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백범 김구] -청나라로 가던 중 뜻밖의 일이 생겼으니 그쪽으로 발길을 재촉했겠네요.“아닙니다. 주인에게 ‘왜놈들은 우리 조선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의 원수이니 시체를 바다속에 던져서 물고기와 자라들까지 즐겁게 뜯어먹도록 하라’고 지시하고 ‘국모보수(國母報讐)의 목적으로 이 왜인을 죽였노라. 해주 백운방 텃골 김창수’라고 포고문을 써서 길기 벽에 붙이도록 했습니다. 아울러 주인에게 ‘안악군수에게 사건의 전말을 보고하라. 나는 내 집으로 돌아가서 연락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백범 김구] 일본인 군인 때려눕힌 치하포 사건-혼자 떠났습니까.“안 진사 댁 사랑에 머물고 있던 참빗장수 김형진과 같이 길동무를 하기로 했으나 본가에 가는 바람에 나 혼자서 집에서 부리던 말 한 필을 팔아서 200냥의 여비를 준비하여 청나라 금주에 있는 서옥생의 집으로 가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런데 평양에 도착하니 관찰사 이하 전부가 단발을 하고 길목을 막고 서서 지나가는 행인들을 붙들고 머리를 깎고 있었습니다. 단발령을 피하려고 시골로나 산골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백범 김구] -아들 안중근도 만났을 테지요.“안 진사는 눈에 정기가 있어 사람을 누르는 힘이 있고 기상이 뇌락하여 비록 조정의 대관이라도 그와 면대하면 자연 경외하는 마음이 일어날 정도였습니다. 그때 안 진사의 맏아들 중근은 13살로 상투를 짜고 있었는데 머리를 자주색 수건으로 질끈 동이고 돔방총이라는 짧은 총을 메고 날마다 사냥을 일삼고 보기에도 영기가 발발하고 청계동 군사들 중에 사격술이 제일이어서 짐승이나 샌나 그가 겨눈 것은 놓치는 일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백범 김구] 안중근과 아버지 안 진사를 만나다-일단 퇴각은 했으나 다음 수습책은 어떻게 세웠습니까.“잘 훈련된 군사가 없었다는 것이 실패의 원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오합지졸로는 경군이나 일본군과 싸워서 이기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동학교도가 아닌 사람도 전투에 경험이 있는 자를 초빙해 군사훈련을 시켰습니다. 주로 장교 경력이 있는 사람을 정중하게 모셔왔지요. 그러던 어느날 정덕현과 우종서라는 사람이 만나자고 요청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백범 김구] 그러던 백범은 18살 때인 1893년 2월 11일 동학에 입도했다. 동학은 1860년 최제우가 창시한 민족 종교로 기일원론(氣一元論)과 후천개벽(後天開闢) 사상,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특징으로 한다. 2대 교주인 최시형이 교단과 교리를 체계화하였다. 1894년 농민전쟁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당시 조선은 사회적 혼란과 위기가 지속됐다.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농민층의 분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고, 오랜 기간 외척(外戚)의 세도정치가 계속되면서 정치 기강이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백범 김구] -남들보다 글을 열심히 배운 것은 신분상승을 위해서인가요.“워낙 우리 집안 형편이 어려운데다 상놈의 신분이어서 집안에 과거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나오면 자연스럽게 신분상의 얘기가 되었지요. 그래서 1892년 나이 17살 때 해주에서 임진경과(壬辰慶科)를 실시한다는 과문(科文)이 나붙었습니다. 마지막 실시되는 과거였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리고자 아버지 이름으로 과거시험을 봤는데 낙방했습니다. 이때 이상한 말들이 나돌았습니다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백범 김구] 빈한한 상놈의 아들로 태어나-얘기를 어린 시절로 돌리겠습니다. 태어난 곳의 환경은 어떠했습니까.“그러니까 1876년 7월 11일 새벽에 황해도 해주읍 백운방 텃골에서 아버지 김순영과 어머니 곽낙원의 외아들로 태어났지요. 아버지는 4형제 중 둘째로 집이 가난하여 장가를 제대로 못가고 24살 때 삼각혼에 의해 장연에 사는 현풍 곽씨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삼각혼이란 세 성(姓)이 혼기에 이른 자녀를 서로 교환하는 제도를 말합니다. 세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백범 김구]남목청 사건 -임시정부 시절에 겪은 남목청 사건을 말씀하시는 거죠.“그렇습니다. 1938년 5월 임시정부가 옮겨간 중국 장사(長沙)에서 독립운동 세력의 합당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모임에서 밀정인 조선혁명당원 이운한의 총격으로 가슴에 총상을 입었습니다. 정신을 잃었지요. 나중에 알았지만 총에 맞은 나는 장사 상아병원으로 옮겨졌고, 수술 후 기적적으로 회복했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총알이 심장 앞에서 멈췄다는 것입니다. 그때의 일을 ‘백범일지’에도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백범 김구] 나의 소원그렇다면 왜 일지(日誌)가 아닌 일지(逸志)라고 했을까. 그것은 그날 그날의 기록인 일기가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라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상권을 쓸 때 김구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태로운 삶을 살고 있었고 하여 고국에 있는 두 아들에게 보내는 유서형식으로 글을 썼다. 하권은 정신과 기력이 더 쇠잔하기 전 독립운동을 하면서 걸어온 소회의 글을 썼다. 말미에 붙인 ‘나의 소원’은 교과서에도 실려 있어 ‘백범일지’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백범 김구] 두 아들에게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에는 익숙한 공원이 있다. 지리적으로는 효창동 외에도 청파 2가동, 마포구 공덕동과 신공덕동까지 영역이 있으며 일반적 공원과는 달리 호국보훈 관련 시설 및 유적지들이 있어 호국적, 역사적인 분위기를 보이고 있다.원래는 조선왕조 22대 임금 정조의 장남 문효세자의 묘가 묻혀져 ‘효창묘’라고 했다.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 성씨의 묘소인 의빈묘도 함께 있었다. 고종 때 효창묘에서 효창원(孝昌園)으로 개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김원봉] 고향에 들르다김원봉은 1946년 2월 하순 꿈에 그리던 고향을 찾아 마을 주민들과 만나 기쁨을 나누었고 부산에서 열린 3.1절 기념행사에 참석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냈다. 그러던 중 1947년 3월22일 전국노동조합평의회의 주도로 24시간 총파업이 단행됐는데 이때 미군정과 우익 청념단체들은 김원봉이 참여하고 있는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과 그 산하단체들을 일제 습격했다. 이때 일제 때 악질 경찰관 노덕술에게 붙잡혀 뺨을 맞는 수모를 당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김원봉] 박차정과의 러브스토리-만난 지 1년만에 결혼하게 됐는데 그 과정이 궁금합니다.“러브스토리를 얘기하는 건가요? 허허 참...3개월 뒤 북경대학에서 열린 중국 공산청년동맹의 비밀 초청강연회에 참석했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토론회에서 박차정을 봤습니다. 화북대학 대표로 나왔는데 뛰어난 토론능력을 보여주더군요. 토론이 끝나 인력거를 같이 타게 됐습니다. 이때 좋아하는 책 얘기를 하다가 박차정은 일신여학교때 소설을 썼다고 하더군요. 제목은 ‘철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김원봉] -졸업생 중에는 민족시인 이육사도 있었다고 하던데요.“그는 일찍부터 의열단에 가입했습니다. 이육사는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돼 대구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습니다. 그는 수인번호 264를 따서 호를 ‘육사’로 삼았습니다. 본명은 이활입니다. 이육사는 1933년 7월 14일 공작금 80원을 받고 서울로 잠입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가 맡은 임무는 조선혁명간부학교 학생을 모집해 남경으로 보내는 일이었는데 1934년 3월 일경에게 체포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김원봉] 일왕 저격 김지섭-도쿄 왕궁 진입을 시도한 것이 그때쯤인가요.“그러니까 의열단원 김지섭입니다. 1924년 1월 5일 저녁 도쿄의 궁성 앞 이중교(二重橋)에서 왕궁 진입을 시도하며 세발의 폭탄을 던졌습니다. 세발이 모두 불발됐지만 의열단원이 왕궁 앞까지 와서 폭탄을 던졌다는 것은 일본인들에게 굉장한 충격을 주었습니다.”-왜 그날을 택했습니까.“1923년 9월1일 관동 대지진이 일어났는데 일본군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려 수많은 동포들을 죽였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김원봉] 단재 신채호와 만남-대체적으로 어떤 내용입니까.“이 선언문을 필독서로 지정해 단원들의 지행합일의 정신을 갖도록 했습니다. 나는 인쇄소에 ‘의열단선언’ 인쇄를 부탁하고 별도로 ‘조선총독부 관공리에게’라는 문서를 작성하고 이 두 문건을 군내에 있는 동지들에게 보냈습니다. ‘의열단선언’은 5개 부문으로 돼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일본을 조선의 국호와 정권과 생존을 박탈해간 강도로 규정하고 이를 타도하기 위한 혁명이 정당한 수담임을 천명했습니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김원봉] 일본군 대장이 아닌 미국인 여인을 쏜 황포탄 사건-결과는 어떻게 됐나요.“1922년 3월28일 나는 부두가 잘 보이는 둔덕길에 서상락, 강세우 동지와 함께 자전거를 하나씩 끌고 나갔습니다. 거사에 세 동지가 위급해지만 자전거를 넘겨주려고 했습니다. 배가 들어오고 황포탄 부두에 접안했습니다. 이윽고 다나카가 사다리로 내려왔습니다. 이를 보던 오성륜이 다가가 권총을 쏘았습니다. 세발의 총성이 울렸는데 그 순간 금발의 여자가 갑자기 조준선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김원봉] 조산총독부를 폭파하라-다음 폭파작전은 어떻게 진행됩니까.“조선총독부를 목표로 삼았습니다. 의열단원 김익상이 책임을 맡았습니다. 김익상이 북경에 왔을 심산 김창숙의 소개로 만났습니다. 이때 나는 김익상에게 ‘조선의 독립은 2000만 민족의 팔할 이상이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이때 선두에 나가 희생됨이 마땅하다’는 말을 했는데 감격한 김익상이 조선에 잠입해 거사하겠다고 나섰습니다. 폭탄 두 개와 권총 2자루를 갖고 열차 안에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김원봉] 밀양경찰서 폭탄사건-엽서 내용이 어떤 암호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동지들의 원한을 풀고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네요. 생각만 해도 비장함을 느낍니다. 곧이어 밀양경찰서 폭탄사건도 생겨나지요.“대마도를 통해 부산으로 간다는 암시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또한 부산경찰서장이 순순히 자기를 만나줄 것을 예상하고 동지들과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엽서에 적어놨지요. 밀양경찰서는 그러니까 부산경찰서 폭탄사건이 있은지 불과 두달 만인 1920년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김원봉] 끝가지 보복-누구한테 지시를 했나요.“부산 출신 박재혁입니다. 부산 범일동에서 태어나 상하이와 싱가포르 등지를 왕래하면서 무역업에 종사를 했고 망명한 애국지사들과 꾸준히 만났습니다. 1920년 7월 의열단에 입단했고 부산경찰서 폭파 계획이 나오자 이에 적극 합류했습니다. 이를 알고 1920년 8월 나는 싱가포르에 있는 박재혁에게 전보를 쳐서 상하이로 불렀고 부산경찰서 폭파와 서장 암살 임무를 맡겼습니다. 박재혁은 그해 9월초 상하이를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김원봉] 단지 결의-만약 그런 전략이 먹혀들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까 전략B라고나 할까요.“일제가 식민지 지배를 끝내 포기하지 않더라도 의열단의 폭력투쟁이 대중을 각성시켜 대대적인 항일폭동을 격발할 수 있을 것이고 그로써 마침내 일제를 타도한다는게 의열단의 폭력투쟁 노선입니다.”-의열단이 탄생하는 날 맹세의 뜻으로 어떤 결의에 찬 행동을 하게 됩니까.“13명의 단원 중 이종암이 호신용으로 품속에 넣고 있던 단검을 꺼내 단지맹세를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