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10.26 최후의 만찬 아이디어 박정희가 아닌 김계원그렇다면 10.26사건이 생기던 날 궁정동의 만찬은 어떻게 해서 이루어졌을까. 그동안 이 날 만찬은 박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 정설로 됐다. 그러나 10.26 재판장을 맡았던 김영선 장군은 이와 다르다. 궁정동 안가에서 베풀어진 최후의 만찬은 김계원 비서실장의 아이디어였다고 말한다.김 장군의 증언에 의하면 10월26일 오전 서울 용산의 미군헬기장에서 김재규 중정부장과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부산에서 받은 박 대통령 서거 소식계엄군이 진주한 지 사흘째부터 부산, 마산 등지의 소요는 어느 정도 진정이 됐고 거리의 질서도 많이 회복됐다. 10월24일이 되자 통금시간을 종전과 같이 환원시켰다. 당시 부마사태를 요약하면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에서 대학생과 시민들이 공화당의 유신 독재에 반대하여 일으킨 시위 사건이다. 야당인 신민당 전당 대회에서 김영삼이 총재에 선출됐으나 이후 총재직 정지, 의원직 박탈, 신민당 소속 국회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유신 7주년 기념식 그리고 부산일원 계엄령선포1961년부터 시작된 3공화국은 18년동안 참으로 파란과 곡절이 많았다. 5.16 군사정변을 일으켜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은 탓에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 흔적과 잔물결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특히 새로운 의욕으로 국가운영을 해보려고 했으나 자신의 뜻과는 달리 감옥에서 지내는 박근혜 전 대통령만 보더라도 그렇다.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은 총탄에 맞아 쓰러졌고 딸은 대통령 임기도 채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우리나라 최초의 TV 방송국 개국하다이러한 문화예술에 관심이 많아 우리나라 최초로 TV방송국 개국에 앞장선다. 그러니까 1961년 여름 오재경 공보부장관을 만나 TV방송국 설립계획을 논의했다. 일본에 갔을 때 집집마다 TV안테나 있는 것이 부러웠다. 정부 예비비에서 1억환을 마련해 연내에 남산 기슭에 TV방송국을 짓기로 했다. 하지만 방송용 기자재를 사올 돈이 부족했다. 장관을 불러 중앙정보부가 그동안 간첩들로부터 압수해 갖고 있던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종점에 이르러 어떤 인생이 가치있는 삶일까요”JP는 2018년 6월23일 9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인생의 종착역을 미리 짐작을 했는지 세상과 하직하기 직전 봄 인간적 소회를 담은 ‘남아 있는 그들에게’라는 명상의 글을 책으로 펴냈다. 머리말에 “저의 40여년 정치인생은 2004년 정계은퇴로 마무리되었으며 이제 아흔을 훌쩍 넘은 저의 삶도 막을 내릴 것입니다. 종점에 이르러 어떤 인생이 가치있는 삶일까요. 자신의 남은 삶의 에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5.16거사 모의 암호 ‘흐루시초프’JP와 박정희는 1961년 초봄인 2월19일 대구에서 혁명결의를 했다. 출동병력이 필요했기에 한강 이북은 박정희가 젊은 야전장교를 포섭하고 한강 이남은 JP가 포섭하기로 하면서 혁명의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다음은 ‘김종필 증언록’에 나오는 내용이다.청계천과 무교동 사이에 조흥은행 본점이 있었는데 인근에 ‘상수’라는 술집 하나가 있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으면 ‘상수’이지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김종필(JP)을 향한 칼날 ‘국민복지회사건’ 5.16거사 당시 혁명공약 작성 등 2인자로 출발한 김종필(JP)은 1968년 ‘국민복지회사건’으로 공화당에서 축출당한다. 국민복지회란 어떤 단체일까. 정식 명칭은 ‘한국국민복지연구회’이다. ‘복지회’는 1971년의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JP를 후계자로 추대하려고 JP계가 만든 모임이다. 회장에 김용태(金龍泰), 부회장 최영두(崔永斗), 사무총장 송상남(宋相南) 등이며, 시도책임자는 이원만,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대권후계자 지목받은 베트남전 영웅항간에는 박정희 대통령을 시행한 김재규가 채명신 장군을 후계자로 추대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 이야기는 과연 무엇인가.베트남전의 영웅이 되어 군부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던 채 사령관은 박정희 장군과 함께 비록 5.16에 참가했지만 혁명공약대로 군에 원대복귀, 본연의 길을 걸어 후배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았다. 채 사령관은 1969년 5월 베트남전에서 임무를 마치고 귀국한 후 10월유신이 일어나던 1972년 2군사령관을 마지막으로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베트콩 유격전에 맞선 게릴라 맹장 국민들의 열렬한 전송을 받으며 베트남 전선에 도착한 채 사령관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정글 속을 비호같이 누비는 베트콩도 아니요, 그렇다고 월맹의 정규군은 더 더욱 아니었다. 베트남 파병되기 전부터 전쟁공포에 떠는 사기문제가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현지에 도착한 뒤에는 장병들이 더욱 겁에 질려 있었다.“정글에는 베트콩이 무수히 파놓은 함정이 곳곳에 있었고 함정에 빠지면 죽창에 찔려 죽는다, 베트콩이 언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한진그룹 노무자들과 잊지 못할 인연다시 이범준 장군 얘기로 이어진다. 1966년 주베트남 한국군 100군수사령관으로 근무할 때 이 장군은 한진그룹(당시 한진상사)의 노무자들과 잊지 못할 인연을 맺었다. 그해 1월 퀴논지역에 한국인 노무자 200명이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알고 보니 한진상사 직원들이었다. 이튿날 대표되는 몇 사람이 이 장군을 찾아왔다. 이들은 미군과 계약을 맺어 군수물자 하역작업을 하기 위해서 왔다고 말했다. 그런데 기거할 데가 없을 뿐만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베트남과 미군 양쪽에서 지원받아1964년 10월 한 베트남간 협정체결을 맺기 직전 이 장군은 ‘파병계획단’ 일원으로 다시 베트남에 도착했다. 이세호 장군이 파병계획단장이었다. 전투부대 파병에 앞서 베트남군과 주베트남 미군관계자들을 접촉하면서 두 가지 커다란 핵심사항을 해결했다. △한국군이 파견되면 베트남정부는 베트남군과 똑같이 급식을 지급해야 한다. △주베트남 미군은 보급품, 장비, 탄약 등 전투물자 일체를 한국군에게 지급함은 물론 주베트남 미군과 똑같이 급식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전쟁이 남긴 영화 ‘님은 먼 곳에’지금 우리나라 2,30대 젊은이들에게 “베트남 전쟁에 대해 얼마나 아느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까. 아마 우리나라가 왜 파병이 됐고 전쟁에 참여했던 과정에 대해서 확실하게 대답하는 젊은이들이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 ‘님은 먼 곳에’를 얘기하면 표정은 달라질 것이다. 2008년 개봉된 이준익 감독의 이 영화는 많은 관객수를 모으며 영화팬들에게 감동의 사랑을 받았다.영화 ‘님은 먼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극비명령’ 북의 도끼만행을 보복하라3공화국 당시 크고 작은 많은 사건들이 생겨났지만 이 가운데 1976년 8월18일 북한군이 저지른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은 남북간 가장 위급한 상황으로 치달아 일촉즉발의 위기가 조성됐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사건으로 미군 장교 2명이 살해됐으니 말이다. 보복작전은 미8군과 한국군 1공수여단이 합세했다. 당시 1공수여단장은 박희도 장군이었다. 그는 부대장으로 부임한 지 알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보복작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외신기자들에 대한 ‘대통령선거 취재’ 방해1971년 4월 어느 날 미대사관 관계자로부터 김 장군을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평소 귀에 익은 공보담당 참모의 목소리였다. 그는 “김 공사(전직 호칭), 우리 미국 취재진을 막는 이유가 뭐요?”하는 것이었다. 미국 취재진들은 제7대 대통령선거를 취재하려고 했다.까닭을 모르는 김 장군이 자초지종 캐물었다. 사연인 즉 워싱턴 포스트의 해리슨 도쿄지국장을 비롯, 뉴욕타임즈 기자들이 대통령 선거 취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10월 유신’의 영어표기를 어떻게 하느냐1970년 1월 자유당이 신민당에 합당되고 또 신민당이 한국독립당에 흡수됐다.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 선거, 그리고 1972년 제8대 대통령선거 등 두 번의 대통령선거가 치러졌다. 무엇보다 정국을 강타한 것은 장기집권을 위한 유신헌법의 공포(72년 12월)였다. 유신헌법은 국내외적으로 많은 파장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국내 야당 정치인의 반발도 거셌지만 외국의 시선도 곱지 않았다. 미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3공화국 최대 미스테리 정인숙 사건정인숙 피살사건은 3공화국 당시의 의문사로 고급 요정 종업원인 정인숙씨가 교통사고를 가장한 사고에 의해 암살된 사건이다. 1970년 3월17일 밤 11시경, 서울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근처 도로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를 위장한 총격 살인사건이었다. 피해자 정인숙(본명 정금지)은 총상으로 사망하였고 그의 차를 운전하던 넷째 오빠 정종욱은 넓적다리를 관통당하였으나 생존해 있었다. 정종욱은 택시 기사에게 도움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미국의 군견 100마리를 보내라이렇듯 3공화국때에는 우리가 알 수 있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 어처구니 없거나 흥미있는 사건들도 많았다. 그 중 하나를 더 소개해본다. 김윤호 장군이 주미공사 시절에 본국으로부터 비밀훈령 하나를 받았다. ‘군견100마리를 보내라’는 의한한 것이었다. 당시 국내에는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자주 발생하여 군당국은 효과적인 대간첩작전을 위한 묘책 찾기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군견부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남한땅을 밟은 이수근 첫 일성 “카, 술맛 좋다”3공화국때 최대의 미스테리 사건 중 하나는 아마 ‘위장귀순 이수근’이 아닐까 싶다. 북한의 고위직에 있던 이수근이 귀순했다가 탈출 도중 붙잡힌 사건은 국내외 언론으로부터 지대한 관심을 받았다. 특히 이중간첩이라는 사실에 적지 않은 충격과 놀라움을 던져준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그 자세한 내막은 어떤 것이고 얼마 만큼 우리가 확실하게 알고 있을까. 세월이 지난 후 김윤호 장군이 주미공사 시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군조직 수술 ‘특검단’을 설치하라박 대통령은 1.21사건의 충격으로 대대적인 군조직 개편에도 손을 댔다. 이듬해 5월 군조직 수술을 위해 ‘특명검열단’(특검단)의 설치를 지시했다. 각군에 대해 대통령의 특명사항을 점검하고 수시로 보고하는 대통령의 임시 직속기구였다. 그러나 이는 대외적인 명분에 불과했다. 특검단의 본래 목적은 군조직을 개편하는 것이었다. 특검단은 과거 일본이 방대한 군조직을 검열하기 위해 일왕(日王)의 이름으로 원로급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북파요원 각군 형무소 무기수만 뽑아 결정다음은 이 사건과 관련, 실종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회고록에 나오는 내용이다.이 사건의 내용은 내가 가장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문제의 난동자들을 처음부터 관리한 것은 중앙정보부장 재임시의 나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김신조 일당의 무장공비 청와대 습격사건으로 북한에 허를 찔렸다고 생각, 보복전을 펴기로 하고 특공결사대를 조직하기로 결심했다. 박정희는 이 작전계획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