군요. 아내와 결혼을 하고 그 다음날 바로 선진 문물과 학문을 배우겠다는 생각으로 아내와 같이 미국행 배에 올랐습니다. 배를 타고 한 달여를 가는 여정이니 혈기왕성하던 청년 시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도산 안창호] -인터뷰 내내 너무 무거운 주제만 다룬 게 아닌가 싶습니다. 주제를 조금 돌려보겠습니다. 선생님께서 걸어온 발자취를 한 번 훑어보죠. 우선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독립운동가의 길, 언제부터였던 것 같습니까?“글쎄요, 분명히 언제부터라고 딱 잘라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허허, 태어나기를 평안남도 강서군에 봉상도라고 하는 시골 섬마을에서 났으니 구식 서당 교육을 받고 넓은 세상을 볼 기회도 그다지 없었습니다. 그러다 서당 선배로 신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도산 안창호] -우리나라에 대한 일제의 강점은 36년간 이어졌습니다. 보통 말하는 그 기간은 1910년 강제 합방부터 시작해서 1945년 8월 15일 광복까지를 말하는 것인데요, 사실상 국권을 빼앗긴 기간은 더 길다고 봐야겠지요.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겼고, 1907년에는 고종 황제가 강제로 퇴위를 당했고 군대도 해산됐으니 말입니다. 한 세대가 훨씬 넘는 기간인데 그 기간 내내 독립에 대한 확신을 꺾지 않으신 점은 존경스럽습니다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도산 안창호] -임시정부는 말그대로 임시로 수립한 정부입니다. 주권도 영토도 잃은 상황에 해외에다 터를 잡은 것이었지요. 그 어려움을 말하자면 한두 가지가 아니었겠지만, 특별히 임시정부 운영의 힘든 일을 말씀하신다면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기자 선생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만리타국에서 일제의 눈을 피해가며 임시정부를 운영하는 데에 어려움을 어찌 한두 가지로 정해놓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임시정부로서 정부의 요소는 대략 갖추었다 하더라도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도산 안창호] -임시정부를 나가신 뒤에 가장 힘을 쏟으신 것이 국민대표회의 추진이었습니다. 2년가량 준비촉진위원회, 준비위원회 등을 꾸려가시다가 1923년에 본회를 개최하셨지요. 전국은 물론 해외 각지에서 국민대표 63회 회의가 열리는 동안 124명이 참석한 대규모 회의였습니다. 국민대표회의도 독립 운동에 더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하셔서 하신 사업으로 봐야겠지요.“그렇습니다. 나는 임시정부의 성공을 위해서는 통일이 필요하다는 말을 기회가 될 때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도산 안창호] -지금 말하자면 일제의 식민사관 같은 것이군요. 붕당 정치 같은 것을 예로 들어서 조선인들은 원래 대립과 분열을 잘한다고 민족성을 폄하하는 얕은 수 말입니다.“그렇지요. 스스로 우리 민족을 까내리면서 그렇게 말하는 자들이야 말로 통일을 방해하는 자입니다. 우리 국민은 본래 통일된 민족입니다. 언어도 하나요, 문자도 습관도 하나요, 정치적으로도 중국 모양으로 지방 권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중앙집권을 유지한 나라입니다. 누군가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도산 안창호] -말씀하신 독립 운동을 크게 해보자는 약속의 결과물이 상해에 세워진 임시정부인 것이지요.“임시정부가 독립선언의 유일한 결과는 아니지만 3·1독립선언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분명합니다.”-선생님께서도 3·1운동 직후에 미국을 떠나 중국으로 가셨습니다. 바야흐로 임시정부 활동에 뛰어드신 것이죠. 그리고 내무총장, 국무총리 서리 역할을 맡으셔서 출범 초기 임시정부를 꾸려가는데 핵심 역할을 하셨습니다. 훗날 역사가들의 분석을 보면 임시정부 초기에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도산 안창호] -말씀드린대로 올해가 임시정부 100주년입니다.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우선 임시정부를 이야기 하자면 그 전에 3·1운동에 관해서부터 말을 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3·1운동에서 확인한 독립을 향한 국민들의 뜨거운 열망이 한 달여 뒤에 곧장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진 것이니까요. 선생님께서는 3·1운동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십니까?“기미년 독립선언을 생각하면 그때 기쁨과 슬픔이 함께 터져 나오면서 피가 파도보다 격하게 끓어오르는 마음을 진정하기가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도산 안창호]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하는 대화가 ‘누가 어떻고 어떠하더라’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평상적인 일상사에도 그렇고 역사를 들여다보는 것 또한 그럴 것이다. 작년, 그러니까 2019년에는 적어도 ‘임시정부’라는 단어가 나오고 그 인물들이 새롭게 등장해 우리들과 새삼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인물을 거론할 때 도산 안창호를 빼놓을 수가 없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 서리이자 내무총장, 구한말 신민회를 조직하고 공화정을 꿈 꾼 계몽운동가,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백범 김구] -피난지에서 피어오른 애틋한 러브스토리 같네요. 중경까지는 임시정부를 옮기는 과정은 고난의 연속이었겠습니다“그렇습니다. 윤봉길 의사 의거 후 상하이를 떠나면서 여러 곳을 거치게 됩니다. 항주(항저우)와 가흥(자싱)에서 2년, 남경(난징)과 진강(전장)에서 3년, 장사(창사)에서 1년, 광주(광저우)에서 3개월, 유주(류저우)에서 5개월 등을 지낸 뒤 광복이 될 때까지 5년동안 중경(충칭)에서 마지막을 보내지요. 내가 선발대로 중경에 가장 먼저 도착한 후 유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백범 김구] 다음은 김삼웅씨가 쓴 ‘백범 김구 평전’에 나오는 내용이다.백범은 가흥에서 긴 피신생활을 주애보와 선상에서 함께 보냈다. 임시정부 요인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임정의 명맥이 이곳에서 유지되었다. 상하이 의거 후 백범은 임시정부의 실질적인 책임자의 위치가 되었다. 그래서 그가 있는 곳이 임시정부 청사이고 그가 곧 임시정부였다. 그러나 여전히 ‘현상금을 붙은 사나이’로서 공적인 임무를 수행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주애보와 다정한 부부처럼 남호와 여러 개의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백범 김구] -상하이에 있을 때 이봉창과 윤봉길을 만난 것으로 압니다.“내가 재무부장이자 민단장을 겸임할 때입니다. 하루는 중년의 동포가 민단을 찾아와 다음과 같이 얘기를 하더군요. ‘저는 일본에서 노동을 하다가 독립운동을 하고 싶어 상하이에 가정부(假廷府, 가짜 정부)가 있다고 하여 와서 여기저기 다니면서 물어봤더니 보경리 4호로 가라기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고 말하더군요. 그는 경성 용산 출신으로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앞으로 31년을 더 산다고 해도 과거 반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백범 김구] -문지기를 요구했는데 어째서 경무국장이 됐나요.“처음에는 순사의 자격에도 못미치는 내가 경무국장이 된 것에 대해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했지요. 그러나 국무회의에서 백범은 여러 해 감옥살이를 하여 왜놈 사정을 잘 알고 혁명시기는 인재의 정신을 보아서 등용한다며 이미 임명된 것이니 사양말고 공무를 집행하라고 강권했습니다. 그렇게 나는 5년동안 경무국장으로서 신문관, 검사, 판사뿐만 아니라 형집행까지 담당했지요. 경무국의 주요 임무는 왜적의 정탐활동을 방지하고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백범 김구] 그런데 매번 경례를 할 때마다 들어보면 수인들이 입안엣소리로 무슨 말인지 중얼거리는 것이 있었다. 나는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낯익은 수인들에게 물어보았더니 “당신 일본 법전을 보지 못했소? 천황이나 황후가 죽으면 대사면령이 내려 각 죄인들을 풀어준다고 하지 않았소. 그러므로 우리 수인들은 머리를 숙이고 하느님께 ‘메이지’라는 놈을 즉사시켜 줍소서라고 기도합니다.”라고 말한다. 나도 그 말을 듣고 심히 기뻐하여 그렇게 기도를 했다. 이후 노는 입에 염불격으로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백범 김구] -도산 안창호의 여동생과 혼담이 오고 갔지요“나는 유가, 도가, 도참가, 무가, 동학, 주자학, 불가를 거쳐 기독교로 전향하게 됩니다. 신교육과 기독교 전도사업에 매진할 때 평양 숭식락교 학생으로 교육계몽사업에 종사하던 최광옥을 알게 됐습니다. 그는 내가 미혼이라는 것을 알고 안신호라는 신여성을 소개했습니다. 안신호는 안창호의 여동생으로 미모의 20살 재원이었고 최광옥을 통해 결혼을 승낙받게 됐습니다. 그런데 도산이 미국으로 갈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백범 김구] -인천에서의 감옥생활은 어땠습니까.“사형수가 됐습니다. 생각을 비우고 독서에 전념해습니다. 아버지가 ‘대학’ 한 질을 사서 넣어주셨는데 덕분에 매일 ‘대학’을 읽고 외웠습니다. 감리서 직원 중 나와 얘기해본 후 ‘문을 굳게 닫아 걸고 자기 것만 지키려는 구지식, 구사상만으로는 나라를 구할 수 없다.’며 신서적들을 읽어보라고 권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식으로 죽을 날을 당할 때까지 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