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백남우의 근현대문화유산이야기 : 이문설농탕] 서울시 종로구 견지동엔 대한민국 건국 이후 최초로 요식업 허가를 받은 오래된 식당이 있다. 1904년에 문을 열어 110년간 4대 째 맛을 이어오고 있는 ‘이문설농탕’. 이름을 알 수 없는 홍씨가 공평동에 낸 이문옥을 시작으로 2대 양씨, 3대 유원석씨, 그리고 지금의 전성근 대표가 대물림을 하고 있는 최고령 맛집이다. 초대 부통령 이시영, 국어대사전을 집필한 이희승 박사, 마라토너 손기정 선수 그리고 한때 종로를 평정한 김두한까지... 단골
[미디어파인 칼럼=백남우의 근현대문화유산이야기 : 최순우 옛집] 한국 고미술의 거목 황수영, 진홍섭과 함께 개성 3걸로 불렸던 혜곡 최순우(1916~1984년) 선생이 1976년부터 작고하기 전까지 살았던 집이다. 한국미의 본성을 명쾌하게 밝힌 ‘동양의 안목’, ‘심미안의 소유자’의 수식어가 따라붙었던 혜곡은 미술사학자로 제4대 국립박물관장을 역임하였고 한국 문화 전통과 한국의 미를 탐구, 전파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옛 문인이며 화가들이 우정을 나누고 그 흔적이 유난히 많은 성북동 그의 옛집 한옥 곳곳에는 혜곡 선생의
[미디어파인 칼럼=백남우의 근현대문화유산이야기 : 聖 니콜라스 대성당] 마포구 아현동 언덕배기 끝, 골목 안쪽으로 정교회 한국대교구청 聖 니콜라스 대성당이 있다.로마 가톨릭과 분리된 정교회는 성당 양식에서도, 가톨릭이 바실리카 식을 택하는 반면 중앙에 돔을 올린 비잔틴 양식을 사용했다. 정동 시절부터 장안의 화제를 모았던 크고 작은 여러 개의 종 역시 정교회만의 특징이다. 한국정교회가 정동을 떠나와 아현동에 성당을 신축한 건 1968년. 정교회 또 하나의 특징은 성화를 통해 성
[미디어파인 칼럼=백남우의 근현대문화유산이야기 : 서울시립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재판소(법원)인 평리원(한성재판소)이 있던 자리에 일제에 의해 1928년 경성재판소로 지어진 건물로 광복 후 대법원으로 사용되었으며, 1995년 대법원이 서초동으로 옮겨간 후 2002년부터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인접한 도로 면보다 6미터 정도 높아 자연스럽게 고단의 개념이 도입된 건축이다. 건물의 애초 용도가 군림과 권위로 상징되는 재판소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어색하지 않은 모습이다. 당
[미디어파인 칼럼=백남우의 근현대문화유산이야기 : 천도교 중앙대교당] 1945년, 광복과 함께 상해 임시정부에서 귀국한 김구 선생이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천도교 중앙대교당이었다.독립선언서를 인쇄해 전국으로 배포했던 이종일, 그리고 천도교의 3대 교주 손병희. 두 사람 외에도 민족대표 33인 중엔 열다섯 명의 천도교인이 있었다. 3.1운동의 중심이자 이후 독립운동의 지원군이었던 천도교. 그 중심에 있던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종교집회 장을 떠나 민족운동의 진앙지였던 것이다.이 교당이 없으면 3.1운동이 없고3.1운동이 없으면 상해 임시정
[미디어파인 칼럼=백남우의 근현대문화유산이야기 : 인천 아트플랫폼] 인천항과 큰 길을 사이에 둔 항동, 신흥동, 해안동 등 구도심에는 항구가 가까운 입지조건으로 오래전부터 거대한 규모의 물류창고가 즐비했습니다. 그중 개항기 근대건축물이 잘 보존돼 있던 해안동 일대가 지난 2009년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탈바꿈했다. 13개 동의 예술창작 공간으로 구성된 아트플랫폼은 일제강점기 근대 창고업이 시작된 곳. 인천항을 통해 미곡을 반출하기 위해 일제는 이 일대에 대규모 창고들을 건립했고 일본해운회사도 앞다퉈 진출했다
[미디어파인 칼럼=백남우의 근현대문화유산이야기 : 염천교 수제화거리] 서울역에서 중림동으로 이어지는 다리인 염천교 옆으론 50여 년 역사의 전문상가가 있다. 4층짜리 건물에 들어서 있는 구두매장과 공장들, 낡은 간판에 새겨진 점포 이름에서부터 그 세월이 느껴진다. 다양한 디자인의 신사화를 비롯해 화려한 무도화까지, 수 십 년 장인들이 빚어내는 구두들이 절로 눈길을 끈다.살롱화로 통화던 맞춤형 구두는 개화기 모던보이들을 시작으로 70~80년대까지도 멋쟁이들의 로망이었고, 이곳 염천교는 그 중심지였다. 염천교 수제화 거리에서 50년 넘
[미디어파인 칼럼=백남우의 근현대문화유산이야기 : 이화학당] 1886년 최초의 여성 선교사였던 메리 스크랜튼이 황화방(皇華坊: 조선시대 초기부터 있던 한성부 서부 행정구역 중 하나)이었던 지금의 정동에 한옥 건물의 학교를 열었다. 200칸 규모의 기와집으로 번듯하게 세워진 학교는 폐쇄사회의 조선 여인들에겐 그야말로 파격적인 해방구가 되었다. 이 건물은 35명 정도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교실과 교사 숙소 등을 갖추고 있었다. 이화학당. 고종은 조선의 첫 여학교에 황실의 상징이었던 배꽃의 순결과 명랑함을 교명(배
[미디어파인 칼럼=백남우의 근현대문화유산이야기 : 배재학당] 개화기, 외교가가 형성되면서 ‘한국 최초’의 서양식 시설들이 들어선 정동. 그 시기 방 두 칸, 두 명의 재학생으로 시작된 정동의 학교 하나, 바로 배재학당이다. 배재고등학교의 전신이자 1885년 8월 미국 북감리교 선교부 선교사인 아펜젤러(Appenzeller,H.G.)가 세운 배재학당은 외국인 선교사가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사학(私學) 교육기관이다.1885년 7월 서울에 도착한 아펜젤러가, 1개월 먼저 와 있던 의사 W.B.스크랜튼의 집을 구입, 방 두 칸의 벽
[미디어파인 칼럼=백남우의 근현대문화유산이야기 : 하우현 성당] 안양 인덕원에서 판교 신도시로 넘어가는 청계산 기슭 도로변 언덕 위엔 아담한 성당 하나가 있다. 신도 수가 200명 남짓한 작은 본소지만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곳이다. 흰색 예배당은 1960년대, 미군부대로부터 자재를 원조 받아 신축한 건물이다.미사용 앉은뱅이 책상이 손에 꼽을 만큼 아담한 성당 내부. 봄 여름철엔 천막에서 미사를 드리기도 한다. “나는 진리를 전하기 위해 조선으로 왔으며본국으로 송환되기를 원하지 않고순교하기를 열망한다.”- 聖 볼리외 베르나르도
[미디어파인 칼럼=백남우의 근현대문화유산이야기 : 약현성당] 서울시 중구 서쪽의 끝자락, 서소문공원의 서쪽, 지하철 2호선 충정로역 남동쪽에 자리 잡은 중림동은 조선시대의 지명인 약전중동(藥典中洞)과 한림동(翰林洞)에서 글자를 따 붙인 이름이다. 그 중림동에 소재한 약현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성당이자 사적 제252호로 지정된 근대 건축사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 건축물이다.성당이 위치한 곳은 예전에 약초를 재배했던 지역으로 '약초 밭이 있는 고개'라는 뜻의 약전현(藥田峴)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이후에 줄여서
[미디어파인 칼럼=백남우의 근현대문화유산이야기 : 대한의원] 창경궁로를 따라 창경궁의 후원이었던 옛 함춘원 자리. 1908년 당대 동아시아에서 손꼽히는 초대형 신식병원이 들어섰다. 근대의학의 분과 진료와 체계적인 의학교육, 대한의원의 시작이었다. 을사조약 후 통감부의 지휘 아래 당시 관청 건물을 담당했던 탁지부 소속의 일본인 건축가에 의해 설계되었으며 본관, 7개 병동과 의학교 등 2천 평이 넘는 초대형 의료기관으로 개원하였다. 대한의원과 같은 역사주의 건축 양식은 중앙을 강조하고 좌우를 대칭으로 구성하는 게 일반적인
[미디어파인 칼럼=백남우의 근현대문화유산이야기 : 서대문형무소] 형무소: 범법자들의 처벌과 교화의 장소! 그러나 순전히 일제의 탄압 수단이었던 ‘서대문 형무소’ 일제 강점기, 수 천 명 독립투사들의 염원은 그렇게 좌절됐다. 을사조약 이후 국권침탈을 시작한 일제는 가장 먼저 대규모 교도시설을 만들었다. 500명이 넘는 기결수를 수용할 수 있는 근대식 목조 가옥은 당시 전국에 있던 감옥을 합한 것보다 두 배가 넘는 규모였다. 1910년 일제가 조작한 총독암살미수사건으로 체포된 105명의 독립운동가들을 시작으
[미디어파인 칼럼=백남우의 근현대문화유산이야기 : 삼일로 창고극장] 쇼핑의 메카 명동, 명동성당이 보이는 삼일로 대로를 따라 퇴계로 방면으로 가다 보면 나지막한 언덕길 하나를 만나볼 수 있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언덕 위에 소극장 하나가 지나는 이들의 궁금증을 자아낸다. 우리 연극계의 보물 같은 이야기들이 스며있는 곳이다.바로 대학로 연극시대를 열기 전, 연극의 중심지였던 명동을 40년 동안 지키고 있는 최장수 소극장, 삼일로 창고극장이다.삼일로 창고극장은 1975년 명동성당 인근의 2층 가정집을 개조해 ‘에저또 창고극장’이란
[미디어파인 칼럼=백남우의 근현대문화유산이야기 : 서산부인과] 퇴계로를 따라 신당동 쪽으로 가다 보면 광희문 맞은편으로 묘하게 생긴 건물이 눈길을 끈다. 삼각형 예각의 좁은 땅이지만 대로변에 자리 잡아 건축 당시엔 인근의 랜드마크로 계획됐다. 한눈에도 파격적인 조형미를 뽐내는 건물은 ‘선과 지붕으로 기억되는 한국 현대건축의 거장’ 김중업(1922~1988) 이 산부인과로 지은 것으로 지금은 디자인 회사의 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김중업이 역점을 둔 곳은 건물의 수직 동선을 담당하고 있는 램프실. 환자들을 위
[미디어파인 칼럼=백남우의 근현대문화유산이야기 : 구 제일은행 본점] 일제강점기, 경성의 중심지로 떠오른 남대문로 일대 중앙은행을 마주 보고 남대문로에 들어선 대표적인 민간은행. 서민금융의 전당 舊 제일은행 본점.화려한 파마머리를 휘날리는 모던걸이다리에 힘을 주어 포장도로를 밝고 간다이 일대는 경성의 센터이다.고층건물이 즐비하여 남대문통이라는 거리를 만들어근대적 문화도시다운 향기를 발산하고 있다.미츠꼬시 백화점 건너에는 조선은행 앞 광장이 전개되고광장 동편에 붉은 벽돌로 치장한경성우편국이 넓게 자리하고 있다. - 1930년대 남대문
[미디어파인 칼럼=백남우의 근현대문화유산이야기 : 반포대교] 100년 근현대사의 영욕이 새겨진 한강 다리 중 침수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잠수교. 그렇게 낮은 잠수교 위로는 강남 발전을 가속화한 반포대교가 놓였다. 대한민국 최초의 복층(2층) 교량인 반포대교는 대한민국 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과 서초구 반포동을 잇는 한강의 교량으로 1층의 잠수교 위에 강합성 상형교(Steel Box Girder Bridge)로 가설되었다. 한강르네상스 프로젝트 당시, 반포 한강공원을 조성하면서 반포대교에 설치된 야경 명소로 유명세를 달리하는 달빛 무지개
[미디어파인 칼럼=백남우의 근현대문화유산이야기 : 효창운동장] 지금의 효창공원은 1944년 이전에는 정조의 장남 문효세자가 묻혀있는 효창원이었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문효세자의 묘역은 강제 이장되었고 그로 인해 효창원에서 효창공원으로 격하되었다.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 그리고 김구 선생 등... 다행히 광복과 함께 공원은 애국선열묘역이 되고 그로부터 10년 뒤 이곳엔 10만 관중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효창운동장은 1960년 10월 최초의 국제규격의 축구전용 운동장으로 완공되었다. 2만3000여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미디어파인 칼럼=백남우의 근현대문화유산이야기 : 평화시장] 평화시장은 서울 동대문(흥인지문)과 동대문역사문화박물관(구 서울운동장) 사이 청계천 변 가까이에 형성된 전국 최대 규모의 의류전문 도매상가로 ‘평화’시장이 된 것은 한국전쟁 때 남쪽으로 내려온 북한 상인들이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뜻에서 붙인 이름으로 알려지고 있다. 평화시장이 청계천 남쪽에 자리 잡게 된 것은 청계천 변 판자촌에서 ‘재봉틀’(미싱) 한두 대로 옷을 만들어 판매하던 데서 출발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청계천 변에서 노점상 형태
[미디어파인 칼럼=백남우의 근현대문화유산이야기 : 심우장] 성북동의 한 후미진 비탈길을 오르면 작은 암자처럼 고즈넉한 한옥 한 채가 있다. 남향을 선호하는 한옥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북향집.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기 싫어 남향을 거부한 이곳은 한국 불교의 근대화를 주도했던 승려이자 민족 시인이었던 만해 한용운 선생이 만년을 은거했던 집이다. 구도의 뜻을 담아 만해 선생이 직접 지은 택호 심우장. 심우장(尋牛莊)이란 명칭은 선종(禪宗)의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 가지 수행 단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